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424

그때가 오면

그때가 오면 해사하고도 화사하게 강둑을 수놓던 강둑의 왕벚꽃이며, 산을 무늬 짓던 산벚꽃이 다 지고, 꽃의 자리를 푸른 잎들이 차지하고 있다. 꽃이 피었을 때가 먼 옛적인 듯 아스라하다. 저 꽃 속에 있을 때는 나의 복지인 듯 아늑했는데, 푸른 잎들은 나를 내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달력이 봄을 알려 와도 벚꽃이 피기 전에는 나의 봄은 아니었다. 강둑을 걷는 아침마다 벚나무의 꽃눈을 보고 또 보았다. 아주 조금씩 눈을 떠가는 모습이 신기하고도 애가 타기도 했다. 달라져 가는 게 없다 싶을 때는 애가 탔지만, 하루 건너서 보면 조금은 눈을 틔운 것 같아 신기하고도 반가웠다. 올해만이랴, 해마다 그렇게 기다려 왔지만, 반갑게 기다리는 마음은 그제나 이제나 다르지 않았다. 그렇..

청우헌수필 2026.05.09

벚꽃 약속

벚꽃 약속 몇 달에 걸친 치료를 마치고 병원을 나서던 날, 의사는 나에게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불전佛典의 가르침에 깊은 관심을 두고 공부도 하고 있는 그가 나에게 준 책은 ‘마음을 잘 쓰는 법’을 이야기한 불교심리학에 관한 책이었다. 나중에 보니, 그 책 뒤표지 속에 “귀한 인연에 감사드리며 몸도 마음도 늘 평안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벚꽃 보기 좋은 날 꼭 초대해 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정중한 서명을 해놓았다. 진료를 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봄이 되면 우리 마을 강둑에는 왕벚꽃이, 뒷산에는 산벚꽃이 찬란하게 피어나 꽃 대궐을 이룬다고 자랑한 적이 있었다. 그 현란한 풍경을 꼭 한번 보여드리고 싶다 했다. 내 그 말이 기억에 깊이 남았던 것 같다. “예, 잊지 않겠습니다...

청우헌수필 2026.04.20

모처럼의 외출

모처럼의 외출 지난 한 해 동안 나들이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 엄두를 내지 않았다. 그저 동네 강둑을 거닐며 물을 보고 풀꽃을 보듬는 것으로 위안 삼았다. 다행스럽게도 그사이에 몸이 조금씩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어갔다. 봄이 오고 있었다. 나에게도 봄이 좀 오려는가. 내 몸이 한창일 때 내가 운영해 오다시피 하던 문화 모임에서 아무 날 남도 문화 답사 예정이라는 기별이 왔다. 추진하고 있는 이가 참여 여부를 물어 왔다. 참여하겠다고 했다. 답사지는 저 남쪽 구례, 하동 쪽으로 가서 창연한 운조루 고택을 보고, 유명한 화개장터며 십 리 벚꽃길을 달려 박경리문학관도 탐방하고 올 것이라 했다. 십여 년 전에 가 본 곳도 있지만, 기꺼이 가겠다 했다. 봤다 한들 느낌..

청우헌수필 2026.04.06

나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나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나이라는 생물학적 제약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다스리겠다는 강한 의지를 볼 수도 있고, ‘나는 여전히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라는 자기만의 삶의 속도를 중시하고자는 긍정적인 심리를 느낄 수도 있다. 한편으로,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나는 늙어가고 있다.’라는 자각과 함께 노화에 대한 저항 심리를 볼 수 있다. 또한 ‘아직 나는 건재하다.’라는 사실을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선언함으로써 자존감을 높이려는 심리적 전략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 높이는 그 목소리는 누구보다도 노화를 저리게 느끼고 있다는 반향이 아닐까. 나이는 죄가 없다. 나이는 나이이지..

청우헌수필 2026.03.19

따사로운 저녁노을을 바라며

따사로운 저녁노을을 바라며 나이가 들어갈수록 떨어지는 건 기력이고, 멀어지는 건 사람들인 것 같다. 딴은 건강 관리를 한다고 해도 몸의 모든 기능이 전 같지가 않다. 하루가 다르다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사람 대할 일도 그렇다. 떨어지는 기력과 함께 활동량도 줄어들다 보니 찾아갈 사람도, 찾아올 사람도 드물어져 가고 있다. 기운을 추슬러 보겠다고 몸을 움직여 보기도 하고, 이것저것 좋다는 걸 챙기고 챙겨주어 먹어 보기도 하지만, 그리 녹록지는 않다.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도 없다. 붙이도 모두 흩어지고, 권속도 떠나갔다. 남은 건 쇠잔해져 가는 기력과 구슬리기 쉽지 않은 외로움뿐이다. 그래도 사는 날까지는 살아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런 고단한 날 속에서 찾아갈 곳이 있고 찾아올 사람이 있다..

청우헌수필 2026.03.08

고장에 대하여

고장에 대하여 세월은 나를 저물녘 황혼빛 속에서 홀로 고적을 안고 살아가게 만들어 놓았다.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병마를 불러들여 안겨 혼자서는 생존도 생활도 제대로 건사하기 힘들게도 했다. 세월은 그렇게 해찰을 부리지만, 세상은 그리 무정하지 않았다. 내 무슨 복덕을 지은 것도 없는데, 마치 설화 속 이야기처럼 어디서 고마운 분을 나에게로 보내주었다. 그분은 아침 한때 잠시 나를 보살펴 줄 뿐이지만, 생존의 고단을 풀어주고, 생활의 적막을 달래주기 위해 따뜻한 마음을 다해 주고 있다. 세월을 다시 돌아본다. 세월은 몸도 마음도, 그 몸과 마음을 의지하고 있는 주위의 모든 것도 이냥 그대로 두는 법이 없다. 모든 것을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도 하지만, 또 모든 것을 허물고 없애버리기도 한다. 그게 ..

청우헌수필 2026.02.16

시 낭송 애호가와 시 낭송가

시 낭송 애호가와 시 낭송가 시 낭송은 지금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국적으로 시 낭송 강좌며 각종 행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현상은 나라 경제 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예술과 문화에 대한 욕구와 인식의 정도가 고양된 결과로 볼 수도 있고, ‘K-컬쳐’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현상과도 무관치 않을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로 시 낭송 콘서트며 경연대회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고, 낭송하는 사람과 낭송을 즐기는 사람들도 계속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특히 경북 지역에서는 학교 교육의 필수 과정으로 되어 있는 프랑스의 시 낭송 교육을 모델로 한 경상북도교육청 임종식 교육감의 ‘시詩울림학교’ 교육 시책도 큰 동력이 되고 있다. 초중등 학교 교육에서는 물론, 교육청 관할 각..

청우헌수필 2026.02.03

이경종 선생의 바다

이경종 선생의 바다 “……집채 같은 파도가 손바닥만 한 배를 덮치는 순간 배는 맥없이 기우뚱했고 56명의 승객은 ‘아!’ 하고 비명과 함께 차가운 바닷속으로 던져졌다. ‘살려줘요!’ 하는 절규와 함께 허우적거리던 어린이, 부녀자들이 순식간에 파도 속에 묻혔다. 배는 산산조각이 나고 시체는 영하 5도의 차가운 바다 위에 떠올랐다. 마중 나왔던 가족들은 빤히 보이는 참변 모습에 발을 동동 구르며 통곡했다.……” 1976년 1월 17일 울릉도 북쪽 천부항에서 만덕호가 참혹하게 침몰하는 모습을 신문 기사(1976.1.19. 동아일보)는 이렇게 시작했다. 결국, 그 배에 타고 있던 37명은 시체로 떠 오르거나 영원한 실종자가 되어 바다의 혼이 되어야 했고, 19명만이 살아나올 수 있었다. 그 배에 천부초등..

청우헌수필 2026.01.28

이경종 선생의 목소리

이경종 선생의 목소리 이경종 선생은 울릉도 북쪽 천부초등학교 교사였다. 지금부터 50년 전 1976년 1월 17일 천부항에서 배가 난파되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선생은 재빠르게 목판을 잡고 뭍을 향하려던 순간, 제자 둘이 탈진 상태로 허우적대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몸을 돌려 가까스로 두 아이를 끌어당겨 함께 파도를 헤치기 위해 사투를 벌였지만, 파도 폭발을 이기지 못해 모두 물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선생은 35세, 교직의 창창한 꿈을 그리던 청년 교사 시절이었다. 그 후 그의 아름다운 인간애를 추앙하는 사람들에 의해 상과 훈장이 수여되고 순직비가 세워졌다. 해마다 그날이 오면 빗돌 앞에 제수를 차리고 꽃을 바치며 2백5십만 년 전 화산섬 울릉도를 흘러내린 용암보다 더 뜨거웠던 그 열정 어..

청우헌수필 2026.01.21

산바람 강바람과 안성기

산바람 강바람과 안성기 안성기 배우가 향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영화에 문외한이 되어버린 지 오래되어 영화에 관해서는 관심도 지식도 별로 없지만, 배우 ‘안성기’ 하면 꼭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어느 영화에선가 그가 「산바람 강바람」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내가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이었으니 60년도 훨씬 더 전이다. 어느 조그마한 극장에서 흑백 영화로 본 기억이 아련한데, 안성기 말고는 영화 제목도, 출연 배우도, 줄거리도 다 잊어버렸다. 그 장면 하나만 남아 안성기 이름만 나오면 그 장면이 떠올랐다. 다른 장면이며 줄거리가 기억 안 나면, 노래 그대로 산을 뛰어다니거나 강물을 쫓아다니며 노는 장면 속에서 부른 노래였을까, 그런 청량하고 순정한 장면들을 마음대로 ..

청우헌수필 2026.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