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경 18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강둑을 내려와 골짜기로 든다. 강을 품고 있는 강둑을 내리면 산골짜기로 드는 길과 들판으로 가는 길이 갈린다. 들길을 따라 집으로 갈 것을, 요즈음은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들었다가 돌아 나와 들길을 지나 집으로 향한다. 여느 때는 아침엔 들판과 강물을 옆구리에 끼고 강둑을 거닐고, 저녁 무렵엔 고샅을 지나 산으로 오르곤 했다. 산을 오를 수가 없게 되었다. 무슨 병 탓인지 갑자기 쓰러지면서 등뼈에 금이 갔다. 어려운 시술 끝에 금을 붙이긴 했지만, 산에는 오르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아침저녁의 걸음을 합쳐 강둑을 거닐다가 골짜기로 든다. 언덕 중허리에서 정한 물이 나는 샘골을 지나 속삭이듯 흐르는 도랑물 소리를 들으며 깊숙한 걸음을 옮긴다. 한 발짝 한 발짝 골의 깊이를 더해..

청우헌수필 2024.03.03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이 일 배 나에게 언제 죽음이 와도 기꺼이 맞이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살 만큼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이제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나 갚아야 할 빚이 별로 없는 홀가분함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특별히 무슨 깨달음을 얻어 죽음 앞에서 유달리 초연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풀도 나무도 짐승도 사람도, 목숨을 가진 모든 것들이란 태어남이 있듯이 죽음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는 평범한 상념에서일 뿐이다. 죽지 않고 살아 있기만 해서도 안 되고, 그런 일이란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철이 되면 미련 없이 가지를 떠나는 나뭇잎처럼 나도 그렇게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그래서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는 것도 쓰면서 죽음에게 순순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정말 ..

청우헌수필 2021.12.15

산의 얼굴

산의 얼굴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늠름하고, 산자락에 안긴 나무들은 언제 보아도 생기롭다. 나무는 늘 몸을 바꾸어 가면서 생기를 돋우어 간다. 지금은 한껏 푸르던 시절을 조금씩 넘어서고 있지만, 그렇다고 생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생기’란 무엇인가. 싱싱하고 힘찬 기운이기도 하지만, 바로 ‘생명 활동’이 아니던가. 더없이 무성했던 저 나무의 잎새들은 노랗고 빨간 물로 치장하다가 된바람 불어오면 또 하나의 제자리인 땅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나무는 맨 가지만 남아 설한풍을 이겨 내야 하지만, 그때야말로 나무에게는 새로운 삶을 위한 부푼 꿈의 시간이다. 잎새가 내려앉은 땅이란 무엇이고 어디인가. 산이고 그 살갗이다. 나뭇잎은 산의 살갗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하늘 맑고 물길..

청우헌수필 2021.10.13

산, 몸을 찾아서

산, 몸을 찾아서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걷는다. 무성히 우거진 숲의 그늘이 몸을 아늑하게 한다. 불같이 쨍쨍거리던 햇살도 숲에 닿으면 양순한 그늘이 되고 만다. 산은 언제나 싱그럽다. 숲이 있기 때문이다. 산은 언제나 아늑하다. 숲의 그늘이 있기 때문이다. 산에서는 흘리는 땀은 청량하다. 산의 땀은 몸을 새 깃처럼 가볍게 한다. 몸만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다. 몸 따라 마음도 가벼워진다. 가벼워지는 몸속으로 숲의 푸름이 스며든다. 푸름은 몸속으로 신선하게 가라앉는다. 푸름이 침윤한 몸속에는 아무것도 들 수가 없다. 세상의 어떤 호사도, 이해도, 상념도, 이념도 감히 자리를 넘볼 수 없다. 속된 근심 걱정거리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 하찮은 것들이 어찌 이 푸름의 성역으로 들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처음 ..

청우헌수필 2021.07.24

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봄이 무르녹고 있는 산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지고 있다. 맨 먼저 봄을 싣고 온 생강나무와 진달래는 노랗고 붉은 꽃을 내려놓고, 새잎을 수줍게 돋구어내고 있다. 겨우내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감태나무 마른 잎은 새 움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가지를 떠난다. 지난가을에 떨어진 씨앗이 땅속에 들었다가 새싹이 되어 세상으로 눈을 내미는 것도 있을 것이다. 큰 소나무 아래 조그만 소나무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작년에 혹은 재작년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고 자란 나무들은 작은 것은 작은 대로, 큰 것은 큰 대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나무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산다. 큰키나무도 있고, 떨기나무도 있다. 바늘잎나무도 있고 넓은잎나무도 있다. 늘푸른나무도 ..

청우헌수필 2021.04.19

나무의 견인

나무의 견인(堅忍) 내 일이든 남 일이든, 내 집 사는 모습이든 나라 돌아가는 모양새든, 큰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보고 듣고 겪다 보면 참아내기가 어려운 일들이 한둘 아니다. 어쩌면 일을 그렇게 하고 있는가. 사는 걸 이리 힘들게 하는가. 세상을 어찌 이 모양으로 만들고 있는가. 돌아보고 바라볼수록 견뎌내기가 힘든 일들이 적지 않다. 물신선이라도 되어야 할까. 따뜻하고 시원하게 대할 수 있는 일보다 참고 견디기가 어려운 일들이 더 끓고 있는 세상인 것 같기도 하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를 본다. 작은키나무 큰키나무, 곧은 나무 외틀어진 나무, 바늘잎나무 넓은잎나무, 늘푸른나무 갈잎나무……. 생긴 모양도 사는 모습도 다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한데 어울려 산다. 골짜기며 비탈에 살기도 하고, 등성이며..

청우헌수필 2020.09.23

산은 영원하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처럼 무성한 녹음으로 우거진 나무들을 넉넉한 품으로 안고 있다. 키가 크고 작은 나무, 몸통이 굵고 가는 나무, 잎이 넓고 좁은 나무……, 나무의 모양은 각양각색일지라도 모든 나무를 분별없이 너그럽게 품고 있다. 우거진 푸른 잎새들은 바뀌는 철을 따라 색색 물이 들었다가 마르고 떨어져 제 태어난 땅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가지들은 부지런한 생명 작용으로 떨어진 잎을 거름 삼아 새로운 잎과 꽃을 피워낼 것이다. 천명을 다한 나무는 강대나무가 되었다가 제 태어난 흙 위에 길게 몸을 누일 것이다. 세월이 흐른 후 떨어진 잎들이 그랬던 것처럼 흙이 되어 새 생명으로 태어날 것이다. 나무는 저들의 섭리를 따라 나고 지는 변전을 거듭한다. 이 나무들을 안고 있는 산은 철 따라 세월 따..

청우헌수필 2020.06.14

나무의 겨울

나무의 겨울 겨울 산에 찬 바람이 분다. 넓은잎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구고 발가벗은 몸으로 서 있다. 가을부터 한 잎 두 잎 떨어져 내리던 나뭇잎이 겨울바람을 맞으며 몇 안 남은 것마저 다 떨어뜨리고 있다. 저러고도 이 혹한의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을까. 군걱정이다. 나무는 잎 다 떨굴 이 겨울을 위하여 한 해를 살아온지도 모른다. 나무는 늙지 않는다. 해마다 청춘으로 산다. 그 청춘을 위하여 이 겨울은 새로이 시작하는 계절이다. 입은 것은 모두 벗어버리는 것으로 새로운 시절을 기약하고 있는 것이다. 조용히 맨몸으로 하늘을 바란다. 맨살이 향하는 곳은 오직 하늘이다. 온몸으로 하늘을 안는다. 이 나무를 보고 시인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은 겨울이 오면 옷을 자꾸 껴입는데/ 나무는 옷을..

청우헌수필 2020.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