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배 273

그냥 둘 걸

그냥 둘 걸   두렁길을 걷다 보니, 쇠뜨기 방동사니 깨풀 괭이밥 개갓냉이 돌나물 등 온갖 풀들이 자욱한 곳에 홀로 우뚝 서서 분홍색 꽃을 뿜어내듯이 피우고 있는 풀꽃 하나가 보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청춘의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끈끈이대나물’이라는 풀꽃이었다. 가늘게 뻗어 올린 꽃가지가 마주 난 잎을 사이에 두고 갈래가 지면서 다시 뻗어 올라 다섯 잎의 아기 새끼손가락 같은 꽃잎을 피워내고 있다.들꽃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분홍빛이 시리게 고와 눈에 얼른 들 뿐만 아니라, 키도 다른 풀보다 유달리 커 끌리지 않을 수 없다. 저 꽃이 어찌 저 자리에서 피어났을까. 다른 풀보다 높이 솟기도 했지만, 꽃 빛도 주위의 풀들을 압도하고 있다. 풀씨가 하늘을 날다가 자리를 잘못 짚고 떨어져 피어난 꽃인 ..

청우헌수필 2024.07.10

인간과 사람

인간과 사람   ‘인간’과 ‘사람’은 한뜻을 지닌 같은 말일까? 인간이 곧 사람이고, 사람이 곧 인간일까? 국어사전의 풀이대로라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사전에서 제일의로 풀이하는 말은 “인간 :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 =사람.”, “사람 :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 ≒인간”이라 하여 동의어로 새기고 있다.  철학적, 윤리적인 정의를 내리려는 게 아니다. 내 삶에 화두를 두고 그 뜻을 새겨보고 싶을 뿐이다. 어떻게 정의해도, 내가 생각하는 ‘인간’, ‘사람’의 개념일 뿐이다. 그 개념으로 사전의 그 풀이를 인용認容할지라도, 사람은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에 방점을 두고 ..

청우헌수필 2024.06.23

어머니 제삿날

어머니 제삿날   설날, 형님이 의논을 좀 하자며 어렵게 운을 뗀다. 나이 자꾸 더해가다 보니 기력들이 전 같지 않아 형수 혼잣손으로 제상을 차리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어머니 제사를 아버지 제사와 합치고, 설은 간소히 쇠고, 추석 차례는 성묘 겸해서 산소에서 모시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속이 아릿하게 저며오는 듯했지만, 다른 말을 하기 어려웠다. 형님 내외 모두 여든을 훨씬 넘어 구순을 바라보고 있는 데다가 일손도 마땅치 않은 처지고, 나도 멀리 떨어져 살아 도움이 되지 못할 지경이어서 묵묵히 들으면서 가는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제수를 진설한 제상 앞에서 강신례에 이어 헌작하며 형님은 나에게 글을 하나 읽으라며 주었다. 아들딸 잘 키워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에 이어 ‘세상의 변화에 어려움이 많아 제사..

청우헌수필 2024.06.09

풀은 강하다

풀은 강하다   골짜기로 든다. 길은 언덕 아래로 이어진다. 밭을 이고 있는 언덕배기는 무성한 풀밭이다. 밭에는 콩이며 고추며 감자며 옥수수며 여러 가지 농작물들이 자라고 있지만, 언덕배기에는 누가 가꾸지 않아도 절로 나는 갖가지 풀들이 살고 있다. 꽃 안 피는 풀은 없다. 언덕배기는 갖가지 꽃이 어우러진 화원인 셈이다. 봄까치꽃, 현호색, 꽃다지 냉이, 씀바귀, 애기똥풀, 개망초, 돌나물, 미나리냉이, 쇠별꽃, 별꽃, 괭이밥 …….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꽃들이 철철이 다투어 피고 진다.  고요와 평화가 있는 골짜기를 향해 걷는 재미도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하지만, 걸으면서 보는 언덕배기의 풀꽃들이 설렘으로 다가와 눈을 흠뻑 적시곤 한다. 그 꽃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다가 보면, 어떨 때는 골짜기로 드는 ..

청우헌수필 2024.05.26

지금 이 순간만을

지금 이 순간만을   어느 문학지에서 한 시인과 김소월 시인의 가상 인터뷰를 읽었다. 시인의 물음에 대한 답변 중에 소월 시인은 ‘우리는 대개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만 하다가 인생을 마치는 게 아닐까.’ 싶다며 ‘생과 사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 이 순간만을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소월이 살아온 생애를 돌아보면서 나올 만한 답변을 상상하며 건넨 질문의 답을 적어본 것이지만, 마치 내 삶을 두고 하는 이야기 같아 쉬 눈길을 뗄 수 없었다. 특히, ‘지금 이 순간만을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동공이 굳어졌다.  이 순간만을 산다? 그러고 보니 나는 과거와 미래에 너무 많이 매여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나이가 이슥해진 탓인지 떠오르는 지난 일들이 많다. 어린 시절,..

청우헌수필 2024.05.12

떠나보내기가 무엇이기에

떠나보내기가 무엇이기에   사람은 누구나 맞이하고 떠나보내기를 거듭하면서 삶을 엮어 나간다. 사람을 맞이했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떠나보내기도 하고, 물건을 맞이했다가 쓸모없거나 낡아서 떠나보내기도 하고, 시간들을 맞이했다가 때가 되면 떠나보내기도 한다.  때로는 맞이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맞이했다가 힘들게 떠나보내기도 하고, 맞고 싶지만 쉽게 와주지 않는 것을 공들여 맞이했다가 서운하게 떠나보내야 하는 것도 없지 않고, 우연으로 맞이했다가 필연을 남기고 떠나보내는 것도 있을 수 있다.  맞이했기에 떠나보내기도 해야 하겠지만, 떠나보낸 기억이 맞이한 기억보다 더 뚜렷이 새겨지기도 한다. 가깝고 먼 시간의 차이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맞이가 주는 놀라움이나 기쁨보다 떠나보내기가 주는 아쉬움과 비감이 더 깊..

청우헌수필 2024.04.25

아침 문 여는 소리

아침 문 여는 소리 아침마다 내 사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찾아와 주는 분이 있다. 오늘 아침에 또 정성 들인 반찬을 찬그릇에 정갈하게 담아왔다. ‘늘 이렇게 가져오시면 어떻게 하느냐?’ 하니. ‘제 마음이지요.’라 하며 상긋이 고개를 숙인다. 감당하기 쉽지 않은 병치레를 하고 있다. 두어 주일을 병원에 머물다 나왔지만, 곧 좋아질 증세가 아니었다. 병원을 나와서가 더 힘들었다. 도와줄 이가 없이 혼자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가, 비감 서린 마음과 함께 자칫 희망을 잃을 뻔했다. 병중인 몸을 돌봐 줄 이 없는 궁색한 삶을 굳이 살아내어야 하는 걸까. 몸이 아픈 것도 힘든 일이지만,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아픈 몸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아픔 아래에 깔린 고적이 삶에 대한 회의감마저 ..

청우헌수필 2024.04.08

의사의 경고를 어겼다

의사의 경고를 어겼다 의사의 경고를 어겼다. 의사가 오르지 말라는 산에 오르고 말았다. 어쩌다 척추에 금이 가는 변고를 당했다. 십여 일 입원하면서 갈라진 금을 붙이는 치료를 하고, 퇴원하고서도 계속 가료 중이다. 산은 평지보다 허리에 더 무리한 힘이 가해질 수 있고, 때에 따라 치명적인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기동할 만할 즈음부터는 잠시간씩 걷는 것도 회복에 도움 되는 일이라기에 순탄한 길을 잡아 조금씩 걸었다. 늘 다니던 강둑길로 나가서 맑게 흐르는 물을 보며 위안 삼기도 하고, 고요한 골짜기를 걸으며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바뀌어 겨울 가고 봄이 왔다. 시나브로 오는 봄과 함께 땅속에 묻혀 있던 상사화 둥근 뿌리가 잎 촉을 내밀기 시작하여 점점 자라 오르고, 두렁에는 하늘..

청우헌수필 2024.03.24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강둑을 내려와 골짜기로 든다. 강을 품고 있는 강둑을 내리면 산골짜기로 드는 길과 들판으로 가는 길이 갈린다. 들길을 따라 집으로 갈 것을, 요즈음은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들었다가 돌아 나와 들길을 지나 집으로 향한다. 여느 때는 아침엔 들판과 강물을 옆구리에 끼고 강둑을 거닐고, 저녁 무렵엔 고샅을 지나 산으로 오르곤 했다. 산을 오를 수가 없게 되었다. 무슨 병 탓인지 갑자기 쓰러지면서 등뼈에 금이 갔다. 어려운 시술 끝에 금을 붙이긴 했지만, 산에는 오르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아침저녁의 걸음을 합쳐 강둑을 거닐다가 골짜기로 든다. 언덕 중허리에서 정한 물이 나는 샘골을 지나 속삭이듯 흐르는 도랑물 소리를 들으며 깊숙한 걸음을 옮긴다. 한 발짝 한 발짝 골의 깊이를 더해..

청우헌수필 2024.03.03

내일이면 거뜬히

내일이면 거뜬히 “혼자 끓여 먹고 하느라고 뭘 옳게 먹었겠나.……” 형님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전화기를 적시며 흘렀다. 며칠 후에 형님 내외와 여동생 내외가 길을 접어 달려왔다. 영양가 있는 먹거리를 잔뜩 챙겨왔다. 내가 쓰러진 건 못 먹어 난 병이라며 홀로 사는 내 처지를 가슴 아파했다. “어쨌든지 잘 챙겨 먹고 빨리 나아야 해.” 십 년 맏이 형님이 근심 어린 눈빛으로 입가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았다. “오빠! 우리 집에도 한번 놀러 와야지.” 남매들의 걱정에 눈시울이 화끈거린다. 주위를 위해서라도 병을 잘 다스려야 할 것 같다. 갑자기 쓰러져 혼절에 이르러면서 몸 한 부분에 금까지 가게 되는 중병을 얻었다. 큰 도시 큰 병원에 몸을 눕히고, 빈사지경에 이른 몸에 난치 과정을 거쳐 두어 주일 만에 ..

청우헌수필 2024.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