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청산 2024. 3. 3. 15:14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강둑을 내려와 골짜기로 든다. 강을 품고 있는 강둑을 내리면 산골짜기로 드는 길과 들판으로 가는 길이 갈린다. 들길을 따라 집으로 갈 것을, 요즈음은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들었다가 돌아 나와 들길을 지나 집으로 향한다.

  여느 때는 아침엔 들판과 강물을 옆구리에 끼고 강둑을 거닐고, 저녁 무렵엔 고샅을 지나 산으로 오르곤 했다. 산을 오를 수가 없게 되었다. 무슨 병 탓인지 갑자기 쓰러지면서 등뼈에 금이 갔다. 어려운 시술 끝에 금을 붙이긴 했지만, 산에는 오르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아침저녁의 걸음을 합쳐 강둑을 거닐다가 골짜기로 든다. 언덕 중허리에서 정한 물이 나는 샘골을 지나 속삭이듯 흐르는 도랑물 소리를 들으며 깊숙한 걸음을 옮긴다. 한 발짝 한 발짝 골의 깊이를 더해갈수록 세상이 달라져 간다.

  바뀌어 가는 풍경 속에 눈 풍경만이 아니라 귀 경치도 점점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강둑을 걸을 때는 강 건너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가 강물 소리를 집어삼키곤 했다. 그래도 물이 아늑하고 물에 잠긴 풍경이 그윽하여 즐겨 걷곤 했다.

  골짜기가 깊어질수록 세상의 차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더니 마침내는 모두 감감해져 버렸다. 요란하게 질주하던 소리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오직 남아 있는 것은 도랑물 소리, 내 발길 소리뿐이다. 산의 나무들도 깊은 묵언행에 들어 있다.

  도랑이 곁에서 좀 멀어지자 아무 소리도 남지 않았다. 어쩌다 가녀린 새소리가 들려올 뿐,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추어져 버렸다. 아, 나도 멈추어지고 말았다. 발길도 고요 속에 얼어붙고, 머릿속을 끓던 잡념들도 뚝 끊기었다.

  무서우면서도 편안하다. 세상에서 뚝 떨어져나온 것 같은 고독감이 두렵기도 했지만, 세상 모두 내 것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부요해지면서 고즈넉해 온다. 마음에 무슨 근심이 있고 걱정이 있으며, 몸에 무슨 지장이 있고 병이 있는가.

  법정 스님은 ‘출가란 단순히 집에서 나온다는 말이 아니라. 온갖 세속적인 모순과 갈등과 집착의 집에서 훨훨 미련 없이 떨치고 나온다.’(『물소리 바람 소리』, 「가사 입은 도둑들」)라는 뜻이라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순간만은 내가 고결한 출가승이 된 것 같다.

  마음이 어찌 이리 아늑해지는가. 깊숙한 골짜기의 이 정밀이 어찌 이리 포근한가. 그래서 노자가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러 미묘한 모성이라 한다.’(『도덕경』, 제6장)라고 한 건가. 이 골짜기가 그야말로 어머니의 품같이 포근하다.

  이 품은 괴로움도 즐거움이 되게 하고 불행도 행복으로 바꾸어 줄 것 같다. 아니 그렇게 되게 하고 그렇게 바꾸어 준다. 나는 지금 외기러기가 되어 고단하게 살고 있다. 거기다가 불의의 병마까지 덮쳐와 육신의 통고와 함께 지내고 있지 않은가.

  한 줄기 빛이 비쳐왔다. 몸도 처지도 어려움 속을 헤매고 있다는 걸 알고, 건강을 보살펴주는 기관에서 내 심신을 기르고 도와줄 이를 보내주었다. 아침나절 짧은 동안의 일로 하루 일을 다 채울 듯 성심을 다해 살펴준다. 나는 지금 불행 속의 행복을 누리고 있다.

  이 골짜기에서는 모두가 행복이다. 불행도 행복이 되고, 행복은 더욱 따뜻해진다. 괴로움은 즐거움이 되고, 즐거움은 더욱 아늑해진다. 아니다. 불행도 행복도 없다.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다. 이 원시 고요 속에 무슨 고락이며 행불행이 따로 있으랴. 평온이 있을 뿐이다.

  고요를 지고 품으며 골짜기를 나선다. 배웅해 주는 고요의 온기가 등을 어루만지는가 싶더니 안긴 고요가 체온을 남기며 하나둘씩 손을 흔든다. 도랑물 소리가 조금씩 살아나고, 세상이 가까워질수록 자취를 감춘 소음들이 민낯을 드러내며 다가온다.

  소리는 점점 소란스러워진다. 고속도로가 보이면서 소리의 세상으로 변한다. 골짜기로 들 때 들려오던 소리보다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다. 듣고 넘길 만하다. 모든 것을 평화롭게 하던 골짜기가 세상 속진에 너그러울 수 있는 아량을 준 건지도 모르겠다.

  골짜기를 나와 들길을 걸어 집으로 간다. 집에 들면 앓고 있는 병과 다시 마주해야 하고, 그것에 이기기 위해 약을 먹고 허리 보호대를 다잡아 챙겨야 할 것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나누어질 것이고. 행복과 불행이 갈라질 것이다.

  괜찮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하지 않았는가. 영원하다는 말이다. 나무며 풀이며 벌레며 짐승이며 물과 바람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그 모성의 품도 영원할 것이다. 고락이 나누어지고, 행불행이 갈라질 때면 나도 한 마리 짐승이 되어 그 영원의 품으로 들면 된다.

  아침이면 찾아오는 이가 나의 골짜기다. 나의 병구를 안아주는 집 안의 골짜기다. 내일도 강둑을 지나 골짜기로 들 것이다. 고요가 모든 것을 보듬어주는 골짜기, 내 세상의 골짜기다. 골짜기는 내 가난한 행복이다. 언제 안겨도 포근히 맞아줄 행복을 찾아간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2024.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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