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댑싸리 전설(7)

댑싸리 전설(7) 때가 되니 올해도 댑싸리가 발갛게 물이 들었다. 아내가 씨를 뿌린 후로 네 번째 드는 물이다. 아내는 이 붉게 물든 댑싸리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씨를 뿌리고 겨우 싹이 돋아날 때쯤 아이들 집으로 자리를 옮더니 그 길로 세상을 바꾸고 말았다. 돌아올 때쯤은 제법 복슬복슬한 모습이거나 붉은 물이 들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여겼을지 모르겠다. 댑싸리는 아내 손으로 씨가 뿌려지고 싹을 틔웠다. 아내의 소생이라 할까. 자라고 물들고 익어서 떨어진 씨가 다시 싹을 틔우고, 자라 복슬복슬해지고 선혈 빛 붉은 물을 들이기에 해를 거듭했다. 댑싸리는 저 혼자서만 부지런히 모습을 바꿀 뿐, 아내의 눈길을 한 번도 얻지 못했다. 싹을 트게만 해놓고는 다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

청우헌수필 2026.10.09

유홍초 사랑

유홍초 사랑 오늘도 강둑길을 걷는다. 어디 원행이라도 할 때면 이 강둑길을 걷고 싶어 한시라도 빨리 돌아오고 싶을 만큼 그리운 내 산책길이다. 운동 삼아 즐겨 걷기도 하지만, 흐르는 물이며 그 물에 유유한 구름을 보며 걷는 운치도 상쾌하고, 길섶에서 피고 지는 들꽃과 만나는 정취도 그윽하기 그지없다. 철을 바꾸어 가며 피는 들꽃들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보는 이의 마음속을 은근히 파고든다. 그 꽃들을 혼자서만 보기가 아까워 영상으로 담아, 생각나는 이에게 보내며 꽃말에 실어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근래에는 한련초, 비단풀, 유홍초, 쑥부쟁이, 벌개미취, 물봉선 들을 보내주었는데, 모두 정감 어린 꽃말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 그를 만났을 때 들고 있는 핸드폰을 언뜻 보노라니, 둥근잎유홍초가 ..

청우헌수필 2026.10.01

난병 일기(11)-0.19입니다

난병 일기(11)-0.19입니다 양성자 치료를 마친 이후 처음으로 나서는 병원 길이다. 시험을 치러 가는 기분이라 할까, 합격자 발표를 보러 가는 마음이라 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조금은 불안하기도 한 마음으로 차를 타고 내려서 또 타고 병원에 이르렀다. 의사를 만나기 전에 채혈 검사가 먼저 예약되어 있었다. 해당 의학과에서 필요한 항목만 표출되면 되기 때문에 금식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채혈실로 가서 키오스크에서 접수표를 뽑아 차례를 기다렸다. 채혈 대기자가 많았다. 병원에 웬 사람들이 그리 많은가. 병원 복도가 피켓만 안 들었다뿐이지 군중들이 대오를 지어 무슨 시위를 하는 곳인 것 같기도 하고, 우리나라엔 모두 이 병원 이 병동에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만 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청우헌일기 2026.09.17

강둑의 상사화 그리고 그리움

강둑의 상사화 그리고 그리움 강둑에 웬 상사화 꽃대가 솟아오르더니 꽃대 끝에 분홍 꽃 두어 송이를 피워냈다. 꽃대 주위에는 가로수로 서 있는 벚나무에서 떨어지거나 베어낸 마른 가지가 널브러져 있고, 주변에는 뻗어 나가고 있는 칡넝쿨과 함께 온갖 풀들이 무리 지어 나고 있다. 저 꽃은 어디서 왔을까. 상사화는 뿌리 번식을 하는 꽃이다. 열매를 맺기는 하지만 여물지는 못해 씨앗 노릇은 할 수 없다. 종족을 퍼뜨리자면 오직 뿌리가 갈라져서 꽃을 피우게 할 수밖에 없는데, 뿌리가 어디서 날아와 꽃을 피울 수는 없는 일이다. 꽃대가 나고 꽃을 피우자면 무슨 힘이든 다른 힘에 의지해서 뿌리가 옮겨져 오는 수밖에 없는데 이 강둑에 무엇이, 누가 옮겨 놓았단 말인가. 모든 일은 인연에 의해 일어난다는 불가佛家의..

청우헌수필 2026.09.13

집착에 대하여 -상사화를 보며

집착에 대하여-상사화를 보며 올해 상사화도 잎이 말라갈 겨를도 없이 무참히 잘리고 말았다. 마을 숲 풀베기하는 이들에겐 상사화 잎도 베어내야 할 한갓 잡풀에 지나지 않았다. 잎이 말라 가는 것도 상사화의 한살이치레다. 초봄에 틔운 움으로 봄내 잎을 피워내다가 봄이 무르익을 무렵부터 말라간다. 다 마른 잎은 여름이 한창일 때 제 난 자리로 스며들 듯 잦아진다. 여름이 고비 넘을 무렵 잎 잦아진 자리에 새로 난 싹이 꽃대로 솟아 그 끝에 홍자색 봉오리 분홍 꽃을 피워낸다. 잎은 꽃을, 꽃은 잎을 볼 수 없어 서로 짝사랑으로만 그리는 사이라 상사화라 했다던가. 치렁하던 잎이 말라가는 것은 꽃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고, 싹 나기 바쁘게 솟구친 꽃대에 서둘러 꽃을 피우는 것은 잎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란 말인가..

청우헌수필 2026.08.31

난병 일기(10)-잘 껴안고 있다 보면

난병 일기(10)-잘 껴안고 있다 보면 양성자 치료도 고비를 넘겨 막바지로 가고 있다. 치료 한 시간여 전쯤에 치료 대기실에 여유 있게 도착했다. 늘 하는 대로 소변을 보고 물 300cc를 마셨다. 1시간 뒤 치료할 때 필요한 적정 소변량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간호사의 호명을 기다렸다. 드디어 간호사가 이름을 부르며 데리러 왔다. 외부인은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양성자 치료실로 들어가며 간호사가 관장은 잘하셨느냐고 물었다.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표정이 아주 밝아 보이시네요.” 관장이 잘 이루어져 보인다는 말일 것이다. 관장이 그런대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나의 지극한 보호자 노릇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며, 쾌유를 간곡히 빌어주는 사람들 생각이며, 그 응원의 힘으로 치료를 잘 ..

청우헌일기 2026.08.22

해어지다 헤어지다

해어지다 헤어지다 여름밤 잠자리가 좀 시원 하라고 삼베 침대보를 내어 침대에 깔았다. 아내가 베를 뜨다가 침대 너비에 맞게 잘라 가장자리를 박음질하여 만든 것이다. 몇 해를 여름만 되면 깔고 자면서 뒤척이고 비비대고 하다 보니 가운데 자리가 떨어져 해어졌다. 색깔 맞는 실을 골라 꿰매어 보기도 하지만, 낡기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이웃 자리가 또 해어진다. 아내가 있다면 어떻게 손보아 해어지지 않게 깁거나 다시 천을 뜨다가 새로 마련해 주겠지만, 그렇게 해줄 아내와 떨어져 헤어졌다. 다시 못 돌아올 세상으로 가버렸다. 어떤 물건이라도 오랜 시간을 두고 많이 쓰다 보면 낡고 해어지지 않는 게 있을까만, 사람 살이도 그러하지 않으랴. 누구라도 만나서 오래 함께 지내다 보면 마음과 몸이 해어질 수도 ..

청우헌수필 2026.08.17

난병 일기(9) -성공의 조건

난병 일기(9)-성공의 조건 오늘 치료는 성공했다. 관장 상태도 적절하고 내장된 소변량도 적정하여 치료가 잘 될 수 있었다고 했다. 양성자가 목표 위치에 잘 도달하여 제 에너지를 병소에 집중적으로 발산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무슨 어려운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듯한 안도감이 몸을 녹게 했다. 어제는 실패했었다. 첫 번째 양성자 치료를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해주는 자세대로 꼼짝 누워 있었다. 눈을 감고 있다가 잠깐 떠보니 원통형 방의 천장이 두 갈래가 져 서로 엇바뀌며 돌고 있고, 내려다보는 기계는 나를 덮을 듯 내려오다 올라가고 했다. 첫 치료 때 소음으로 들렸던 소리들은 천장이 움직이는 소리였던 것 같다. 다시 눈을 감고 치료가 잘되고 있는 상상에 젖었다. 소리가 멎더니 일어나라 했다. 관장이 ..

청우헌일기 2026.08.16

난병 일기(8)-신경 쓰지 마세요

난병 일기(8)-신경 쓰지 마세요 커다란 원통형의 방문 없는 방이었다. 돌아눕지도 못할 좁다란 치료대가 놓여 있고 천장에서 여러 개의 무슨 렌즈 같은 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옆에는 네모난 검은색 계기판 같은 게 높다랗게 달려 치료대를 향하고 있었다. 남녀 치료사 두 사람이 나를 부축하여 세 개의 계단을 밟고 치료대에 오르게 했다. 앉으면서 신발을 벗고 머리를 안쪽으로 두고 누우라 했다. 무릎 부분을 돋우는 보조대를 받쳐 주면서 발과 다리 고정판을 갖다 대고 끼워주며 치료가 끝날 때까지 꼼짝하지 말라 했다. 속옷도 없는 환자복을 아예 벗겨내고 타올로 몸을 덮었다. 환부 거죽에 무슨 물질을 바르며 소변량을 측정한다 했다. 몸 여러 부위를 살피는 듯하더니 준비 과정이 다 끝난 듯 이제 시작하겠다 했다...

청우헌일기 2026.08.10

난병 일기(7) -모든 일에는 절차와 순서가

난병 일기(7)-모든 일에는 절차와 순서가 옷을 벗고 큰 타올로 몸을 가리고 CT실 촬영대에 누웠다. 방사선 치료를 위한 모의 치료 과정이라 했다. 촬영 기사가 방광 주변에 무얼 바르고 한참 살피더니 일어나라 했다. 소변이 너무 많이 차 있다며 안쪽에 눈금이 새겨진 종이컵을 쥐여주었다. 눈금 어디까지 소변 보고는 변기에 쏟고 오라 했다. 옷을 걸치고 화장실로 가서 그렇게 하고 와 다시 누웠다. 눈을 감았다. 움직이지 말라 하고는 몸을 기계 속으로 밀어 넣는 것 같았다. 다시 일어나라 했다. 관장이 덜 되어 있어서 약 처방해 놓았다며, 약을 받아 20분 동안 관장하고 다시 오라 했다. 대기실로 나오니 나를 바라지하는 딸이 벌써 알고 병원 약국에 가서 관장약을 받아 왔다. 화장실로 가서 투약하고 나와 ..

청우헌일기 2026.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