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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얼굴

산의 얼굴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늠름하고, 산자락에 안긴 나무들은 언제 보아도 생기롭다. 나무는 늘 몸을 바꾸어 가면서 생기를 돋우어 간다. 지금은 한껏 푸르던 시절을 조금씩 넘어서고 있지만, 그렇다고 생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생기’란 무엇인가. 싱싱하고 힘찬 기운이기도 하지만, 바로 ‘생명 활동’이 아니던가. 더없이 무성했던 저 나무의 잎새들은 노랗고 빨간 물로 치장하다가 된바람 불어오면 또 하나의 제자리인 땅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나무는 맨 가지만 남아 설한풍을 이겨 내야 하지만, 그때야말로 나무에게는 새로운 삶을 위한 부푼 꿈의 시간이다. 잎새가 내려앉은 땅이란 무엇이고 어디인가. 산이고 그 살갗이다. 나뭇잎은 산의 살갗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하늘 맑고 물길..

청우헌수필 2021.10.13

산은 방이다

산은 방이다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녹음이 한창 무성하다. 커다란 나무는 커다란 대로, 조그만 나무는 조그만 대로 저마다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내리쬐는 햇볕 햇살이 뜨겁고 세찰수록 그늘은 더욱 후덕해진다. 산을 오르다가 우거진 나무 아래 그늘을 두르고 앉아 땀을 긋는다. 길고도 억센 잎이 빽빽이 모여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바람이 지날 때는 잎사귀가 그 바람을 부드럽게 재워 땅 위로 뿌려준다. 저 무슨 소리인가. 경쾌한 새소리 벌레 소리를 따라 나뭇잎이 춤을 춘다. 무슨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기도 하고, 먼 곳 어디 그리던 소식을 전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서 날아오는 향기일까. 나긋한 꽃 내음 같기도 하고, 풋풋한 풀 내음 같기도 하다. 나무 그늘은 반갑고 향긋한 저네들 세상 소식을 넌..

청우헌수필 2021.08.26

산, 몸을 찾아서

산, 몸을 찾아서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걷는다. 무성히 우거진 숲의 그늘이 몸을 아늑하게 한다. 불같이 쨍쨍거리던 햇살도 숲에 닿으면 양순한 그늘이 되고 만다. 산은 언제나 싱그럽다. 숲이 있기 때문이다. 산은 언제나 아늑하다. 숲의 그늘이 있기 때문이다. 산에서는 흘리는 땀은 청량하다. 산의 땀은 몸을 새 깃처럼 가볍게 한다. 몸만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다. 몸 따라 마음도 가벼워진다. 가벼워지는 몸속으로 숲의 푸름이 스며든다. 푸름은 몸속으로 신선하게 가라앉는다. 푸름이 침윤한 몸속에는 아무것도 들 수가 없다. 세상의 어떤 호사도, 이해도, 상념도, 이념도 감히 자리를 넘볼 수 없다. 속된 근심 걱정거리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 하찮은 것들이 어찌 이 푸름의 성역으로 들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처음 ..

청우헌수필 2021.07.24

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봄이 무르녹고 있는 산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지고 있다. 맨 먼저 봄을 싣고 온 생강나무와 진달래는 노랗고 붉은 꽃을 내려놓고, 새잎을 수줍게 돋구어내고 있다. 겨우내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감태나무 마른 잎은 새 움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가지를 떠난다. 지난가을에 떨어진 씨앗이 땅속에 들었다가 새싹이 되어 세상으로 눈을 내미는 것도 있을 것이다. 큰 소나무 아래 조그만 소나무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작년에 혹은 재작년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고 자란 나무들은 작은 것은 작은 대로, 큰 것은 큰 대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나무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산다. 큰키나무도 있고, 떨기나무도 있다. 바늘잎나무도 있고 넓은잎나무도 있다. 늘푸른나무도 ..

청우헌수필 2021.04.19

꿈이 가는 길

꿈이 가는 길 꿈이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청운의 꿈, 그 희망이 솟고 활기가 넘치는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건 아니라도 봄날의 꽃잎 같고, 설한의 잉걸불같이 곱고도 따뜻한 꿈이라면 또 얼마나 생기로울까. 나이 탓일지, 몸의 기운 탓일지는 몰라도 요즈음 잠자리에 누웠다 하면 꿈이다. 눈만 감으면 몽롱한 꿈이 오래된 영사기의 낡은 필름처럼 어지럽게 돌아간다. 흘러간 세월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이거나 몸담았던 장소들이 스쳐 간다. 몇 조각 남은 영상들이다. 꿈에서 벗어나거나 잠을 깨고 나면 거의 지워지고 아련한 자취만 머릿속을 가를 뿐이다. 영상 속의 사람들은 거의가 서러운 사람들이거나 어려운 사람들이다. 만나서 서럽도록 애틋한 사람들인가 하면, 만나면 서로 힘들기만 한 사람들이다. 어머니의 글썽이는 ..

청우헌수필 2021.01.22

산은 영원하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처럼 무성한 녹음으로 우거진 나무들을 넉넉한 품으로 안고 있다. 키가 크고 작은 나무, 몸통이 굵고 가는 나무, 잎이 넓고 좁은 나무……, 나무의 모양은 각양각색일지라도 모든 나무를 분별없이 너그럽게 품고 있다. 우거진 푸른 잎새들은 바뀌는 철을 따라 색색 물이 들었다가 마르고 떨어져 제 태어난 땅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가지들은 부지런한 생명 작용으로 떨어진 잎을 거름 삼아 새로운 잎과 꽃을 피워낼 것이다. 천명을 다한 나무는 강대나무가 되었다가 제 태어난 흙 위에 길게 몸을 누일 것이다. 세월이 흐른 후 떨어진 잎들이 그랬던 것처럼 흙이 되어 새 생명으로 태어날 것이다. 나무는 저들의 섭리를 따라 나고 지는 변전을 거듭한다. 이 나무들을 안고 있는 산은 철 따라 세월 따..

청우헌수필 2020.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