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20

내가 남겨 놓은 것들

내가 남겨 놓은 것들 어느 날 아침, 날이 밝아와 눈을 떠보니 내가 죽었다. 날마다 해거름이면 아늑히 오르는 산을 올라 숲을 걷고 나무를 보며 상념에 젖다가 내려왔다. 몸을 씻고 이따금 즐겨 마시는 막걸리 한잔하고 잠이 들었다. 그 길로 길고 깊은 잠이 든 것 같다. 다양한 사회 경륜과 함께 장관도 지내고 테니스를 좋아했던 어떤 분은 어느 날 오전에 한 게임 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한 다음 와인 한잔하고 잠들었다가 그대로 영면했다 한다. 향년 88세였다 한다. 조용헌 명리학자는 그 죽음을 두고 거의 ‘신선급’ 죽음이라 했다. 나는 이렇다 할 경륜도 없고, 그분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딴은 산전수전 겪다가 물러나 산수 좋은 곳을 찾아와 살면서 이리 가니,..

청우헌수필 2023.01.28

나무는 말이 없다

나무는 말이 없다 겨울 산을 오른다. 입고 있던 것을 다 벗어버린 나무들 사이로 찬 바람이 지난다. 상수리나무든, 떡갈나무든, 물푸레나무든 모두 맨모습으로 빨갛게 섰다. 하늘 향해 맨살을 드러내놓고 있어도 나무는 떨지 않는다. 얼지도 않고 이울지도 않는다. 산이 있기 때문이다. 산의 무엇을 믿는가. 산은 오직 뿌리를 내리게 해줄 뿐이다. 잎이 나면 나는 대로 미소지어 주고, 꽃이 피면 피는 대로 이뻐해 줄 뿐이다. 잎이 언제 돋으라 한 적도 없고, 꽃을 어떻게 피우라 한 적도 없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그뿐 아니다. 그 꽃과 잎의 빛깔이 바래고 말라 떨어져도 애타 하지 않는다. 그 떨어진 꽃이며 잎을 마냥 감싸 안아 줄 뿐이다. 그 꽃과 잎들이 품을 파고들면 조용히 품어 때가 되면 소곳이 세..

청우헌수필 2020.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