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내일이면 거뜬히

이청산 2024. 2. 9. 13:46

내일이면 거뜬히

 

  “혼자 끓여 먹고 하느라고 뭘 옳게 먹었겠나.……” 형님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전화기를 적시며 흘렀다. 며칠 후에 형님 내외와 여동생 내외가 길을 접어 달려왔다. 영양가 있는 먹거리를 잔뜩 챙겨왔다. 내가 쓰러진 건 못 먹어 난 병이라며 홀로 사는 내 처지를 가슴 아파했다.

  “어쨌든지 잘 챙겨 먹고 빨리 나아야 해.” 십 년 맏이 형님이 근심 어린 눈빛으로 입가엔 미소를 지으며 손을 잡았다. “오빠! 우리 집에도 한번 놀러 와야지.” 남매들의 걱정에 눈시울이 화끈거린다. 주위를 위해서라도 병을 잘 다스려야 할 것 같다. 

  갑자기 쓰러져 혼절에 이르러면서 몸 한 부분에 금까지 가게 되는 중병을 얻었다. 큰 도시 큰 병원에 몸을 눕히고, 빈사지경에 이른 몸에 난치 과정을 거쳐 두어 주일 만에 병원을 나왔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하는 치병, 구병의 시작이었다.

  홀로 조섭해야 하는 처지가 고려되어 건강 관리기관에서 사람을 보내주었다. 그 요양 덕분으로 치병은 잘 이루어져 갔지만, 하루 이틀에 좋아질 일은 아니었다. 구병이 이어지는 동안 나만 아픈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하고 있었다.

  지역의 선배 어르신들이 평소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들고 달려왔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어깨를 쓰다듬었다. 어르신들의 문병을 받는 게 도리가 아니라며 겸연쩍어하자, ‘그러면 아프지 말아야지.’ 하고 껄껄 웃으셨다.

  나도 따라 웃었다. 웃는 사이에 잠시나마 아픔이 잦아드는 것 같았다. 웃음이 좋은 약인 것 같다. “한잔하러 가지 않으실랑가? 그 집(단골집) 막걸리가 다 쉬고 있을 텐데.” “그럽시다. 지금 병이 다 나아버렸습니다. 하하” 유쾌한 위로였다.

  이웃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수시로 병을 물으면서 병치레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것저것 챙겨왔다. 먼 길 친지들도 연이은 위로 전화와 더불어, 된 걸음 마다치 않고 달려오기도 했다. 어느 지인은 부부 함께 와서 맛난 먹을 것과 함께 따뜻한 위로의 정을 건넸다.

  수필 공부로, 시 낭송으로 인연 맺고 있는 분들 대여섯이 달려왔다. 회장님은 손수 만든 갖은 반찬을 내놓는가 하면, 어떤 분은 내가 좋아하는 추어탕을 마련해 왔다. 병고 달래라고 고소한 강정이며 소복에 좋다는 영양 과일들을 쏟아냈다. 내가 무얼 한 게 있다고 이러시는가.

  내가 먼저 사과했다. 와병으로 예정된 수필 공부를 함께 못하게 되어 면목이 없노라 하니, “그래요. 해주셔야지요. 내일이라도 해주세요.” 맛난 과일을 들며 모두 웃었다. “저도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병도 작품이 될 테지요? 하하”

  순간, 내가 환자가 맞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몸의 중심도 잡기 어렵고 어지러워서 차를 잘 탈 수도 없다고, 그래서 어디를 갈 수가 없다며 모임을 알려온 친구들에게 말한 내가 맞는가 싶었다. 후딱 일어서서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내 모습이 환영으로 새겨진다.

  문병객들이 모두 돌아갔다. 그 고마운 사람들과 어울려 잠시나마 아픔을 잊을 수 있던 시간들이 꿈속의 일만 같았다. 그 꿈속의 일이 현실이기를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서보니 좀 어지럽긴 했지만,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그런 나날, 시간들이 흘러가는 사이에 몸과 마음은 조금씩 원기를 찾아갔다. 굴신을 못 했던 퇴원 당시를 돌아보면 엄청나게 좋아진 것 같다. 깊은 잠에서 기분 좋게 깨어난 것처럼 머잖아 기지개 산뜻하게 켜고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조금씩이나마 기력을 회복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하루 중 잠시나마 와서 도와주는 분의 정성을 받아가며 빠뜨리지 않고 복용하는 약의 효용도 있겠지만, 고적한 와병 생활 속에서 따듯한 관심과 정성을 안겨준 분들의 위로도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아이들은 모두 품을 떠나 있고, 가장 가까운 식구마저도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려, 홀로 적적히 사는 생활이 병의 가장 큰 원인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터에 온기 어린 관심으로 적요한 말길을 틔워주는 분들이 구병의 가장 좋은 힘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면 내 살아온 날들이 돌아 보이는 건 무엇 때문일까. 나는 누구 병을 앓고 있는 이를 진정으로 걱정하며 그들 병 자리를 찾아본 적이 있었던가. 내 붙이며 혈친들 말고는 별로 그리 못 해본 것 같다. 그런 내가 많은 분의 관심을 받아 기력을 찾아가고 있다니.

  남의 정 어린 관심 받을 만한 일도 못 한 내가 그런 관심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니 얼굴에 화기가 돈다. 나는 왜 그리 푼푼한 마음, 넉넉한 뜻을 가지고 살아오지 못했을까. 인제부터라도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누워서 보는 창밖 하늘이 새롭다. 오늘따라 더 푸르게 더 높게 보이는 것 같다. 수필 동호인들에게 삶이 곧 글이라며, 잘 살아야 좋은 글도 쓸 수 있다고 했었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내 말에 대한 부끄러움을 조금씩이라도 덜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하리라.

  선배 어르신, 그 집 막걸리가 다 쉬어 간다고 하셨지요? 기다려 주세요. 곧 가뿐하게 달려가 멋지게 한잔 올리겠습니다. 잔 속에 철철 담아 넣던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더욱 푸근해지도록 애쓰겠습니다.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다. 내일이면 거뜬히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 ♣(20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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