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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에 대하여

고장에 대하여 세월은 나를 저물녘 황혼빛 속에서 홀로 고적을 안고 살아가게 만들어 놓았다.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병마를 불러들여 안겨 혼자서는 생존도 생활도 제대로 건사하기 힘들게도 했다. 세월은 그렇게 해찰을 부리지만, 세상은 그리 무정하지 않았다. 내 무슨 복덕을 지은 것도 없는데, 마치 설화 속 이야기처럼 어디서 고마운 분을 나에게로 보내주었다. 그분은 아침 한때 잠시 나를 보살펴 줄 뿐이지만, 생존의 고단을 풀어주고, 생활의 적막을 달래주기 위해 따뜻한 마음을 다해 주고 있다. 세월을 다시 돌아본다. 세월은 몸도 마음도, 그 몸과 마음을 의지하고 있는 주위의 모든 것도 이냥 그대로 두는 법이 없다. 모든 것을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도 하지만, 또 모든 것을 허물고 없애버리기도 한다. 그게 ..

청우헌수필 2026.02.16

시 낭송 애호가와 시 낭송가

시 낭송 애호가와 시 낭송가 시 낭송은 지금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국적으로 시 낭송 강좌며 각종 행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현상은 나라 경제 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예술과 문화에 대한 욕구와 인식의 정도가 고양된 결과로 볼 수도 있고, ‘K-컬쳐’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현상과도 무관치 않을 것 같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로 시 낭송 콘서트며 경연대회가 성황리에 열리고 있고, 낭송하는 사람과 낭송을 즐기는 사람들도 계속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특히 경북 지역에서는 학교 교육의 필수 과정으로 되어 있는 프랑스의 시 낭송 교육을 모델로 한 경상북도교육청 임종식 교육감의 ‘시詩울림학교’ 교육 시책도 큰 동력이 되고 있다. 초중등 학교 교육에서는 물론, 교육청 관할 각..

청우헌수필 2026.02.03

이경종 선생의 바다

이경종 선생의 바다 “……집채 같은 파도가 손바닥만 한 배를 덮치는 순간 배는 맥없이 기우뚱했고 56명의 승객은 ‘아!’ 하고 비명과 함께 차가운 바닷속으로 던져졌다. ‘살려줘요!’ 하는 절규와 함께 허우적거리던 어린이, 부녀자들이 순식간에 파도 속에 묻혔다. 배는 산산조각이 나고 시체는 영하 5도의 차가운 바다 위에 떠올랐다. 마중 나왔던 가족들은 빤히 보이는 참변 모습에 발을 동동 구르며 통곡했다.……” 1976년 1월 17일 울릉도 북쪽 천부항에서 만덕호가 참혹하게 침몰하는 모습을 신문 기사(1976.1.19. 동아일보)는 이렇게 시작했다. 결국, 그 배에 타고 있던 37명은 시체로 떠 오르거나 영원한 실종자가 되어 바다의 혼이 되어야 했고, 19명만이 살아나올 수 있었다. 그 배에 천부초등..

청우헌수필 2026.01.28

이경종 선생의 목소리

이경종 선생의 목소리 이경종 선생은 울릉도 북쪽 천부초등학교 교사였다. 지금부터 50년 전 1976년 1월 17일 천부항에서 배가 난파되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선생은 재빠르게 목판을 잡고 뭍을 향하려던 순간, 제자 둘이 탈진 상태로 허우적대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몸을 돌려 가까스로 두 아이를 끌어당겨 함께 파도를 헤치기 위해 사투를 벌였지만, 파도 폭발을 이기지 못해 모두 물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선생은 35세, 교직의 창창한 꿈을 그리던 청년 교사 시절이었다. 그 후 그의 아름다운 인간애를 추앙하는 사람들에 의해 상과 훈장이 수여되고 순직비가 세워졌다. 해마다 그날이 오면 빗돌 앞에 제수를 차리고 꽃을 바치며 2백5십만 년 전 화산섬 울릉도를 흘러내린 용암보다 더 뜨거웠던 그 열정 어..

청우헌수필 2026.01.21

산바람 강바람과 안성기

산바람 강바람과 안성기 안성기 배우가 향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영화에 문외한이 되어버린 지 오래되어 영화에 관해서는 관심도 지식도 별로 없지만, 배우 ‘안성기’ 하면 꼭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어느 영화에선가 그가 「산바람 강바람」이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다. 내가 초등학교(국민학교) 시절이었으니 60년도 훨씬 더 전이다. 어느 조그마한 극장에서 흑백 영화로 본 기억이 아련한데, 안성기 말고는 영화 제목도, 출연 배우도, 줄거리도 다 잊어버렸다. 그 장면 하나만 남아 안성기 이름만 나오면 그 장면이 떠올랐다. 다른 장면이며 줄거리가 기억 안 나면, 노래 그대로 산을 뛰어다니거나 강물을 쫓아다니며 노는 장면 속에서 부른 노래였을까, 그런 청량하고 순정한 장면들을 마음대로 ..

청우헌수필 2026.01.12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파이브, 포, 쓰리, 투. 원 제로-” “공모가 55,000 현재가 61,600” 팡파르가 울리면서 거래소의 커다란 스크린에 숫자가 큼지막하게 떴다. 장내는 우렁찬 박수와 함성으로 터져 올랐다. 이李 대표 회사가 비로소 주식을 상장上場하는 날이다. 장내에는 주식 상장에 관계된 많은 인사며 관계자들이 모여 있고, 중앙에는 식장이 스텐딩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식전 행사로 이 대표가 증권회사 대표들에게 제품 설명해 나갔다. 세계 최초의 상·하·좌·우 90도 다관절 복강경 수술 기구의 성능과 제작 과정을 소개했다. 듣는 이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관심 깊게 듣고 보고 있었다. 식이 시작되면서 내빈 소개에 이어 회사와 제품을 안내하는 홍보 영상이 상영되고, 이어서 증권회사 대표와 이 대표가 ..

청우헌수필 2026.01.03

기다림에 대하여(8)

기다림에 대하여(8) 시골 버스는 승강장에 도착하는 시각이 제 도착 시각이고, 출발하는 시각이 제 출발 시각이다. 승강장마다 행선지와 출발 시각을 안내하는 표지가 붙어있지만, 어디까지나 참고용일 뿐이다. 승객들은 곁눈질로 슬쩍 한번 보면 된다. 지켜지지도 않을, 이런 쓸모없는 것을 왜 붙여 놓았을까. 붙여 놓았으면 지켜야 할 게 아닌가. 시골살이가 참 힘들구나, 하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에 비하면 도시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려 타는 것은 얼마나 편리한가. 버스 노선 번호별로 경유지, 목적지가 상세하게 안내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몇 분 후에는 차가 도착할 것이며, 지금은 어디쯤 오고 있다는 전광판 안내에 이어, 이제는 전 승강장을 통과하여 곧 도착할 것이라는 여성 목소리 안내 방송이 나..

청우헌수필 2025.12.21

자기 자비에 대하여

자기 자비에 대하여 무엇을 해도, 어디에 있어도 무언가 마음 한쪽이 비어 있는 것 같다. 그 빈 마음은 책을 읽는 데도 집중을 못 하게 할 때도 있고. 무얼 먹어도 속이 차지 않게 할 때도 있다. 이 빈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 생애의 막을 내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지도 십수 년이 흘렀다. 한 생애가 막을 내렸다는 것은 지난했던 생애의 한 업에서 놓여났다는 것이다. 한동안 그 해방감을 만끽하며 지냈다. 별세계를 사는 것 같았다. 그 별세계도 한 해 두 해를 살다 보니 보통의 세계, 일상의 삶의 되어갔다. 그런데 그 일상에는 무언가 하나 있어야 할 게 비어 있는 것 같아 허전했다. 그렇다고, 그전 생애의 세계가 그립거나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한때는 시 낭송을 즐겨 하여 동호인들과 함..

청우헌수필 2025.12.11

건망에 대하여

건망에 대하여 오래 사귄 친구 이름이 한동안 기억나지 않다가 어느 날 문득 이름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보다 더 민망한 일은 아는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이름이 통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물어보면 실례가 되거나 실망을 줄 것 같아 물어보지도 못하고 아주 답답했던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을 하리라 하고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는 순간 잊어버렸다. 내가 무슨 일을 하려 했더라? 한참을 궁리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욕실에 가서 무엇을 하리라 하고 방에서 욕실로 갔는데, 순간 내가 왜 여기 왔지? 어처구니없는 의문에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어떤 글을 읽다가 ‘엄살’. ‘다혈질’이라는 말을 떠올려야 하는데, ‘응석’ ‘어리광’, ‘고혈질’, ‘고혈압’과 같은 얼토당토않은 말만 맴돌고, 그 말이 도무지 기억..

청우헌수필 2025.11.30

희망에 대하여

희망에 대하여 오늘도 강둑길을 걷는다. 날마다 걷는 나의 산책길이다. 강둑 바깥쪽으로는 들판과 마을이 펼쳐지고, 마을 주위로는 산이 새 날개처럼 둘러 서 있다. 강둑 안쪽으로는 길을 따라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강에는 윤슬을 실은 강물이 흐른다. 사시장철 변함없는 풍경들이다. 아니다. 그 풍경이 한 시도 같은 적이 없다. 들판도 산도 달마다 철마다 모양이며 빛깔을 바꾸어 나가고 있다. 강둑 벚나무도 철을 맞추어 쉼 없이 몸을 고쳐 가고, 물도 흐르는 자리 따라 몸짓을 달리해 간다. 이렇게 피고 지고 흘러가는 것이라고, 그저 무심히 흐르는 것이기만 하랴. 사나운 폭풍우를 만나기라도 하면 지녔던 모습들이 일거에 깨어지는 상처와 고통 앞에 서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을 다시 다스리지 않으면 안 ..

청우헌수필 2025.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