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의사의 경고를 어겼다

이청산 2024. 3. 24. 12:13

의사의 경고를 어겼다

 

  의사의 경고를 어겼다. 의사가 오르지 말라는 산에 오르고 말았다.

  어쩌다 척추에 금이 가는 변고를 당했다. 십여 일 입원하면서 갈라진 금을 붙이는 치료를 하고, 퇴원하고서도 계속 가료 중이다. 산은 평지보다 허리에 더 무리한 힘이 가해질 수 있고, 때에 따라 치명적인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기동할 만할 즈음부터는 잠시간씩 걷는 것도 회복에 도움 되는 일이라기에 순탄한 길을 잡아 조금씩 걸었다. 늘 다니던 강둑길로 나가서 맑게 흐르는 물을 보며 위안 삼기도 하고, 고요한 골짜기를 걸으며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바뀌어 겨울 가고 봄이 왔다.

  시나브로 오는 봄과 함께 땅속에 묻혀 있던 상사화 둥근 뿌리가 잎 촉을 내밀기 시작하여 점점 자라 오르고, 두렁에는 하늘빛을 닮은 봄까치꽃이 자잘한 꽃들을 피워냈다. 강둑에는 노란 꽃을 피워낼 산괴불주머니가 잎부터 돋우어내고 있다.

  저들이 저리 피어나자면 산 소식은 어찌 돌아가고 있을까. 겨울의 두꺼운 낙엽들은 그대로 쌓여 있을까. 나무들은 아직도 맨몸의 묵언 수행을 계속하고 있을까. 무슨 움이라도, 망울이라도 수줍게 틔워 내고 있을까.

  때마침 야생화 전문 기자인 조선일보 김민철 논설위원이 국립중앙박물관 뜰에 찾아온 봄꽃 소식을 뉴스레터로 전해왔다. 거기에는 매화는 물론 돌단풍이며 미선나무꽃, 생강나무 노란 꽃이며 올괴불나무 꽃이 이른 봄을 수놓고 있다고 했다.

  생강나무, 올괴불나무 꽃~!! 성냥개비 끝에 피어나는 불꽃처럼 갑자기 내 속 깊은 곳에서 그리움이 화르르 솟아올랐다. 내 늘 오르는 산에서 다른 어떤 푸나무들보다 가장 먼저 봄을 느껍게 해주던 꽃들이 아닌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 그 꽃 그리 핀 것을 보면, 내 산길의 그 꽃들도 이미 제빛 제 모습을 다 드러내고 있을 것이 아닌가. ‘무엇을 어찌하고 싶어 죽겠다.’라는 상투적 어구 속에 박제되어 있는 ‘죽겠다’라는 말이 내 속에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했다.

  산으로 내달았다. 허리 보호대를 두르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발은 벌써 산어귀를 딛고 있었다. 내가 볼 수 없는 사이에 봄이 벌써 이렇게 가깝고도 깊게 와 있구나. 몇 걸음 오르지 않아 노란 꽃술을 뭉쳐 놓은 것 같은 생강나무 꽃이 물오른 가지에 송이송이 송송 달려 있었다.

  생채기 진 가지에서 생강 냄새가 난다는 꽃나무, ‘사랑의 고백’, ‘영원히 당신 것’이라는 꽃말을 가진 그 꽃, 정선아리랑 속의 동박, 김유정 소설 ‘동백꽃’ 속의 그 동백, 내 산길 속에서 봄마다 나를 가장 먼저 맞고, 내가 유달리 이뻐하던 꽃이 아니던가.

  내 몸 어디가 아프단 말인가. 지난날 내 발자국이 살아있을 것 같은 길을 익숙한 걸음으로 디뎌 나아간다. 오름길 한 곳, 저 가녀린 나무 그 잔가지에서 보일 듯 말 듯 고개 숙인 꽃, 올괴불나무 꽃이다. 이른 봄, 내 산길에 생강나무 노란 꽃과 함께 나를 반겨주던 꽃이다.

  나래 치듯 벌린 연분홍 꽃잎 속에 솟아난 꽃술, 그 끝에 달린 빨간 문채, 김민철 기자는 ‘빨간 발레 토슈즈를 신은 듯’하다 했다. 꽃말이 ‘사랑의 희열’이고 보면 그 희열로 경쾌한 발레라도 추고 있는 건가. 이 봄 이 꽃을 못 볼 양이면 내 희열 하나가 무참히 묻힐 뻔했구나.

  내친걸음은 점점 가풀막진 곳을 향한다. 그 가풀막 위에는 내가 오로지하는 고사목 의자가 있다. 이승의 명을 다하고 누운 나무 하나가 수많은 미물의 집이 되듯, 나의 아늑한 의자가 된 것이다. 못 올라도 거기까지는 올라야 한다. 또 봐야 할 것이 있다.

  다리와 스틱에 박차를 가한다. 드디어 고사목 의자가 보인다. 그보다 먼저 눈을 번쩍 뜨게 하는 것, 진달래가 언제 저리 곱게 피었는가. 막 벙글려는 것도 있지만, 활짝 피어 나를 향해 함박웃음을 짓는 것도 있다. 날마다 오를 적에는 움트고 망울지고 그 망울이 꽃으로 피는 걸 사랑스레 지켜봐 오다가 저 핀 꽃을 대하니 “왜 이제야 오느냐?”며 외려 날 탓하는 것 같다.

  진달래뿐이랴, 생강나무 꽃도, 올괴불나무 꽃도 마찬가지다. 날 얼마나 원망했을까. 아니 내가 너희들을 못 보고 이 봄을 넘겼더라면 내 속에 얼마나 아린 멍이 졌겠느냐. 이제야 그 멍을 조금은 지울 수 있겠노라며, 다시 보자 하고 산을 내린다.

  내리는 걸음이 그리 무겁진 않았지만, 길이 완만해질 때쯤은 허리에 무슨 전류라도 흐르는 듯 저려 온다. 의사의 경고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 경고를 어긴 업보로 하루 이틀쯤은 허리를 곧추 펴고 누워서 앓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도리 없다. 보고 싶은 것 보고, 사랑하고 싶은 것 사랑했으니, 그 병통쯤이야 달게 겪어야 할 일이다. 살고 죽는 것도 그럴 수 있지 않으랴. 온 마음 바쳐서 하고 싶은 일을 한 연후에 한두 해쯤 일찍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무슨 아쉬움이 그리 남으랴.

  그렇지만 의사의 경고를 남의 일같이 내칠 수는 없는 일이다. 내일은 고즈넉한 골짜기를 걸을 것이다. 세상 모든 소음은 사라지고 고요만이 가득한 그 골짜기, 모든 사랑도 그리움도 미움도 욕심도 다 내려놓을 수 있는 그 아늑한 골짜기로 들 것이다. ♣(2024.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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