청우헌수필 424

댑싸리 전설(7)

댑싸리 전설(7) 때가 되니 올해도 댑싸리가 발갛게 물이 들었다. 아내가 씨를 뿌린 후로 네 번째 드는 물이다. 아내는 이 붉게 물든 댑싸리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씨를 뿌리고 겨우 싹이 돋아날 때쯤 아이들 집으로 자리를 옮더니 그 길로 세상을 바꾸고 말았다. 돌아올 때쯤은 제법 복슬복슬한 모습이거나 붉은 물이 들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여겼을지 모르겠다. 댑싸리는 아내 손으로 씨가 뿌려지고 싹을 틔웠다. 아내의 소생이라 할까. 자라고 물들고 익어서 떨어진 씨가 다시 싹을 틔우고, 자라 복슬복슬해지고 선혈 빛 붉은 물을 들이기에 해를 거듭했다. 댑싸리는 저 혼자서만 부지런히 모습을 바꿀 뿐, 아내의 눈길을 한 번도 얻지 못했다. 싹을 트게만 해놓고는 다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

청우헌수필 2026.10.09

유홍초 사랑

유홍초 사랑 오늘도 강둑길을 걷는다. 어디 원행이라도 할 때면 이 강둑길을 걷고 싶어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고 싶을 만큼 그리운 내 산책길이다. 운동 삼아 즐겨 걷기도 하지만, 흐르는 물이며 그 물에 유유한 구름을 보며 걷는 운치도 상쾌하고, 길섶에서 피고 지는 들꽃과 만나는 정취도 그윽하기 그지없다. 철을 바꾸어 가며 피는 들꽃들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보는 이의 마음속을 은근히 파고든다. 그 꽃들을 혼자서만 보기가 아까워 영상으로 담아, 생각나는 이에게 보내며 꽃말에 실어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근래에는 한련초, 비단풀, 유홍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물봉선 들을 보내주었는데, 모두 정감 어린 꽃말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 그를 만났을 때 들고 있는 핸드폰을 언뜻 보노라니, 둥근잎유홍초가 ..

청우헌수필 2026.10.01

강둑의 상사화 그리고 그리움

강둑의 상사화 그리고 그리움 강둑에 웬 상사화 꽃대가 솟아오르더니 꽃대 끝에 분홍 꽃 두어 송이를 피워냈다. 꽃대 주위에는 가로수로 서 있는 벚나무에서 떨어지거나 베어낸 마른 가지가 널브러져 있고, 주변에는 뻗어 나가고 있는 칡넝쿨과 함께 온갖 풀들이 무리 지어 나고 있다. 저 꽃은 어디서 왔을까. 상사화는 뿌리 번식을 하는 꽃이다. 열매를 맺기는 하지만 여물지는 못해 씨앗 노릇은 할 수 없다. 종족을 퍼뜨리자면 오직 뿌리가 갈라져서 꽃을 피우게 할 수밖에 없는데, 뿌리가 어디서 날아와 꽃을 피울 수는 없는 일이다. 꽃대가 나고 꽃을 피우자면 무슨 힘이든 다른 힘에 의지해서 뿌리가 옮겨져 오는 수밖에 없는데 이 강둑에 무엇이, 누가 옮겨 놓았단 말인가. 모든 일은 인연에 의해 일어난다는 불가佛家의..

청우헌수필 2026.09.13

집착에 대하여 -상사화를 보며

집착에 대하여-상사화를 보며 올해 상사화도 잎이 말라갈 겨를도 없이 무참히 잘리고 말았다. 마을 숲 풀베기하는 이들에겐 상사화 잎도 베어내야 할 한갓 잡풀에 지나지 않았다. 잎이 말라 가는 것도 상사화의 한살이치레다. 초봄에 틔운 움으로 봄내 잎을 피워내다가 봄이 무르익을 무렵부터 말라간다. 다 마른 잎은 여름이 한창일 때 제 난 자리로 스며들 듯 잦아진다. 여름이 고비 넘을 무렵 잎 잦아진 자리에 새로 난 싹이 꽃대로 솟아 그 끝에 홍자색 봉오리 분홍 꽃을 피워낸다. 잎은 꽃을, 꽃은 잎을 볼 수 없어 서로 짝사랑으로만 그리는 사이라 상사화라 했다던가. 치렁하던 잎이 말라가는 것은 꽃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고, 싹 나기 바쁘게 솟구친 꽃대에 서둘러 꽃을 피우는 것은 잎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란 말인가..

청우헌수필 2026.08.31

해어지다 헤어지다

해어지다 헤어지다 여름밤 잠자리가 좀 시원 하라고 삼베 침대보를 내어 침대에 깔았다. 아내가 베를 뜨다가 침대 너비에 맞게 잘라 가장자리를 박음질하여 만든 것이다. 몇 해를 여름만 되면 깔고 자면서 뒤척이고 비비대고 하다 보니 가운데 자리가 떨어져 해어졌다. 색깔 맞는 실을 골라 꿰매어 보기도 하지만, 낡기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웃 자리가 또 해어진다. 아내가 있다면 어떻게 손보아 해어지지 않게 깁거나 다시 천을 뜨다가 새로 마련해 주겠지만, 그렇게 해줄 아내와 떨어져 헤어졌다. 다시 못 돌아올 세상으로 가버렸다. 어떤 물건이라도 오랜 시간을 두고 많이 쓰다 보면 낡고 해어지지 않는 게 있을까만, 사람 살이도 그러하지 않으랴. 누구라도 만나서 오래 함께 지내다 보면 마음과 몸이 해어질 수도 ..

청우헌수필 2026.08.17

내가 일기를 쓰는 까닭

내가 일기를 쓰는 까닭 아침에 일어나면 물 마시고 체조하고 변 보고 세수하고, 무엇이든 잠시 글줄을 읽다가 컴퓨터를 연다. 일기장을 불러 ‘몇 시에 누워 무얼 하다가 언제 눈을 감았다.’로 시작하여 소변은 언제 언제 보고, 그렇게 깨고 자고 하는 사이에 무슨 꿈결이 흘러가고, 몇 시에 일어났다며 밤을 정리한다. 그 속에 변비로 어려움을 겪는 배변 정황도 그려 둔다. 이어서 홀로 사는 생활을 도와주는 분이 와서 정성으로 차린 아침 밥상을 함께 마주하는 정경을 적는다. 식후 운동을 겸한 산책으로부터 계속 이어지는 일과를 한 시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빠뜨리지 않기를 애쓴다. 가치의 유무는 내 관심 밖이다. 그러다 보니 내 일기장은 매일 같은 말이며 일이 되풀이되기도 한다. 온종일 일기장과 함께 지낸다..

청우헌수필 2026.07.19

댑싸리 전설(6)

댑싸리 전설(6) 고샅 양쪽 길섶 댑싸리 자리에 잡풀이 잔뜩 솟았다. 뿌리가 깊어 잘 뽑히지도 않는 바랭이가 대부분이다. 풀에 묻혀 댑싸리가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 같다. 더 두고 볼 수 없어 호미로 땅을 찍으며 풀을 뽑아나갔다. 댑싸리가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냈다. 한창 뽑고 있는데 고샅 끝 동네 길로 누가 지나가고 있는 기척이 들린다. 허리도 펼 겸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왔다. 허리 운동을 하며 마당을 한참 서성이다가 다시 고샅으로 나가 계속 뽑았다. 댑싸리에 난 풀 뽑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내 차린 모습이 문제가 아니라, 지나가다가 보고 나한테 말을 걸어올까 봐서다. 거기 풀은 왜 뽑느냐, 곡식도 아닌 댑싸리를 뭐 하려고 그리 힘들여 가꾸느냐며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댑싸리를 ..

청우헌수필 2026.07.08

친구를 만나러 간다

친구를 만나러 간다 난병을 앓고 있다. 아직 별 큰 증상은 없지만, 그냥 두면 어느 땐가는 회복 불가능한 치명 상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치료를 받아나갔다. 병소를 확인하는 몇 단계 진료를 거쳐 약물과 주사 치료를 시작했고, 양성자 치료 일정까지 잡아 놓고 있다. 양성자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병소 부위와 인근 장기를 떼어놓아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물질 주입술 치료를 하고, 병소 조직에 정확하게 양성자를 전달하기 위한 모의치료 과정을 거쳐야 한단다. 그러고 난 한 달 뒤 본 치료에 들어가야 한다 했다. 쉽지 않을 그런 치료를 받아나가자면 치료 과정마다 후유증도 있을 것이고, 복용해야 할 약도 많을 것이어서 움직임에도 적잖은 제약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치료 후에도 경과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

청우헌수필 2026.07.02

들꽃은 들꽃대로

들꽃은 들꽃대로 강둑길을 걷는다. 날마다 걷는 나의 산책길이다. 강둑길을 걸으면 맑게 흐르는 강물을 보는 것도 즐겁지만, 길섶에 피어나는 온갖 풀이며 꽃들을 보는 재미도 내가 강둑을 즐겨 걷는 큰 까닭이다. 물은 물대로 풀꽃은 풀꽃대로 모두 길동무다. 철마다 다 다른 풀이며 꽃이 피고 지고 하지만, 오늘 강둑길에는 금계국 노란 꽃잎이 하늘거리고, 갈퀴덩굴 환삼덩굴이 우거지고, 쑥대며 큰김의털, 소루쟁이가 머리를 흔들고, 개망초가 큰 키 위에 노란 꽃술 하얀 꽃잎을 앙증하게 피워 내고 있다. 길섶 강 쪽 가장자리 온갖 풀들이 자욱한 가운데 보일 듯 말 듯 언뜻 보이는 저 붉은 것은 무엇인가. 풀숲에 가려 있어 지나칠 뻔했다. 풀을 헤치고 들어가 보니 마치 접시꽃 모양 붉은 잎을 어여쁘게 펼치고 있다..

청우헌수필 2026.06.07

댑싸리 전설(5)

댑싸리 전설(5) 이웃 밭에 난 댑싸리 싹을 괭이로 긁어 매주었다. 콩밭 고랑에 댑싸리가 듬성듬성 났다. 고샅에 서 있던 댑싸리에서 날아간 씨가 퍼뜨린 것이다. 밭 옆에 작물도 아닌 것이 나서 씨를 퍼드리는 것이 성가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웃은 말이 없다. 고샅의 댑싸리를 떠나보낼 수 없는 내 속내를 모르지는 않는다. 아내가 댑싸리를 기르려 했던 자리기 때문이다. 아내가 만든 밭의 한 부분을 떼어 이웃에 부치라 하고, 아내는 밭과 담장 사이에 나 있는 고샅에 댑싸리 씨를 뿌렸다. 그 씨에서 싹이 새파랗게 돋아날 무렵 아내는 댑싸리도, 밭도 볼 수 없는 곳으로 멀리 가버렸다. 병 자리에서 댑싸리가 좀 자라거든 고샅 양쪽에 한 줄로 심어 달라 하고는, 그렇게 심어진 댑싸리를 아내는 볼 수 없었다...

청우헌수필 2026.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