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424

이 상처를 어찌할까

이 상처를 어찌할까 살다 보면 몸과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이 적지 않다. 사는 일이란 상처의 극복 과정이라 할까. 그 상처를 잘 극복하지 못하면, 삶이 어렵거나 심지어는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다. 요즈음 나는, 남이 알면 비소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되는 일로 칼끝이 찔러오는 듯한 아픔을 겪고 있다.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이 마을에 발을 내리고 산 지도 어언 십수 년이 지나가고 있다. 내가 마을에서 아름답게 여기는 정경 중 하나가 마을 숲 가장자리 한 곳에 다소곳이 피고 있는 상사화 꽃밭이다. 누가 오래전 몇 포기 심은 것이 점점 벌어 칠팔 월 한여름쯤에는 화사한 홍자 빛 꽃밭을 이룬다. 상사화는 여러해살이 알뿌리 화초로 이른 봄에 움이 터 5, 6월까지 난초 같은 치렁..

청우헌수필 2025.08.13

나를 보고 자꾸 떠나라 한다

나를 보고 자꾸 떠나라 한다 사람 속에서 사람과 더불어 부대끼며 살아오던 생의 한 막을 거둔 지 어느새 십수 년 세월이 흘렀다. 번잡한 도회를 떠나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어울리며 살리라 하고, 산 좋고 물 좋다는 이 한촌을 찾아와 지금까지 그 세월을 살고 있다. 앞으로는 강이 맑게 흐르고 있고, 뒤로는 산이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어. 아침이면 강둑길을 걷고 저물녘에는 산을 올랐다. 강둑 풀숲길을 걸으면서 강물 맑게 흐르고 온갖 야생초들 하늘거리는 풍치를 보는 것도 유유했고, 철마다 빛깔과 모습을 달리하는 숲속 산길을 오르내리며 걷는 것도 더없이 자적했다. 살 만하다 싶었다. 내 생애에 언제 이런 별천지가 있었던가. 몇 철을 그 별천지 속을 거닐었을까. 어느 날 커다란 굴착기가 강둑을 마구 파헤쳐..

청우헌수필 2025.07.30

박탈당한 그리움

박탈당한 그리움 오늘도 마을 공원 숲속으로 든다. 산책길에 늘 거쳐 가는 곳이다. 소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회나무 노거수가 우거진 숲속 한가운데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당이 있고, 그 옆에는 상사화가 모여 꽃을 피우는 곳이 있다. 아주 오래전 마을 어느 부인네가 어디에서 몇 뿌리 가져와 옮겨 심은 것이라 한다. 그 꽃이 간직하고 있는 사연을 알고서 심은 것일까. 상사화는 알뿌리에서 순이 돋고 잎이 난다. 잎은 비늘줄기에 나 긴 타원형으로 치렁하게 자라다가 오뉴월 무렵부터는 조금씩 말라 든다. 칠월이 되면 완전히 마르고 삭아서 땅속으로 스며들 듯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꽃대가 솟는다. 꽃대는 솟으면서 끝자락에 꽃을 품다가 마침내 몇 갈래로 홍자색 꽃을 아리따이 피워낸다. 꽃 진 꽃대 끝에 ..

청우헌수필 2025.07.16

그윽한 고독 속으로

그윽한 고독 속으로 사전에 나오지 않는 말이지만, ‘고독력’이란 말이 쓰이고 있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이야기하는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노년층 삶에 필요한 능력 중의 하나로 ‘고독력’을 말했다. ‘고독력’이란 ‘혼자서도 문제없이 잘 사는 능력’이라 했다. ‘고독’이란 말을 두고 사전을 펼쳐 보면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으로 풀이하고 있다. 적확한 풀이는 아닌 것 같다. 고독은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한 게 아니라 세상과 떨어져 있고 싶은 마음이다. 고독에는 자발적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고독은 외롭고 쓸쓸한 것도 아니다. 외로움은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괴로운 심리 상태다. 고독 속에도 쓸쓸함은 있지만, 견디기 어려..

청우헌수필 2025.06.30

혼자서도 잘 사는 법

혼자서도 잘 사는 법 마을 들머리 숲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며 참나무 회나무 느티나무 들이 우거져 있고, 그 한가운데쯤에 정월 대보름 새벽이면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당이 있고 그 옆에 상사화밭이 있다. 해마다 유월, 구월이면 마을 사람들 모두 나와 풀베기를 하지만, 풀은 또 어느새 우거진다. 상사화는 모든 것이 아직 얼어 있는 이월 말이면 움트기 시작하여 곧 촉을 내민다. 봄이 오는가 싶으면 난초 같은 긴 잎들을 돋워낸다. 봄 지나 오뉴월에 이르기까지 무럭무럭 자란다. 상사화만 자라는 게 아니다. 주변의 풀들도 상사화보다 더 크게 솟는다. 풀이 상사화가 잠길 만큼 짙어진다. 상사화 잎은 짙어지다가 유월 중순부터는 마르기 시작한다. 칠월 넘어서면 마른 잎은 땅에 붙어버리고 꽃대가 솟아 8월에 이르면 홍자..

청우헌수필 2025.06.08

즐거운 병원 길(2)

즐거운 병원 길(2)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계절이 바뀌어 간다는 것은 삶이 흘러간다는 말이다. 계절들은 저마다 다른 나의 삶을 안고 있었다. 지난봄은 나에게 아쉬움을 남겨놓고 흘러갔다. 그런가 하면 소망과 기쁨도 남겨놓았다. 무엇이 잘못된 탓인지 해를 바꾸어 가며 요통을 계속 앓고 있다. 지난해 벽두부터 일기 시작한 통증이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 같은 계절이 돌아와도 잦아들지 않는다. 큰 병원 작은 병원을 가리지 않고 치료에 유용할 만한 곳을 찾아다녔지만,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해가 바뀌어 봄이 왔다. 내 처지와는 상관없이 봄은 제 할 노릇을 잘해나갔다. 마른 나무에 움을 틔우기 시작하고, 검은 땅이 조금씩 푸른 빛을 띠어갔다. 이맘때쯤이면 늘 오르던 집 뒷산에는 생강나무며 올괴불나무도 눈을 ..

청우헌수필 2025.05.25

육신과 정신

육신과 정신 큰일 났다. 강의실에서 나와 차를 몇 번 갈아 타고 집에 이르러 하루를 정리하려고 보니, 유에스비(USB)가 없다. 가방이며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디에서 흘려 버린 걸까. 예사 큰일이 아니다. 그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자료를 어찌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내 정신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 그게 뭐길래 나를 이리 무력하게 만드는가. 강의실에서 컴퓨터에 꽂아서 쓰면서 강의를 마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온 길을 되짚어 봐도 길에서 흘린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컴퓨터에 꽂아 쓰고는 그냥 두고 온 게 분명하다. 그렇게 여기면서도 마음은 몹시 불안했다. 내 짐작이 틀릴 수도 있고. 누가 보고 가만두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몸에 진땀이 나면서 경련이 이는 것..

청우헌수필 2025.05.18

댑싸리 전설(3)

댑싸리 전설(3) 댑싸리가 이제 새로운 생애를 시작한다. 지난가을 붉게 타오른 뒤 겨울 들면서 씨를 담뿍 떨어트려 놓고는 그대로 말라 갔다. 한생을 다해가는 모습이다. 마른 채로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다가 봄을 맞았다. 새로운 생명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 생애의 자리를 비켜나게 해야 한다. 아내가 씨 뿌려 나게 한 그 생명체들을 다시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른 것들을 들어내었다. 그 자리에는 씨앗들이 소복이 내려앉아 있었다. 씨앗들이 앉은 자리를 다치지 않게 천천히 힘주어 살며시 들어냈다. 봄이 익어갔다. 강둑의 왕벚나무며 뒷산의 산벚나무가 피고 지고 할 무렵 제 전생이 비켜난 그 자리에 새로운 생명들이 꼬물꼬물 솟아났다. 아내가 뿌렸던 그 씨앗, 그 생명..

청우헌수필 2025.05.11

즐거운 병원 길

즐거운 병원 길 세 곳째 병원을 다니고 있다. 병원이든 의원이든 날 치료하는 곳은 나에겐 다 병원이다. 견디기 쉽지 않은 요통을 얻게 되었다. 시시로 통증이 올 때는 참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의욕마저 사라지는 것 같다. 허리가 편치 않으니, 앉고 서고 걷는 일이며, 무얼 들고 내리는 일이며, 몸 굽혀 땅이라도 파고 묻고 해야 할 일 같은 것들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다. 노화 현상 중의 하나라 하지만, 어쩌랴. 사는 날까지는 불편을 없이 하거나 줄여서 살기라도 해야 할 게 아닌가. 척추센터가 따로 있는 큰 병원이며, 재활 치료를 잘한다는 정형외과에 해를 넘겨 가며 다녔지만, 별 효험을 보지 못했다. 통증을 겪고 있던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는데 문득 어느 빌딩에 붙은 ‘통증 치료’라는 광..

청우헌수필 2025.04.23

먼 진달래

먼 진달래   꽃 피고 잎 돋는 봄은 왔다. 그렇지만 내 몸은 아직도 봄을 저만치 밀쳐 내두고 있다. 한 해여 전부터 높은 곳, 비탈진 곳은 걷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를 받은 터였다. 해거름이면 늘 오르던 산을 못 오르게 된 게 아쉽긴 했지만, 다시 힘찬 걸음으로 오를 날을 위하여 의사의 말을 따라 편한 길로만 걷고 있다.  잠시 혼절하여 쓰러지면서 벽에 부딪혀 척추에 골절이 난 것은 의사의 시술로 치료가 되었지만, 그 후로도 허리는 계속 저리고 아팠다. 시술의 후유증으로 알고 약을 먹으면서 낫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다시 검사를 해보니 그사이에 척주관 협착증이 왔단다.  사는 일, 행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넓게 가지지 못해 허리도 협착해진 건가. 무릎도 말을 잘 안 들을 때가 있다..

청우헌수필 2025.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