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361

음덕

음덕 집안 먼촌 할아버지뻘 되는 분이 나에게 조부님의 산소 비문을 써 달라는 청을 해왔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란 말을 누구한테서 듣고 부탁한다 했다. 글 쓰는 사람이긴 해도 그런 글을 써본 적 없다고 사양했지만, 같은 시조를 모시고 있고, 집안 내력도 모르지 않을 터에 자기 이야기를 들으면 쓸 수 있을 것이라며 강권했다. 살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아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상을 높이 기리는 일을 해놓고 싶다 했다. 장손은 아니지만, 남은 자손 중에서는 가장 맏이로서 자신이 꼭 해야 할 일 같다고 했다. 내년 윤년을 맞아 비를 세우고 싶다 했다. 권에 못 이겨 써 보겠다 했더니 족보를 들고 찾아왔다. 어느 날 풍수를 좀 아는 분과 할아버지 산소에 함께 갔었는데, 묫자리가 어떠냐 물으니 한참을 둘..

청우헌수필 2023.04.23

세월의 얼굴

세월의 얼굴 한 달여 만에 이 선생을 다시 만났다. 전에 만났을 때부터 느껴져 온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다시 만나 한번 풀어보자 했다. 이 선생도 나도 반갑게 달려와서 만났다. 술잔을 부딪치고 기울이며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주제는 주로 ‘세월’이었다. 전번에는 다섯이서 만났다. 어느 날 문득 이 선생의 전화가 왔다. 웬일이야! 서로 놀랐다. 이십여 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보고 싶다 했다. 모두 어떻게 변했는지도 궁금하다 했다. 그래, 만나자, 만나 보자.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도 한번 들어보자 했다. 사십 년이 다 되어간다. 그때 우리는 모두 한 직장에서 생활하는 젊은 직장인들이었다. 할 일에 쫓겨 힘들었지만, 퇴근길에 이따금 삼삼오오 모여 잔을 함께 기울이면서 업무의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면서..

청우헌수필 2023.04.10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삼월, 마침내 봄이 온다. 냉기 가득한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해 나온 것 같다. 아직 완전히 통과한 것은 아니다.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달려가면 따스한 햇살이며 맑고 푸른 하늘이 나타날 것이다. 그 터널의 출구를 제일 먼저 틔운 것은 상사화 잎 움이다. 찬 바람 불고 눈발도 날려 아직도 겨울이 제 품새을 지키려 간힘을 쓰고 있는 어느 날 그 냉기를 뚫고 꽁꽁 움츠리고 있던 알뿌리에서 움을 밀어냈다. 저 움이 자라 치렁한 잎을 피워내다가 여름 들머리에서 잎을 다 거두고 꽃대를 밀어 올릴 것이다. 봄 하늘을 가장 먼저 연 사람은 마을 농군 정태 씨다. 올해부터 벼농사를 거두고 사과 농사를 지어볼 참이라며 굴착기를 동원하여 너른 논들을 파기 시작했다. 서너 자 깊..

청우헌수필 2023.03.26

당분간 끊어야겠어요

당분간 끊어야겠어요 권 선생께서 당분간 술을 끊어야겠다고 했다. 그 말씀에 나는 절망을 안아야 했다. 생애의 한 막을 내린 지 십수 년,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으로 한촌 산 마을을 찾아와 발을 내렸다. 푸른 산이며 맑은 물만 보며 살면 될 줄 알았다. 얼마 동안은 그렇게 살았다. 살 만했다. 여태 어지럽기만 했던 머릿속이 소쇄해지는 듯도 했다. 그런 재미로 살아가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사람이 그리워졌다. 산도 좋고 물도 좋지만, 그 자연 속에 자연 같은 사람도 있으면 더욱 좋겠다 싶은 마음이 소록소록 피어났다. 술잔이라도 함께 들며 살아온 일이며 한세상 살아갈 일을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싶었다. 사람 들끓는 번잡한 세상을 벗어나고파 이리 살고 있으면서 이 무슨 잔망한 가탈인가. 자..

청우헌수필 2023.03.12

기다림에 대하며(5)

기다림에 대하며(5) 작은 기다림만 있으면 된다. 창창한 포부며, 우렁찬 이상이며, 풋풋한 희망이며, 달금한 꿈 들은 없어도 된다. 그런 것들이 새삼스레 찾아와 주지도 않겠지만, 찾아와 준대도 가볍잖은 짐이 될 것 같다. 해넘이 저녁 빛이 곱다. 저 해 저리 고운 빛을 뿌리기까지는 붉고도 푸른 꿈을 안고 지상으로 솟아올라 세상을 서서히 비추어 나가다가, 드디어 하늘 한가운데 이르러 모든 세상을 다 안아 보기도 하며 환호를 터뜨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 환희에 작약하고 있으려고만 하지 않았다. 넘어갈 줄도 알고, 질 줄도 아는 품새가 저 고운 빛을 그려 냈을지도 모른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저 해는 제가 만든 고운 빛 속으로 자태 곱게 들것이다. 홀가분해서 좋다. 한창때는 무거운 짐도 무거운 줄 모르고 지..

청우헌수필 2023.02.26

불의지병

불의지병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머리가 빙 돈다. 정신이 어지럽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방이 빙빙 돈다. 몸이 방 따라 마구 구른다. 일찍이 겪어 보지 못했던 일이다. 한참 동안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일어서려는데 몸을 바로 세울 수 없다. 서가를 잡고 의지해 겨우 일어섰다. 벽을 짚으며 쓰러질 듯이 화장실로 가서 양치하고 나와 물을 두어 잔 들이켰다. 맨손 체조했다. 정신이 약간 수습되는 듯했다. 세수하고 책상에 앉았다. 조금 진정되는 듯하여 잠시 책을 읽었다. 아침이면 늘 하는 대로 산책길을 나섰다. 두렁길 지나 마을공원에서 체조하고 강둑을 걸었다. 술 취한 사람처럼 걸음이 비틀거린다. 중심 잡기가 어렵다. 이대로 주저앉아 땅속으로 빨려들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정도의 ..

청우헌수필 2023.02.13

내가 남겨 놓은 것들

내가 남겨 놓은 것들 어느 날 아침, 날이 밝아와 눈을 떠보니 내가 죽었다. 날마다 해거름이면 아늑히 오르는 산을 올라 숲을 걷고 나무를 보며 상념에 젖다가 내려왔다. 몸을 씻고 이따금 즐겨 마시는 막걸리 한잔하고 잠이 들었다. 그 길로 길고 깊은 잠이 든 것 같다. 다양한 사회 경륜과 함께 장관도 지내고 테니스를 좋아했던 어떤 분은 어느 날 오전에 한 게임 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한 다음 와인 한잔하고 잠들었다가 그대로 영면했다 한다. 향년 88세였다 한다. 조용헌 명리학자는 그 죽음을 두고 거의 ‘신선급’ 죽음이라 했다. 나는 이렇다 할 경륜도 없고, 그분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딴은 산전수전 겪다가 물러나 산수 좋은 곳을 찾아와 살면서 이리 가니,..

청우헌수필 2023.01.28

그리움의 힘

그리움의 힘 고사목이 된 긴 소나무 하나가 누워 있다. 큰 소나무가 아니라 긴 소나무다. 길이가 네댓 길은 족히 넘을 것 같다. 굵기는 가장 밑동 부분의 지름이 고작 한 손아귀를 조금 넘어서고, 꼭대기 부분은 엄지손가락 굵기에 불과하다. 이 나무는 살아생전에 굵기는 별로 돌보지 않고 키만 죽을힘을 다해 키우려 했던 것 같다. 가지도 별로 없다. 주위에는 큰 나무들이 늠름히 서 있다. 아마도 이 나무는 큰 나무가 떨어뜨린 씨앗에서 생명을 얻어 움이 트고 싹이 솟아 나무의 모습을 이루어간 것 같다. 대부분 나무는 바람이나 무엇의 힘을 빌리더라도 자신의 종자를 멀리 보내기 위해 애를 쓴다. 어미의 발치에 나서 어미와 서로 빛과 양분을 다투어야 하는 몹쓸 짓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씨앗은 불행히(?)도 어..

청우헌수필 2023.01.10

주는 마음 받는 마음

주는 마음 받는 마음 지하철 전동차를 탔다. 좌석은 다 찼고 서 있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가방을 든 채 출입문 옆 손잡이를 잡고 서서 갔다. 앉아 있는 사람 중에는 젊은 사람들도 많은데, 대부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다가 건너편 좌석 중간쯤에 앉아 있는 중년 신사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오라고 손짓했다. 다가가니 일어서면서 앉으라 했다. 곧 내릴 사람인가 보다 하고, 감사하다며 앉았다. 그 신사는 반대편 문 쪽으로 가서 섰다. 한 역, 두 역…, 몇 역을 지나쳐도 내리지 않았다.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몸을 숨기듯 서 있는 사람들 속을 파고들었다. 내가 내릴 때도 그는 내리지 않고 등을 지고 서 있었다. 내가 서 있을 때 가까이에 앉아 있지도 않았고, 앉은 이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나..

청우헌수필 2022.12.26

황혼 녘의 소담한 열매

황혼 녘의 소담한 열매 나뭇잎이 푸르고 붉었던 열정의 계절을 보내고 제자리를 찾아 내려앉고 있는 늦가을 어느 날 저물녘, 문학상 수상 대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글과 더불어 살아온 평생에 ‘나도 이런 상 한번 받아 보고 싶다’라는 선망이 왜 없었을까만, 막상 그 일이 내 앞에 오고 보니 기쁘고 감사한 마음과 함께 주저로운 느낌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 지금 한창 의기롭게 글을 빚고 있는 젊은 문학인들도 많을 텐데, 의기와 열정의 시절을 다 떨쳐 보내고, 조용히 살 거라며 한촌 산곡에 깃들어 살고 있는 내가 껴안는 빛나는 상패와 근엄한 상장이 몸에 맞지 않은 옷 같지나 않을까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오늘 수상 대상이 된 내 책이 첫 책을 낸 지 꼭 이십 년 만에 우여곡절과 더불어 낸 것이라..

청우헌수필 2022.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