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말라가는 칡넝쿨

이청산 2023. 11. 26. 12:25

말라가는 칡넝쿨

 

  가을이 깊어가는 강둑을 걷는다. 줄지어 선 벚나무는 붉은빛 잎들이 떨어지면서 맨살을 드러내 가고 있다. 나무 아래 쑥부쟁이가 가을을 보내는 손짓인 듯 하늘거리고, 강물은 나무 그림자를 어루만지며 맑게 여물어간다.

  저 나무의 칡 좀 보게나. 넓적한 잎을 쩍쩍 벌리며 넝쿨을 마구 감고 뻗어 대던 때가 언젠데 저리 말라 쪼그라들 줄이야. 지난여름 왕성하던 그 모습은 까마득히 사라지고 빛바랜 모습으로 우그리고 있는 자태가 처연해 보이기도 한다.

  한때 칡넝쿨은 기고만장했다. 전후좌우도 돌아보지도 않고 아무 데 할 것 없이 마구 뻗어나고, 뻗어나는 곳마다 사정없이 감아댔다. 큰 나무든 작은 풀이든 가리지 않았다. 굵은 가지는 굵은 대로 칭칭 감고, 여린 풀의 잎이며 줄기는 목을 비틀 듯 감았다.

  큼지막이 벌린 잎으로 볕살마저 가려 다른 것들은 숨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게 했다. 숲길이라도 걸을라치면 어김없이 발길을 잡는 것은 환삼덩굴 아니면 칡넝쿨이다. 환삼덩굴은 내치면 물러나기라도 하지만, 이건 기어이 발길을 잡아 넘긴다.

  그렇게 세상을 살 때는 온통 제 세상인 줄 알았을 것이다. 못 오를 곳이 없고, 못 붙들 것이 없었다. 무엇이라도 제 갈퀴 안에 다 넣을 수 있지 않았는가. 무엇이라도 다 덮어 제 그늘에 넣을 수 있지 않았는가.

  어느 당의 혁신 조직에서 최고 권력자와 가까이 지내는 정치인들에게 다음 선거에 출마를 사양하거나 어려운 곳에 출마하여 당을 도우라고 권했다. 그러자 어느 정치인은 오히려 백 대에 가까운 버스로 사천여 명의 지역 지지자를 동원하여 환호 속에서 세를 과시하더란다.

  그에게는 아직 가을도 오지 않고, 겨울은 더욱 모르고 마냥 모든 게 짙푸른 여름을 누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마음대로 못할 일이 없고 뜻대로 되지 않을 일도 없다는 듯 한껏 호기를 부리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한창때의 칡넝쿨처럼-.

  말라가는 칡넝쿨을 다시 본다. 그 한창때는 뻗으려고 하면 어디로든 뻗을 수 있고 감으려면 무엇이든 감을 수가 있었다. 그 마음 그 뜻 그대로 모든 것들은 뻗을 길을 내주었고, 크든 작든 어떤 것이라도 그의 갈퀴에 감겨들었다.

  세상에 무엇이 영원한가. 무엇이 영원히 살 수 있고, 무엇을 영원히 누릴 수 있는가. 저 칡넝쿨 세상을 모르고 무섭게 모든 것을 감으며 뻗어 올라가다가 계절이 바뀌면 이리 초라해진다는 것을 내다 보기나 했을까.

  시간이 흐르고 철이 바뀌면 변하고 쇠해 가는 게 어디 칡넝쿨뿐이랴. 사람도 나무도 풀도 모든 것이 성할 때는 성하다가 쇠할 때는 쇠하여 가기 마련이고 그러다가 죽고 소멸하고, 또 나고 자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저 칡넝쿨의 성쇠가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건 무슨 까닭일까. 성할 때 너무 호기를 부리지 않았는가.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고 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렸다는 것이다. 저 넝쿨에 몸을 묶이고 목을 조인 것들은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그렇게 겁나는 게 없었다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기세 좋게 살아 볼 일이지, 저 조락한 꼴은 무엇인가. 다른 나무의 잎들도 다 말라고 떨어져 가도 저만은 등등하게 살아야 하지 않은가. 지금은 오히려 다른 것보다 더 초라해져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지역민의 지지세를 과시하던 그 정치인의 그 힘은 영원할까.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하든 눈치 안 보고 산다며, 모든 일은 자기 뜻대로 하겠다고 호언하고 있는 걸까. 저 칡넝쿨도 한철은 그랬다. 하고 싶은 것 다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계절의 변화는 비켜 가지 못했다.

  누구든, 무엇이든 제 삶의 철이 있기 마련이다. 제철이 지나면 쇠락을 면치 못하게 된다. 제철이라고 해서 아무것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걸 저 칡넝쿨에서 다시 본다. 그 삶의 뒤끝이 저리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지 않은가.

  나를 본다. 지금 나는 제철을 다 보내고 내다 볼 일보다 돌아볼 일만 잔뜩 쌓인 계절 속을 살고 있다. 나는 편안하고 떳떳하게 살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고단도 하고 힘들어도 하면서 궁상스럽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제철을 철모르고 보낸 것 같기도 하다. 그 한때의 열정, 격정, 분노 속을 살면서 모든 것을 내 뜻대로만 하려 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은 저 칡넝쿨 같은 모습이 되어 있는 것도 같다. 

  고대 로마의 대문호 키케로가 노년에 관하여에서 기력이 쇠하는 이유는 그저 나이 들어서가 아니라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냈기 때문인 경우가 더욱 많다.’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고 할까.

  어찌 생각하면 분노의 시간들을 흘려보낸 지금의 내 세월이 아늑하다 싶으면서도, 얽히고설킨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얼굴에 화기가 솟기도 한다. 저 말라가는 칡넝쿨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지세를 과시하던 그 정치인은 장차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이제부터라도 잘 물들고 싶다. 고운 빛깔 단풍으로 내려앉고 싶다. 마지막 저녁노을 빛처럼 곱게 스러지고 싶다. ♣(2023.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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