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32

그리움의 힘

그리움의 힘 고사목이 된 긴 소나무 하나가 누워 있다. 큰 소나무가 아니라 긴 소나무다. 길이가 네댓 길은 족히 넘을 것 같다. 굵기는 가장 밑동 부분의 지름이 고작 한 손아귀를 조금 넘어서고, 꼭대기 부분은 엄지손가락 굵기에 불과하다. 이 나무는 살아생전에 굵기는 별로 돌보지 않고 키만 죽을힘을 다해 키우려 했던 것 같다. 가지도 별로 없다. 주위에는 큰 나무들이 늠름히 서 있다. 아마도 이 나무는 큰 나무가 떨어뜨린 씨앗에서 생명을 얻어 움이 트고 싹이 솟아 나무의 모습을 이루어간 것 같다. 대부분 나무는 바람이나 무엇의 힘을 빌리더라도 자신의 종자를 멀리 보내기 위해 애를 쓴다. 어미의 발치에 나서 어미와 서로 빛과 양분을 다투어야 하는 몹쓸 짓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씨앗은 불행히(?)도 어..

청우헌수필 2023.01.10

나무의 밥벌이

나무의 밥벌이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을 다채로이 수놓던 나뭇잎들이 지고 있다. 어떤 나무는 벌써 드러낸 맨살로 하늘을 바라고 있다. 떨어지는 잎의 몸짓이 유장하다. 마치 일꾼이 이제는 할 일을 다 했노라며 가벼이 손을 털고 일터를 나서는 모습 같다. 가지도 한결 가볍다. 지난 철 동안 우린 열심히 살았다. 나는 물을 대어주고 너는 양식을 마련하여 먹거리를 만들고 하면서 알콩달콩 잘 지냈구나. 새 철이 오면 우리 다시 만나 또 한 번 아기자기 지내보자꾸나. 흔드는 가지의 손길이 정겹다. 가지와 잎의 정담이 귓전에 어른거린다. 저들은 결코 헤어지는 게 아니다. 어디에 있으나 한 몸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철들을 저마다의 일들로 열심히 살다가 한철 편안히 휴가에 든다. 그 휴가에서 돌아오면 다시 다시 한 몸 ..

청우헌수필 2022.11.23

나무의 숙명

나무의 숙명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오르며 묻는다. 나는 왜 지금 이 산을 오르고 있는가. 어디에서부터 와서, 어떠한 길을 걸어 이 산에 이르렀는가. 그 ‘어디’는 어떻게 얻은 것이고, 그 ‘길’은 또 어떻게 이어져 왔는가. 얼마나 많은 세월의 테를 감으며 여기까지 왔는가. 나는 지금 나무를 보러 오르고 있다. 나무는 나의 거울이다. 나는 태어난 곳에서부터 왔다. 태어나보니 태어난 곳이었다. 아득한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순로가 손잡아 끌기도 했지만, 험로가 밀쳐내기도 하는 길을 힘겹게 걷기도 했다. 나무를 본다. 저도 이곳을 가려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람에 불리다가, 혹은 어느 새의 부리를 타고, 또는 뉘 몸에 의지해서 땅에 떨어지고, 그 자리가 제자리 되어 싹이 트고 자랐을 것이..

청우헌수필 2022.10.09

나무의 무소유

나무의 무소유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를 보러 오른다. 나무는 내가 보려 하는 그 자리에 언제나 서 있어 아늑하게 한다. 늘 생기로운 모습으로 서 있어 더욱 아늑함을 준다. 막 잎이 날 때든 한껏 푸르러질 때든, 심지어 잎 다 지우고 맨몸으로 서 있을 때조차도 고즈넉한 생기가 전류처럼 느껴져 온다. 나무는 눈을 틔워 잎을 피워내던 시절을 거치면 푸름의 철을 맞이하게 된다. 잎이 자랄 대로 자라 푸를 대로 푸르러진다. 그즈음에 이르기까지 딴은 몹시 분주했을 것이다. 물을 빨아올리고, 햇볕을 조아려 받아 생체 조직을 작동시켜 엽록소의 빛깔로 드러내기까지 얼마나 분망했을까. 나무에게 욕망의 철이 있다면 바로 이 시절이 아닐까. 푸름에 대한 욕심, 생장에 대한 푸른 욕심이다. 나무의 그 욕심은 여기..

청우헌수필 2022.09.24

나무의 개성

나무의 개성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밤나무 노거수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어귀를 올라 무성한 국수나무 수풀을 지나면 굴피나무가 어지럽게 서 있고 갈참나무, 떡갈나무가 올망졸망 잎을 벌린다. 진달래 나무며 초피나무가 어우러진 가풀막을 올라서면 소나무 벚나무 숲이 우거진다. 서로 겨루기라도 하듯 하늘 향해 한껏 뻗어 올라가는 소나무와 벚나무 사이로 조그만 상수리나무 졸참나무가 군데군데 숲을 이루고, 분꽃나무가 호분 향으로 산을 물들이던 꽃 시절을 그리며 서로 얽혀 서 있다. 저 조그만 꽃들은 무엇이 수줍어 잎 아래에 숨듯이 달렸는가. 그 꽃 모양새가 박쥐를 닮았대서 붙은 이름 박쥐나무다. 꺾어서 코를 대보면 생강 냄새가 나는 생강나무, 조그만 잎과 열매를 달고 하늘거리는 감태나무가 어울려 숲을..

청우헌수필 2022.07.13

나무는 그저 산다

나무는 그저 산다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늘 오르는 산이지만, 오를 때마다 모습이 다르다. 산을 덮고 있는 나무의 빛깔이며 모양이 볼 때마다 새롭다. 저 둥치 줄기 어디에다 고갱이를 간직해 두었다가 철 맞추고 때에 맞추어 이리 새 모습으로 바꾸어내는 것일까. 엊그제만 해도 맨살 가지에 겨우 움이 트는가 싶더니 연둣빛 애잎이 돋고, 파릇한 새잎이 어느새 현란한 푸른 잎이 되어 가지를 감싸고 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기라도 할 양이면, 그 빛깔이며 모양이 바뀌고 달라지는 모습이 고속 영상처럼 빠르게 피어날 것 같다. 연둣빛 푸른빛이라 하지만 눈여겨보면 나무마다 빛깔이 조금씩 다 다르다. 여리고 진하기도 다르고, 밝고 어둡기도 다 다르다. 빛깔뿐만 아니라 크기도 문채도 같은 게 없다. 둥글고 모진 것..

청우헌수필 2022.05.09

나무의 철

나무의 철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어제 그 산길로 어제 그 나무를 보며 산을 오른다. 아니다. 어제 그 길이 아니고 그 나무가 아니다. 나무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가만히 보면 어제 그 잎이 아니고 그 가지가 아니다. 길도 그 길이 아니다. 모양도 바뀌어 가고 색깔도 달라지고 있다. 잎이 어느 때는 실눈 속의 눈썹 같았다가, 어느 때는 아기 손톱만 했다가, 언제는 엄지손톱처럼 자랐다가, 손바닥만큼 넓적해지기도 한다. 파르스름한 가지가 조금씩 굵어지다가 팔뚝만 하게 커서 흑갈색을 띠고 있다. 그 가지의 잎들이 한창 푸르러지는가 싶더니 노랗고 붉은 물이 들었다가 말라 들면서 떨어져 땅으로 내린다. 땅은 잎을 싸안아 차곡차곡 재었다가 제 살 속으로 스며들게 한다. 나무들의 거름이 되게 하여 나무를 ..

청우헌수필 2021.11.24

나무의 사랑(2)

나무의 사랑(2)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를 보러 오른다. 산이 정겹고 아늑한 것은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없는 산이란 얼마나 황폐하고 거칠고 쓸쓸한가. 나무가 있어 산이 그립고, 산이 그리워 나무를 찾아간다. 마을에는 사람이 정을 가꾸고, 산에는 나무가 정을 가꾼다. 나무는 산을 정답게 할 뿐만 아니라, 저를 보는 이들의 가슴도 정과 위안에 젖게 한다. 나무를 보고서도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는 이가 있을까. 그런 이가 있다면 나무 탓이 아니라 세속에 깊이 찌든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나무의 숨결을 느끼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자연적 존재로서의 생태적 자아로부터 너무 먼 자리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우석제, 『나무의 수사학』)라 한 것도 나무에 젖지 못하는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세상의 ..

청우헌수필 2021.05.23

나무의 외로움

나무의 외로움 나무는 외로움을 모른다. 외롭다거나 외롭지 않다는 걸 겪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외로운 것인가, 혼자 있는 것이 외로운 것인가, 여럿 중에서 혼자 외따로 되는 것이 외로운 것인가. ‘혼자’라는 게 무엇인가. 그게 바로 저 아니던가. 나무는 애초에 한 알의 씨앗으로 땅에 떨어졌다. 그때부터 혼자다. 오직 흙과 물이 보듬어줄 뿐, 누가 저를 태어나게 해준다거나, 태어난 것을 자라게 해주는 손길이 따로 있지 않았다. 혼자서 싹이 트고 혼자서 세상으로 나왔다. 세상에 나와서도 혼자다. 바라볼 수 있는 건 하늘뿐이었다. 하늘을 바라면서 태양의 볕살을 쬐고 바람을 안을 뿐이었다. 뿌리에는 흙과 물이 있고, 가지에는 햇살과 바람이 있어 그것들을 의지 삼아 몸피를 불려 나갔다. 그랬다. 흙과 ..

청우헌수필 2021.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