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아침 문 여는 소리

이청산 2024. 4. 8. 15:07

아침 문 여는 소리

 

  아침마다 내 사는 일을 도와주기 위해 찾아와 주는 분이 있다. 오늘 아침에 또 정성 들인 반찬을 찬그릇에 정갈하게 담아왔다. ‘늘 이렇게 가져오시면 어떻게 하느냐?’ 하니. ‘제 마음이지요.’라 하며 상긋이 고개를 숙인다.

  감당하기 쉽지 않은 병치레를 하고 있다. 두어 주일을 병원에 머물다 나왔지만, 곧 좋아질 증세가 아니었다. 병원을 나와서가 더 힘들었다. 도와줄 이가 없이 혼자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살아야 하는가, 비감 서린 마음과 함께 자칫 희망을 잃을 뻔했다.

  병중인 몸을 돌봐 줄 이 없는 궁색한 삶을 굳이 살아내어야 하는 걸까. 몸이 아픈 것도 힘든 일이지만,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아픈 몸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아픔 아래에 깔린 고적이 삶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게 했다. 아침이 나의 것이 아니기를 빌며 잠드는 밤이 많았다.

  그 사정을 알게 된 지역 사회복지기관과 나라 건강관리기관에서 주선하여 내 사는 일을 도와줄 분을 보내주었다. 낯선 사람이 사생할 속에 들어온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기대도 없지 않았다. ‘천만다행’이란 말이 나를 위해 생겨난 것 같다.

  내 고적이 잠시나마 깨어질 수 있다는 게 위안이 되기도 했고, 버거운 생활의 일들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안도감을 느끼게도 했다. 함께하는 생활이 하루에 두어 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으로 온 하루를 아늑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려고 애썼다.

  그는 오늘도 이른 아침 나에게로 왔다. 조반부터 준비해 나갔다. 처음엔 집에서 아침을 들고 온다며 나만 차려 주었다. 며칠 후부터 아침을 함께하자고 했다. 같이 먹을 사람이 있으면 밥맛이 더 날 수 있지 않으냐며, 함께하면 더 잘 차리기에 애쓸 게 아니냐는 농담도 보탰다.

  함께 먹으니 한층 더 가까워지는 듯했다. 한 식구가 된 것이다. 식생활은 물론, 의식주 전반에 걸쳐 더욱 깊은 정성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살림을 아예 좀 챙겨달라며 신용카드 한 장을 맡겼다. 맡기를 주저했지만, 그게 나도 편한 일이라며 맡아 달라며 사정했다.

  그 카드로 장을 봐와서 먹거리며 필수품들을 마련해 나갔지만, 카드를 쓸 수 없는 재래시장에서 거래한 것은 금액을 물어 이체해 주곤 했다. 그게 걸려서일까, 베풀기를 좋아하는 본래의 마음에서일까. 집에서 장만한 먹거리들을 때때로 가져와 함께 먹자 했다.

  이런 것도 다 재료비가 들었을 것 아니냐며 비용을 대고 싶다 하니, ‘꼭 그렇게 하셔야 하느냐?’며 낯빛을 바꾸었다. 자기는 정성으로 하는 일을 왜 그리 각박하게 대하느냐는 뜻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오히려 무안했다.

  그런 마음을 가진 그를 위해 나도 조금의 보답이라도 하려고 애쓰고 있던 어느 날, 이 철에 겉옷 안에 받쳐 입을 옷이 마땅찮은 것 같더라며, 셔츠와 조끼를 한 벌로 사 와 입어보라 했다. 아주 잘 어울렸다. 고마운 마음을 미소에 실었다.

  그렇게 마음과 정성을 주고받는 사이에 내 몸이 한결 가벼워져 가는 느낌이 들어갔다.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해서 대상자 보호라는 임무를 완수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정성을 붓다 보면 모든 것이 잘 다스려질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을 하는 분들은 다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는 걸까. 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분의 천품인 것 같았다. 내가 따로 바랄 일을 남기지 않는다. 내 속을 꿰뚫어 보듯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척척 정성을 쏟아낸다. 천품이 아니고야 어찌 그리 헌신할 수 있으랴.

  감동의 하루하루가 이어져 나갔다. 하루 첫 문이 열리는 반가운 소리에 귀를 세우는 아침들이 내게로 오는 일이 거듭되면서 처지에 대한 비감이랄지, 삶에 대한 회의감이 조금씩 스러져 가는 것 같았다. 아침 문 여는 소리를 안고 잠드는 밤이 많아져 갔다.

  프랑스의 사회운동가인 아베 피에르(Abbe Pierre, 1912~2007) 신부는 ‘온갖 종류의 소망들을 가질 수 있지만, 희망은 삶의 의미 단 하나뿐’이라 했다. 무언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들은 개개인의 소망일 뿐, 희망이란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랬다. 나는 희망을 내려놓을 뻔했다. 내 삶의 의미를 무엇에겐가 빼앗길 뻔했다. 삶에 대한 의미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가야 할 곳은 딱 한 곳뿐인 절망 아닌가. 절망이란 희망이 끊기고 무너진 것이 아닌가. 나는 지금 살아 있다.

  아침을 한결 가볍게 일어난다. 병중의 허리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체조를 하고 세수를 맑게 한다. 가뿐히 살아가고 싶은 마음을 다시 여미며, 아침 문 열리는 소리를 기다린다. 희망을 기다린다. 그 기다림과 함께 삶의 의미를 다시 새겨 본다.

  내일쯤이면 몸도 마음도 가뜬해질 것도 같다. ♣(202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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