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노을빛

이청산 2024. 1. 25. 12:52

노을빛

 

  저녁 노을빛이 좋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특히 요즈음 들어와서 다홍으로 티 없이 곱게 물든 노을빛을 보면 그리운 이와 마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오래된 사랑을 다시 따뜻하게 나누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노을빛이 다 고운 것은 아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아침놀을 뿌리며 지상으로 밝게 솟아올라, 중천에 높이 떠 세상을 환히 비추다가 서서히 서녘을 붉게 물들이며 저물어가는 해라야 노을빛이 곱다. 구름을 털어낸 밝고 맑은 해일수록 노을빛도 고운 것이다.

  그리 고운 노을빛을 보면 지나온 내 생애가 돌아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나는 어떻게 살아왔던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저물녘에 서 있지 않은가. 저 해처럼 한 번이라도 세상을 환하게 비춰나 보고 저물고 있는가. 돌아보이는 게 많은 걸 보면, 나도 늙긴 한 모양이다.

  요즈음 보호사가 와서 내 지내는 일을 도와주고 있다. 도움이 필요한 노령자에게 공공 기관에서 보내주는 사람이다. 도움을 받으며 살아나가는 처지가 된 것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지금 그 사람은 나의 참 고마운 구원자임은 어쩔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119에 실려 가는 처지가 되었다. 지역 종합병원이 감당 못 해 도시 큰 병원으로 가야 했다. 무슨 영양소 결핍이라는 진단과 함께 쓰러지는 충격으로 등뼈에 금이 가 있다고 했다. 이중고를 안게 된 것이다.

  오랜 날 병실 신세를 지다가 나왔어도 여느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충분한 섭생과 관리가 필요하다 했다. 그 필요에 따라 하루에 잠시일망정 보호사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의식주며 성치 못한 몸을 다스려 나가고 있다.

  오직 한 몸 홀로 살아가야 하는 시간들 속을 살고 있다. 붙이들은 성가하여 둥지를 떠난 지 오래고, 반려마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렸다. 붙이들을 좀 더 성심으로 거두어 줄 걸, 그 반려를 좀 더 따뜻하게 안아 줄 걸, 하는 후회들만을 허공에 덧없이 날리고 있다.

  딴은 힘을 다해 살아온다고 한 게 그렇다. 방장했던 시절,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내가 해야 할 일이면, 땀 흘려 하기를 애썼고, 응당 내가 해야 할 일이면 열정을 불사르며 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때는 주위로부터 작은 기림도 받아가며 보람을 안아보기도 했다.

  그런 것들만이 내 전부라 치부할 때도 없지 않았다. 다른 것은 별로 돌보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날들이 오히려 지금은 아픔이 되어 남을 줄이야. 별반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을뿐더러, 마음 따뜻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람도 마땅찮은 처지가 되어 있지 않은가.

  기운을 잃고 쓰러지게 된 것도, 몸 어디에 금이 가게 된 것도, 모든 것이 내가 짊어져야 할 업보일 것이겠다. 모든 사리를 두루두루 잘 건사하며 살아왔다면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날까. 고통을 달게 받을지언정 누구를 탓하고 무엇을 원망할 것인가.

  이 허물 많은 사람에게도 비쳐올 빛이 있었던가. 다행히 내 생존의 일을 도와줄 이를 잘 만났다. 공간을 차지하여 먹고 입고 하는 데에 손쓸 일이 좀 많은가. 가려운 데를 어찌 알아 시원하게 긁어주듯, 내가 치루기 어려운 모든 일을 잘 챙겨주고 있다. 고마울 따름이다.

  그는 나와 혈족도 아니고, 가약으로 맺어진 사람도 아니거늘 어찌 이리할 수 있는가. 타고난 품성인가, 따뜻하게 살려는 애씀인가. 오늘도 그는 아침 일찍 나에게로 와서 제반사를 알뜰하게 챙겨주고, 하루 지낼 일을 마련해 놓고 내일을 기약하곤 집을 나선다.

  그를 대할 때마다 내 살아온 이력이 자꾸만 돌아 보인다. 나는 누구에게 이리 따뜻하게 대해 준 적이 있었던가. 무엇에 살뜰한 마음을 쏟아 본 적이 있었던가. 그렇구나. 매사를 고마워하며 사랑할 줄을 모르고 살았구나. 이 늘그막에 철이 드는 걸까.

  철이 진작 들었더라면, 쓰러지지 않아도, 금이 가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한 번 회한 어린 후회심이 들기도 하지만, 지나가고 흘러간 일을 돌이킬 수 없어 안타깝고 아쉬울 뿐이다.

  도움 덕분인지 지난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그 도움이 나의 거울이 되는 하루하루를 고맙게 살아가고 있다. 그 하루하루 끝에는 저 해 저물어 서산을 넘듯 내 삶도 이슥해져 서녘 깊이 들게 될 것이다. 저 해는 고운 빛을 뿌리고 제 뿌린 빛 속으로 소곳이 들고 있다.

  무엇을 더 소망하랴. 나도 저 해처럼 고운 노을빛을 뿌리고 싶을 뿐이다. 구름 낀 마음으로 저 빛 어찌 뿌릴 수 있으랴. 맑지 못한 심사로 저 빛 속을 어찌 들 수 있으랴. 따뜻한 마음을 돋울 일이다. 티 없는 심사로 살기를 애쓸 일이다.

  저녁 노을빛이 좋고도 부럽다.♣ (2024.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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