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11

혼자 돌아왔다

혼자 돌아왔다 돌아와 달라고 애절하게 빌었건만, 오히려 나를 불렀다. 달려갔던 나는 혼자 돌아오고야 말았다. 돌아와 주기만 하면 내가 아주 딴사람이 되어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나의 애끊는 호소는 허공중에 무참히 흩어져 버렸다. 바쁜 일이 있더라도 아이들 전화는 잘 받아 달라던 부탁이 나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될 줄이야. 당장 당신에게 달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러지는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말만 믿고 나는 내 볼일을 천연하게 보고 있었다. 당신의 부탁대로 아이들의 전화를 잘 받았지. 그런데 이게 무슨 산산조각 깨어져 내려앉는 하늘 같은 일이란 말인가. 내가 달려갔을 때 당신 체온은 이미 빠져나가 버리고, 감은 눈에 앞니 하얀 끝자락만 살포시 보여주고 있었지. 오랜만에 만나는 나에게 짓는 미소였던가...

청우헌수필 2023.08.23

내 삶의 주인은

내 삶의 주인은 이 일 배 차를 탄다. 내가 타기 편할 시각에 출발하는 차는 없어졌다. 내 편리와는 맞지 않는 차지만 기다려 탈 수밖에 없다. 차는 제 갈 길로 달려나간다. 내가 가고 싶은 길과는 상관이 없다.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차에 실려 가고 있다. 차는 내 목적지에만 데려다주면 저의 할 일은 끝나는 거라고 여길 터이지만, 차가 당도하는 그 목적지라는 곳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다. 차가 정해 놓은 곳을 맞추어 내 목적지로 삼아야 한다. 차는 저의 목적지에 나를 내려놓을 뿐이다. 멀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자면 외방을 달려온 차에서 내려 다시 동네로 오는 차를 갈아타야 한다. 차와 차 사이의 시간 틈을 나를 위하여 적절하게 조절해 주지는 않는다. 그 틈이 얼마이든 올 차를 간절히 기다렸다..

청우헌수필 2022.06.12

십칠 년밖에

십칠 년밖에 이 일 배 해가 바뀌었다. 권 선배가 말했다. “이제 나는 십칠 년밖에 못 산다네요!” 권 선배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위이시지만, 막역한 술벗이다. “누가 그럽디까?!” “요새 백세 시대라잖아요! 하하” 그러고 보니 권 선배께서는 올해 여든셋이 되셨다. “그러면 저는 십칠 년 후에는 누구와 술벗을 하란 말입니까? 하하” “그걸 난들 어찌 알겠소! 하하” 하기야 누가 감히 앞일을 알 수 있을까. 어쩌면 권 선배는 이승에서는 나의 선배시지만, 세상을 바꿀 때는 누가 선배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선배의 여명 십칠 년! 내가 이 한촌을 찾아와 산 걸 돌이켜보면 십칠 년도 잠깐이다. 바로 십칠 년 전 이 땅을 처음 디뎠다. 공직 발령을 따라 그해 초봄 이 궁벽한 산촌을 찾아왔었다. 둘러봐도 사방..

청우헌수필 2022.02.08

꿈이 가는 길

꿈이 가는 길 꿈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청운의 꿈, 그 희망이 솟고 활기가 넘치는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아니라도 봄날의 꽃잎 같고, 설한의 잉걸불같이 곱고도 따뜻한 꿈이라면 또 얼마나 생기로울까. 나이 탓일지, 몸의 기운 탓일지는 몰라도 요즈음 잠자리에 누웠다 하면 꿈이다. 눈만 감으면 몽롱한 꿈이 오래된 영사기의 낡은 필름처럼 어지럽게 돌아간다. 흘러간 세월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이거나 몸담았던 장소들이 스쳐 간다. 몇 조각 남은 영상들이다. 꿈에서 벗어나거나 잠을 깨고 나면 거의 지워지고 아련한 자취만 머릿속을 가를 뿐이다. 영상 속의 사람들은 거의가 서러운 사람들이거나 어려운 사람들이다. 만나서 서럽도록 애틋한 사람들인가 하면, 만나면 서로 힘들기만 한 사람들이다. 어머니의 글썽이는 ..

청우헌수필 2021.01.22

삶을 잘 사는 것은

삶을 잘 사는 것은 세월이 흐르고 있다. 흘러가면서 남긴 자취가 내 안에 쌓여간다. 누가 불러서 오는 것도 아니고, 등을 밀어서 가는 것도 아닌 게 세월이지 않은가. 그렇게 자연으로 흘러오고 흘러가면서 굳이 자취를 남기는 세월이 가시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쌓이는 세월의 자취가 몸피를 더해간다 싶을수록 그 자취에 남은 세월이 이따금 돌아 보인다. 돌아보아 따뜻하고 즐거운 일만 있다면야 얼마나 아늑한 일일까. 그렇지 않은 일이 돌이켜질 때면 아린 마음을 거두기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어느 날 서가를 뒤지다 보니 오래 손길이 닿지 않아 머리에 먼지가 까맣게 앉은 책이 보였다. 언제 적의 책인가 싶어 빼어보니 이십여 년 전에 산 것이다. 뒤쪽 속 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ㅇㅇ년ㅇ월ㅇ월 ㅇㅇ와 함께 서울역에서..

청우헌수필 2020.12.24

자연을 알게 해주소서

자연을 알게 해주소서 책을 읽다가 보면, 눈길을 딱 멈춰 서게 하는 구절이 있다. 그런 구절은 그대로 그 자리에서 붙박고 싶게 한다. 그 구절이 주는 공감과 공명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고, 읽을수록 편안해는 마음속에 계속 머물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세상을 살면서 마음을 알아주는 이를 만나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도 즐거운 일인가. 마음을 더없이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고맙고도 포근한 일인가. 사는 일이 어렵고 힘들다고 느껴질 때, 안아주기도 하고 밀어주기도 하는 이를 만난다면 얼마나 따뜻하고도 생기로운 일이 될까. 어떤 책의 어느 한 구절은 바로 그런 사람을 만난 듯한 희열을 느끼게 하고 위안을 얻게도 한다. 그 구절을 어찌 떠나고 싶겠는가. 그 감동에서 깰까 싶어 어찌 다른 구..

청우헌수필 2020.11.23

나무는 말이 없다

나무는 말이 없다 겨울 산을 오른다. 입고 있던 것을 다 벗어버린 나무들 사이로 찬 바람이 지난다. 상수리나무든, 떡갈나무든, 물푸레나무든 모두 맨모습으로 빨갛게 섰다. 하늘 향해 맨살을 드러내놓고 있어도 나무는 떨지 않는다. 얼지도 않고 이울지도 않는다. 산이 있기 때문이다. 산의 무엇을 믿는가. 산은 오직 뿌리를 내리게 해줄 뿐이다. 잎이 나면 나는 대로 미소지어 주고, 꽃이 피면 피는 대로 이뻐해 줄 뿐이다. 잎이 언제 돋으라 한 적도 없고, 꽃을 어떻게 피우라 한 적도 없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그뿐 아니다. 그 꽃과 잎의 빛깔이 바래고 말라 떨어져도 애타 하지 않는다. 그 떨어진 꽃이며 잎을 마냥 감싸 안아 줄 뿐이다. 그 꽃과 잎들이 품을 파고들면 조용히 품어 때가 되면 소곳이 세..

청우헌수필 2020.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