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떠나보내기가 무엇이기에

이청산 2024. 4. 25. 15:55

떠나보내기가 무엇이기에

 

  사람은 누구나 맞이하고 떠나보내기를 거듭하면서 삶을 엮어 나간다. 사람을 맞이했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 떠나보내기도 하고, 물건을 맞이했다가 쓸모없거나 낡아서 떠나보내기도 하고, 시간들을 맞이했다가 때가 되면 떠나보내기도 한다.

  때로는 맞이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맞이했다가 힘들게 떠나보내기도 하고, 맞고 싶지만 쉽게 와주지 않는 것을 공들여 맞이했다가 서운하게 떠나보내야 하는 것도 없지 않고, 우연으로 맞이했다가 필연을 남기고 떠나보내는 것도 있을 수 있다.

  맞이했기에 떠나보내기도 해야 하겠지만, 떠나보낸 기억이 맞이한 기억보다 더 뚜렷이 새겨지기도 한다. 가깝고 먼 시간의 차이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맞이가 주는 놀라움이나 기쁨보다 떠나보내기가 주는 아쉬움과 비감이 더 깊게 새겨지는 탓도 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맞이와 떠나보내기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맞이한 것에 대한 부담감 같은 것을 안고 있다가 그것이 떠나갈 때 느끼는 시원함이랄지, 안도감 때문에 떠나보낸 기억이 맞이할 때보다 더 편안하게 남을 수도 있다.

  사람도 물건도 시간도 다 마찬가지다. 특히 사람에 대한 기억이 물건이나 시간보다 더 감회가 깊을 수 있다. 좋은 감정이든, 그렇지 않은 감정이든 물건이나 시간에서보다는 사람에게 더 복잡다단하게 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참 많은 것들을 맞이하고, 맞이한 만큼 많이도 떠나보냈다.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만, 나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숱한 사람들을 맞이하고 세월이 흐른 후에는 여지없이 떠나보내 왔다.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언제 만나고 언제 떠나보냈는지도 모르게 아련하거나 아예 기억에서 사라진 이들도 없지 않지만, 맞이한 일도, 떠나보낸 일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어 내내 아쉽고 아릿하게 남기도 한다.

  평생을 함께한 사람이라면 어떠할까. 맞이할 때의 감회가 세상에 무엇과 바꿀 수 없을 만큼 환희로울 수도 있고, 떠나보낼 때의 안타까움은 천지에서 가장 큰 아픔과 슬픔일 수 있다. 그간의 주고받은 사연이야 어떠했든 결코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많은 세월 속에서 희비와 고락을 함께해온 사람이 남겨 놓고 간 물건들이며 옷가지를 추스르다가 낡은 상자 깊은 곳에서 외투 하나가 나왔다. 깜짝 놀랐다. 반세기에 가까운 까마득한 시절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내가 받은 혼수품이었다.

  떨리는 손길로 펼쳐보니 흠진 곳 하나 없이 말짱한 채로 얌전하게 잘 개어져 있었다. 이 말짱한 옷을 왜 이렇게 깊이 간직해 두었을까. 이리 간직할 때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나름대로는 오만가지 상념이 얽혔을 것 같다.

  말짱하긴 했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니 시속에 쳐진 것이 되어 차마 계속 입게 할 수 없다고 여긴 것 같다. 버리자니 어려있는 사연과 애착을 끊을 수 없고, 그렇다고 장롱 속에 곱게 걸어 둘 수만은 없어 이리 깊이 간직해 둔 것 같다.

  그때 우리는 설레는 마음들을 안고 몇 곳의 양복점을 돌아다녔다. 천의 종류며 색깔이며 무늬도 가려야 했고, 만드는 사람의 솜씨와 정성도 살펴야 하고, 모양이며 입은 맵시도 염두에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렵게 한 곳을 찾아 적당한 천을 골라 정성을 다해 지어 달라 했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것은 그만큼 꿈도 정도 크고 뜨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 외투를 비롯해 그가 나에게 해 준 옷가지 하나하나마다 앞으로 그려나갈 삶의 모든 것을 다 담았을지도 모른다. 그 꿈들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나에게 입히고 입혔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어찌 좋은 날 복된 날만 있었으랴. 희로애락을 다 겪으며 살아오는 동안에 그 옷들에 정념을 묻기도 하고, 때로는 원망을 새기기도 했을 것이다. 그 정념도 원망도 모두가 애착 때문이었으리라. 그렇기에 못 입을 지경이 되었어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 옷에 어린 그런 마음들을 새겨보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이는 듯도 했다. 마치 그 사람과 마주 보고 있는 듯도 해 그리움이랄지 미안함이랄지 안타까움이랄지 걷잡을 수 없는 상념의 소용돌이가 일면서 심신이 다 떨려왔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젠가는 떠나보내야 하고, 떠나가야 할 것이지만, 차마 보낼 수가 없다. 아침이 없는 깊은 밤 속에서 이 옷과 함께 그의 나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가고 오는 것이 어찌 마음대로 뜻대로 될 수 있을까. 떠나보내야 한다는 마른 마음과 떠나보내기 아쉬워 젖은 마음 사이를, 나는 지금 방황하고 있다. 어쩌면 이 방황은 내 세상 문을 닫을 때까지 갈지도 모르겠다. 그 방황과 함께 긴 잠속으로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떠나보낸다는 게 무엇이기에-.♣(2024.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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