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배 319

해어지다 헤어지다

해어지다 헤어지다 여름밤 잠자리가 좀 시원 하라고 삼베 침대보를 내어 침대에 깔았다. 아내가 베를 뜨다가 침대 너비에 맞게 잘라 가장자리를 박음질하여 만든 것이다. 몇 해를 여름만 되면 깔고 자면서 뒤척이고 비비대고 하다 보니 가운데 자리가 떨어져 해어졌다. 색깔 맞는 실을 골라 꿰매어 보기도 하지만, 낡기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웃 자리가 또 해어진다. 아내가 있다면 어떻게 손보아 해어지지 않게 깁거나 다시 천을 뜨다가 새로 마련해 주겠지만, 그렇게 해줄 아내와 떨어져 헤어졌다. 다시 못 돌아올 세상으로 가버렸다. 어떤 물건이라도 오랜 시간을 두고 많이 쓰다 보면 낡고 해어지지 않는 게 있을까만, 사람 살이도 그러하지 않으랴. 누구라도 만나서 오래 함께 지내다 보면 마음과 몸이 해어질 수도 ..

청우헌수필 2026.08.17

난병 일기(9) -성공의 조건

난병 일기(9)-성공의 조건 오늘 치료는 성공했다. 관장 상태도 적절하고 내장된 소변량도 적정하여 치료가 잘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양성자가 목표 위치에 잘 도달하여 제 에너지를 병소에 집중적으로 발산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무슨 어려운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듯한 안도감이 몸을 녹게 했다. 어제는 실패했었다. 첫 번째 양성자 치료를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해주는 자세대로 꼼짝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다가 잠깐 떠보니 원통형 방의 천장이 두 갈래가 져 서로 엇바뀌며 돌고 있고, 내려다보는 기계는 나를 덮을 듯 내려오다 올라가고 했다. 첫 치료 때 소음으로 들렸던 소리들은 천장이 움직이는 소리였던 것 같다. 다시 눈을 감고 치료가 잘되고 있는 상상에 젖었다. 소리가 멎더니 일어나라 했다. 관장이 ..

청우헌일기 2026.08.16

난병 일기(6)-고진감래

난병 일기(6)-고진감래 대처 병원까지 가기에는 차비 부담이 녹록지 않지만,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관장하고, 금식 상태로 정해준 시각까지 병원에 도착하자면 다른 수단으로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타의보다는 자의를 더 많이 얻을 수 있는 대가라 할까. 병원이 원하는 시각에 도착했다. 딸과 손녀가 바라지 마중을 나왔다. 오늘의 주 치료인 생분해성 물질 주입술 시술을 위해 항생제와 진통제 주사를 먼저 맞으라 했다. 넘치는 환자들 속에서. 차분하게 차례를 기다렸다. 살아가면서 기다려야 하는 일이 어디 이뿐일까. 치료는 치료로 이어진다. 오늘 치료는 다음 치료들로 나아갈 전 단계다. 다음의 모의 치료를 거쳐서 본격적인 방사선 양성자 치료로 들어간다 했다. 내가 기다려야 하는 것은 오늘만..

청우헌일기 2026.07.24

댑싸리 전설(6)

댑싸리 전설(6) 고샅 양쪽 길섶 댑싸리 자리에 잡풀이 잔뜩 솟았다. 뿌리가 깊어 잘 뽑히지도 않는 바랭이가 대부분이다. 풀에 묻혀 댑싸리가 숨을 헐떡이고 있는 것 같다. 더 두고 볼 수 없어 호미로 땅을 찍으며 풀을 뽑아나갔다. 댑싸리가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냈다. 한창 뽑고 있는데 고샅 끝 동네 길로 누가 지나가고 있는 기척이 들린다. 허리도 펼 겸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왔다. 허리 운동을 하며 마당을 한참 서성이다가 다시 고샅으로 나가 계속 뽑았다. 댑싸리에 난 풀 뽑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내 차린 모습이 문제가 아니라, 지나가다가 보고 나한테 말을 걸어올까 봐서다. 거기 풀은 왜 뽑느냐, 곡식도 아닌 댑싸리를 뭐 하려고 그리 힘들여 가꾸느냐며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댑싸리를 ..

청우헌수필 2026.07.08

친구를 만나러 간다

친구를 만나러 간다 난병을 앓고 있다. 아직 별 큰 증상은 없지만, 그냥 두면 어느 땐가는 회복 불가능한 치명 상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치료를 받아나갔다. 병소를 확인하는 몇 단계 진료를 거쳐 약물과 주사 치료를 시작했고, 양성자 치료 일정까지 잡아 놓고 있다. 양성자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병소 부위와 인근 장기를 떼어놓아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물질 주입술 치료를 하고, 병소 조직에 정확하게 양성자를 전달하기 위한 모의치료 과정을 거쳐야 한단다. 그러고 난 한 달 뒤 본 치료에 들어가야 한다 했다. 쉽지 않을 그런 치료를 받아나가자면 치료 과정마다 후유증도 있을 것이고, 복용해야 할 약도 많을 것이어서 움직임에도 적잖은 제약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치료 후에도 경과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

청우헌수필 2026.07.02

난병 일기(5)-왜 내 몸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걸까.

난병 일기(5)-왜 내 몸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걸까. 병원 양성자치료센터를 찾아갔다. 의사가 내 병에는 수술, 약물치료. 방사선 치료가 있다고 하면서 수술은 권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주사와 투약 치료는 이미 시작했고, 방사선 치료에 관해 상담하고 예약하기 위해서다. 치료센터는 병원 본관과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런 치료 기관은 전국에서도 몇 곳 안 된다 했다. 차례를 기다려 아들과 함께 의사 옆에 앉았다. 의사는 화면에 뜬 자료를 보면서 말했다. “전이 된 곳은 없어서 국소 치료만 하면 될 것 같군요. 지난번 주사가 효력을 발휘할 때를 기다렸다가 격일로 다섯 번 정도 치료해 봅시다.” 지난번 내가 맞은 것은 병소 세포의 먹이 공급을 차단해서 굶겨 죽이거나 자라지 못하게 하는 주사..

청우헌일기 2026.06.27

댑싸리 전설(5)

댑싸리 전설(5) 이웃 밭에 난 댑싸리 싹을 괭이로 긁어 매주었다. 콩밭 고랑에 댑싸리가 듬성듬성 났다. 고샅에 서 있던 댑싸리에서 날아간 씨가 퍼뜨린 것이다. 밭 옆에 작물도 아닌 것이 나서 씨를 퍼드리는 것이 성가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웃은 말이 없다. 고샅의 댑싸리를 떠나보낼 수 없는 내 속내를 모르지는 않는다. 아내가 댑싸리를 기르려 했던 자리기 때문이다. 아내가 만든 밭의 한 부분을 떼어 이웃에 부치라 하고, 아내는 밭과 담장 사이에 나 있는 고샅에 댑싸리 씨를 뿌렸다. 그 씨에서 싹이 새파랗게 돋아날 무렵 아내는 댑싸리도, 밭도 볼 수 없는 곳으로 멀리 가버렸다. 병 자리에서 댑싸리가 좀 자라거든 고샅 양쪽에 한 줄로 심어 달라 하고는, 그렇게 심어진 댑싸리를 아내는 볼 수 없었다...

청우헌수필 2026.05.20

그때가 오면

그때가 오면 해사하고도 화사하게 강둑을 수놓던 강둑의 왕벚꽃이며, 산을 무늬 짓던 산벚꽃이 다 지고, 꽃의 자리를 푸른 잎들이 차지하고 있다. 꽃이 피었을 때가 먼 옛적인 듯 아스라하다. 저 꽃 속에 있을 때는 나의 복지인 듯 아늑했는데, 푸른 잎들은 나를 내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달력이 봄을 알려 와도 벚꽃이 피기 전에는 나의 봄은 아니었다. 강둑을 걷는 아침마다 벚나무의 꽃눈을 보고 또 보았다. 아주 조금씩 눈을 떠가는 모습이 신기하고도 애가 타기도 했다. 달라져 가는 게 없다 싶을 때는 애가 탔지만, 하루 건너서 보면 조금은 눈을 틔운 것 같아 신기하고도 반가웠다. 올해만이랴, 해마다 그렇게 기다려 왔지만, 반갑게 기다리는 마음은 그제나 이제나 다르지 않았다. 그렇..

청우헌수필 2026.05.09

나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나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나이라는 생물학적 제약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다스리겠다는 강한 의지를 볼 수도 있고, ‘나는 여전히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라는 자기만의 삶의 속도를 중시하고자는 긍정적인 심리를 느낄 수도 있다. 한편으로,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나는 늙어가고 있다.’라는 자각과 함께 노화에 대한 저항 심리를 볼 수 있다. 또한 ‘아직 나는 건재하다.’라는 사실을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선언함으로써 자존감을 높이려는 심리적 전략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 높이는 그 목소리는 누구보다도 노화를 저리게 느끼고 있다는 반향이 아닐까. 나이는 죄가 없다. 나이는 나이이지..

청우헌수필 2026.03.19

고장에 대하여

고장에 대하여 세월은 나를 저물녘 황혼빛 속에서 홀로 고적을 안고 살아가게 만들어 놓았다.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병마를 불러들여 안겨 혼자서는 생존도 생활도 제대로 건사하기 힘들게도 했다. 세월은 그렇게 해찰을 부리지만, 세상은 그리 무정하지 않았다. 내 무슨 복덕을 지은 것도 없는데, 마치 설화 속 이야기처럼 어디서 고마운 분을 나에게로 보내주었다. 그분은 아침 한때 잠시 나를 보살펴 줄 뿐이지만, 생존의 고단을 풀어주고, 생활의 적막을 달래주기 위해 따뜻한 마음을 다해 주고 있다. 세월을 다시 돌아본다. 세월은 몸도 마음도, 그 몸과 마음을 의지하고 있는 주위의 모든 것도 이냥 그대로 두는 법이 없다. 모든 것을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도 하지만, 또 모든 것을 허물고 없애버리기도 한다. 그게 ..

청우헌수필 2026.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