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387

전동 스쿠터를 타다

전동 스쿠터를 타다.   내 힘을 별로 들이지 않고 내 뜻대로 길을 달려 보기는 평생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가쁜 숨에 땀을 닦아가며 달리거나, 달려주는 기기를 위해 상당한 비용을 치르면서 달려야 했지만, 지금 나는 힘도 비용도 아주 적게 들이면서 내 뜻을 따라서 가는 길을 달리고 있다.  흘러가는 세월이 내 땀으로 내달을 수 있는 길을 거두어갔다. 한 발 한 발 디뎌 걸을 수 있는 길을 내어주는 것만으로 만족해하고 감사해하며 걸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것도 힘닿는 데까지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다른 것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자전거다. 자전거는 걷는 것보다는 적은 힘으로, 걸어서 갈 때보다는 더 먼 길을 갈 수 있게 주는 이기다. 그렇지만 자전거도 내 힘을 적지 ..

청우헌수필 2024.12.11

수필이 고맙다

수필이 고맙다   수필이 고맙다. 수필로 인연한 사람들이 고맙다.  내가 사랑하는 수필로 좋은 글을 남기지도 못하고, 빛나는 이름도 얻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내 속에 흐르고 있는 문학의 피는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학창 시절에는 시에 관심을 가지고 교과서 읽기보다는 시집 읽기를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는 마음이 시를 쓰게 만들었다. 시를 열심히 쓰면서 문예반장으로 활동도 하고, 문학 동아리 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로 나왔다. 바쁘게 사회생활을 하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시는 나에게서 시들해져 갔다. 모든 걸 비유와 상징으로 응축해야 하는 시에는 별 재주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글에 대한 향수는 가시지 않았던지, 몇몇 지면에 잡문을 가끔씩 내밀곤 했었다. 상사며 상부 기관으..

청우헌수필 2024.11.28

영혼 없는 문자

영혼 없는 문자  우리는 일상 속에서 주변 사람들과 많은 말을 주고받으며 산다. 바로 말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특히 요즈음같이 에스앤에스가 발달한 시대에는 시간과 거리에 상관없이 여러 사람과 많은 말을 주고받는데, 그때의 말은 주로 문자가 많이 이용된다. 글말인 문자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정감 있는 그림 속에 넣어 그 말을 더욱 정답게 만들기도 한다.  어느 한 사람이 아름다운 그림 속에 받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도 할 아주 감성적이거나 희망적인 문자를 넣어 보내면, 그 문자를 받는 사람은 혼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전파하기도 한다. 전파자는 누구의 마음을 보내는 걸까. 자신의 마음일까, 원작자의 마음일까? 그렇게 받는 문자들에서도 보내는 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읽어야 할까..

청우헌수필 2024.11.10

댑싸리 전설(2)

댑싸리 전설(2)   댑싸리는 올가을에도 더는 붉을 수 없을 것 같은 짙붉은 물이 들었다. 아내는 올해도 그 붉은빛을 볼 수가 없다. 그런 채로 저 붉은빛은 씨를 남기면서 하얗게 바래 갈 것이다.  지난해 초여름 가료를 위해 아이들 집에 가 있던 아내가 당부한 말을 따라 그렇게 심었던 대로 올 초여름에도 어린 댑싸리를 문간 어름에 한 줄로 나란히 심었다. 그 댑싸리가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흘러가는 사이에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빛을 바꾸어 가며 무럭무럭 자라다가 이제 그 푸른 고비도 넘어 새빨갛게 물이 들었다.  아내는 자기가 씨 뿌려서 난 모종을 한 줄로 보기 좋게 심어 달라 해놓고 초록으로 제법 북슬북슬한 자태를 이룬 한여름 어느 날, 그 모습을 영영 볼 수 없는 나라로 가버렸다. 지금처럼 가을이 이슥해..

청우헌수필 2024.10.27

세월의 자국을 넘어서

세월의 자국을 넘어서   커다란 거울이 터미널 화장실 입구 옆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화장실을 가도 무심히 그냥 지나칠 수도 있고, 차에 오를 시각이 임박하여 급히 가다 보면 눈 돌릴 겨를이 없어 거울을 지나치기도 한다.  어느 날 차 탈 대비로 화장실을 들면서 우연히 거울 쪽을 곁눈질하게 되었다. 허리 구부정한 웬 늙은이 하나가 중절모를 쓰고 한 손에는 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싶어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바로 나였다.  낯선 모습이다. 내 언제 저리 허리가 굽어졌으며, 모자 아래로 드러나 있는 머리카락은 왜 저리 허옇게 보이는가. 집에서 반듯하게 서서 거울을 볼 때와는 영 딴판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런 모습이 되어 있었구나.  점점 늙어가는 줄이야 모를 ..

청우헌수필 2024.10.13

댑싸리 전설(1)

댑싸리 전설(1)   담장 옆 연녹색 댑싸리가 무성하다. 크고 작은 것이 섞여 있지만, 이웃하고 있는 밭의 들깨며 고춧대를 바라보며 저도 그만큼 크고 싶었는지 성큼 자라 우거져 있다. 키만 큰 것이 아니라, 줄기에서 올라와 크고 작게 벋어나온 수많은 잔가지가 사방으로 벌어 둥그스름한 모양을 이루기도 했다.  아내가 봤다면 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을 것이다. 아내는 청초하고도 복슬복슬한 모습을 탐스럽게 여겼던지 댑싸리를 이뻐했다. 지난해 봄, 어디서 구했는지 댑싸리 씨를 가져와 골목 밭 가에 뿌렸다. 따뜻한 햇볕이 내려앉고 때로는 비가 내리기도 하는 사이에 조그만 싹이 흙을 뚫고 솟더니 소록소록 자라 올랐다.  댑싸리 싹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무렵 아내는 자주 자리에 눕기 시작했다. 병원을 드나들기도 ..

청우헌수필 2024.09.22

쓸쓸함에 대하여

쓸쓸함에 대하여 누군들 쓸쓸할 때가 왜 없을까? 살기에 바빠 쓸쓸할 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바쁜 걸 강조해서 하는 말일 것이다. 정녕 쓸쓸할 틈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바쁜 사람일지라도 문득 쓸쓸함이 밀려올 때가 어찌 없을까.  나는 덜 바빠서 그런지 쓸쓸함을 느낄 때가 더러 있다. 가끔씩 끙끙 앓기도 해야 하는 쓸쓸함에 잠길 때도 없지 않다. 바쁘게 살던 시절이 훌쩍 흘러가 버렸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바쁠 수 있는 기력도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별로 없는 기력이 가끔은 쓸쓸함을 가져오기도 한다. 어쨌든 이따금 쓸쓸함이 찾아오지만, 그중에서도 혼자 읽기 아까운 시가 있어도 같이 읽거나 들려주면서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쓸쓸함이 느껴지기도 한..

청우헌수필 2024.09.11

위대한 정령

위대한 정령   밭에 나는 풀이 너무도 성가시다. 베어내도 나고. 뽑아도 나고 깊숙이 캐내어도 또 난다. 난 풀들은 쑥쑥 잘도 자란다. 아침저녁이 다르고 하루하루가 놀랍다. 신기하다. 이 풀들은 누가 씨를 뿌리고 누가 가꾸는 것일까. 돌보는 이가 없다면 이토록 끈질긴 생명력으로 나고 살고 무성해질 수 있을까. 심어서 가꾸려 하는 작물은 뜻대로 잘 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는다. 잘 나라고 씨뿌리기 전에 땅에다 거름을 묻고, 나면 비료를 주고 병 들지 말라고 약을 쳐주고 해도 바라는 대로 키우기는 쉽지 않다. 원하는 결실을 거두기는 더 어렵다. 저 풀을 가꾸는 손길에 비하면 작물을 가꾸는 사람의 손길이며 그 힘이란 보잘것없는 것 같다.  누가 가꾸든 모든 식물에는 꽃이며 열매가 다 피고 열리기 마련이다. 단..

청우헌수필 2024.08.25

기다림에 대하여(6)

기다림에 대하여(6)   오늘 아침에도 내 귀는 현관문 쪽을 향해 있다. 그가 여는 문소리가 곧장 들릴 것 같다. 그는 나의 요양을 도와주는 분이다. 어쩌다 보니 홀로서기가 어렵게 되었다. 곁에 아무도 없는 지경이 된 데다 질고까지 겹쳤다. 관계 기관에서 내 처지를 헤아려 보내준 분이다.  정해진 시각 무렵에 어김없이 문이 열린다. 밤새 안녕을 묻는 인사와 함께 나의 하루에 필요한 일들을 챙겨나간다. 이내 몇 가지 찬이 어우러진 아침상이 들어온다. 텃밭 남새로 마련한 찬과 함께 집에서 보듬어온 정성도 곁들였다.   그가 여는 문소리는 요즘 내 삶의 고즈넉한 동력이고 희망의 시그널이다. 나는 그를 편안하고도 고마운 눈길로 바라지만, 그는 나의 눈길을 여밀 틈도 없이 바쁘다.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내 하루 ..

청우헌수필 2024.08.08

침대 위에서

침대 위에서   침대가 편안하다. 아늑하다. 지난날에는 침대 위에서 자는 잠이 어쩐지 편치를 못하고, 어떨 때는 허리가 저리기도 하던 때가 있었다. 그저 따뜻한 방바닥에 이부자리를 깔고 이리저리 뒹굴며 자는 것이 제일이라 여겼었다.  뭐가 잘못되었던지 기력을 잃고 쓰러지면서 척추에 금이 가는 환란을 당했다. 두어 주일 병원 신세를 지다가 나왔다. 허리가 몹시 아파 마음대로 드러누울 수도 없고, 누우면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눕고 일어나는 일이 세상을 바꾸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먼데 있는 아이들이 알고 사방 알아보고는 전동 침대를 들어오게 해주었다. 리모컨만 작동하면 앉은 사람을 눕게도 해주고, 누운 사람을 일어나게도 해주었다. 누우면 허리가 불편할 때 상체와 하체 부분을 약간씩 들어 올리면 허리가 편안..

청우헌수필 2024.0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