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배 246

십칠 년밖에

십칠 년밖에 이 일 배 해가 바뀌었다. 권 선배가 말했다. “이제 나는 십칠 년밖에 못 산다네요!” 권 선배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위이시지만, 막역한 술벗이다. “누가 그럽디까?!” “요새 백세 시대라잖아요! 하하” 그러고 보니 권 선배께서는 올해 여든셋이 되셨다. “그러면 저는 십칠 년 후에는 누구와 술벗을 하란 말입니까? 하하” “그걸 난들 어찌 알겠소! 하하” 하기야 누가 감히 앞일을 알 수 있을까. 어쩌면 권 선배는 이승에서는 나의 선배시지만, 세상을 바꿀 때는 누가 선배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선배의 여명 십칠 년! 내가 이 한촌을 찾아와 산 걸 돌이켜보면 십칠 년도 잠깐이다. 바로 십칠 년 전 이 땅을 처음 디뎠다. 공직 발령을 따라 그해 초봄 이 궁벽한 산촌을 찾아왔었다. 둘러봐도 사방..

청우헌수필 2022.02.08

가야 할 때가

가야 할 때가 협회를 물러나겠다고 했다. 회가 창립된 지 11년 만이다. 회장님과 나는 지역 문협의 시 낭송회에서 전문 낭송가와 지역 인사 초청 출연자로 만났다. 연배는 십여 년 차가 났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 낭송에 관한 관심이 서로 통했다. 당시 지역에는 시 낭송으로 뜻을 같이할 수 있는 동호인 모임이 없었다. 우리가 만들어 보자 했다. 알음알음 물색하여 십여 명을 모았다. 회장님이 회원들 낭송 지도와 함께 회 운영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면, 나는 그 운영을 뒷받침하며 회를 이끌어 나가자고 했다. 회를 발기한 우리 두 사람은 회원들의 선임에 따라 회장과 자문위원을 나누어 맡기로 하고, 젊어 패기도 있으면서 낭송 활동에 의욕도 있는 한 회원에게 실무를 맡겼다. ‘○○낭송가협회’라는 이름으로 출발을..

청우헌수필 2022.01.29

외로움과 고독

외로움과 고독 이 일 배 좋아서 찾아와 살고 있으니 타향 아닌 애향이라 해야 할까. 한 생애를 정리하고 티끌세상을 떠나 이 한촌에 와 산 지 강산이 변하는 한 세월을 성큼 넘어섰다. 그 세월 그런대로 잘 껴안고 살고 있다 싶으면서도, 두고 온 사람들이며 그 바깥세상의 그림자는 곁을 떠나지 않는다. 눈을 들어 창밖을 보면 어딜 봐도 사방 모두 우람한 산이다. 인가 몇 채에 텅 빈 들판, 벚나무가 늘어선 강둑도 보이지만, 적막하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날고 그 아래로 간혹 나는 새가 보일 뿐 정물화 같은 풍경이다. 지난날의 사람들이 그립다. 그는,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따금 달려가거나 불러서 차라도 술잔이라도 함께 나누고 싶다. 이 넓은 세상에 사람이라곤 오직 나 하나뿐인 것 같다. 혼자서 ..

청우헌수필 2022.01.10

끈 이 일 배 사람들은 모두 끈을 부여잡고 산다. 그 끈은 하늘이 천연으로 내려주기도 하지만, 그 하나를 얻기 위하여 온갖 공을 다 모으기도 한다. 하늘이 내려준 끈도 귀하지만, 공을 모은 끝에 얻은 끈이 더 귀할 수도 있다. 끈을 힘주어 잡고 있다 보면 뜻하지 않게 놓치거나 끊어지기도 하고, 놓치고 끊어진 것을 다시 잡고 잇기 위하여 갖은 애를 쓰기도 한다. 끈이 없으면 살 수가 없을 수도 있고, 살더라도 편안하게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친구가 있었다. 같은 직장은 아니었지만, 같은 직업, 직위를 가지고 가끔씩 만나 마음을 나누다 보니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같은 곳에 같은 볼일을 보러 갈 때는 함께 차를 타고 다니며 많은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일 처리 방법을 함께 궁리하며 서로 의견을 주..

청우헌수필 2021.12.28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이 일 배 나에게 언제 죽음이 와도 기꺼이 맞이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살 만큼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이제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나 갚아야 할 빚이 별로 없는 홀가분함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특별히 무슨 깨달음을 얻어 죽음 앞에서 유달리 초연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풀도 나무도 짐승도 사람도, 목숨을 가진 모든 것들이란 태어남이 있듯이 죽음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는 평범한 상념에서일 뿐이다. 죽지 않고 살아 있기만 해서도 안 되고, 그런 일이란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철이 되면 미련 없이 가지를 떠나는 나뭇잎처럼 나도 그렇게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그래서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는 것도 쓰면서 죽음에게 순순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정말 ..

청우헌수필 2021.12.15

나무의 철

나무의 철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어제 그 산길로 어제 그 나무를 보며 산을 오른다. 아니다. 어제 그 길이 아니고 그 나무가 아니다. 나무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가만히 보면 어제 그 잎이 아니고 그 가지가 아니다. 길도 그 길이 아니다. 모양도 바뀌어 가고 색깔도 달라지고 있다. 잎이 어느 때는 실눈 속의 눈썹 같았다가, 어느 때는 아기 손톱만 했다가, 언제는 엄지손톱처럼 자랐다가, 손바닥만큼 넓적해지기도 한다. 파르스름한 가지가 조금씩 굵어지다가 팔뚝만 하게 커서 흑갈색을 띠고 있다. 그 가지의 잎들이 한창 푸르러지는가 싶더니 노랗고 붉은 물이 들었다가 말라 들면서 떨어져 땅으로 내린다. 땅은 잎을 싸안아 차곡차곡 재었다가 제 살 속으로 스며들게 한다. 나무들의 거름이 되게 하여 나무를 ..

청우헌수필 2021.11.24

산의 얼굴

산의 얼굴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늠름하고, 산자락에 안긴 나무들은 언제 보아도 생기롭다. 나무는 늘 몸을 바꾸어 가면서 생기를 돋우어 간다. 지금은 한껏 푸르던 시절을 조금씩 넘어서고 있지만, 그렇다고 생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생기’란 무엇인가. 싱싱하고 힘찬 기운이기도 하지만, 바로 ‘생명 활동’이 아니던가. 더없이 무성했던 저 나무의 잎새들은 노랗고 빨간 물로 치장하다가 된바람 불어오면 또 하나의 제자리인 땅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나무는 맨 가지만 남아 설한풍을 이겨 내야 하지만, 그때야말로 나무에게는 새로운 삶을 위한 부푼 꿈의 시간이다. 잎새가 내려앉은 땅이란 무엇이고 어디인가. 산이고 그 살갗이다. 나뭇잎은 산의 살갗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하늘 맑고 물길..

청우헌수필 2021.10.13

어느 무덤

어느 무덤 이 일 배 어느 날 산을 오르는데 나란히 자리 잡은 두 무덤이 보였다. 어느 산에나 무덤은 많이 있고, 내외가 나란히 누운 쌍분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그날 본 그 무덤이 뇌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죽죽 뻗은 소나무 숲속 비탈에 땅을 잘 골라 봉분도 반듯하고 둥그스름하게 잘 다듬어 놓았다. 크기도 작지 않은 묘가 보존도 잘 되어 있고, 마른 잔디 위에 솔잎들이 정갈하게 덮여 있었다. 잡풀도 많이 나 있지 않아 말끔해 보이기까지 했다. 산소를 쓸 때만 해도 후손들이 범절을 고루 갖추어 조상을 잘 모시려고 애쓴 것 같다. 봉도 보기 좋게 짓고 주변도 잘 정리해 놓았다. 제법 지체 있는 집안의 산소에 후손들도 다 덩실할 것 같았다. 봉분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로 보면 ..

청우헌수필 2021.09.22

미술관으로 탈출하다

미술관으로 탈출하다 이 일 배 “우리 일 한번 저질러 봅시다.” 같이 막걸릿잔을 들던 권 회장께서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도 답답해서 사지가 비틀릴 것 같다고 했다. 무슨 일을 저지를까 하니 ‘이건희 컬렉션’을 보러 가자 했다. 뜻밖이다. 권 회장께서 미술에 소질이나 조예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나도 마찬가지여서 미술로 주담을 삼아 본 적조차도 없다. “그냥 탈출해보는 거지요! 하하” 함께 웃었다. 「코로나19」는 많은 것을 묶어놓았다.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고, 만나서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석 달마다 한 번씩 가던 문화유적 답사도 못 한 지가 이태가 다 되어 간다. 견문이라도 좀 넓히고 살자면서 지역 사람들로 모임을 지어 명승 고적을 찾아다닌 지 십 년이 넘었다. ..

청우헌수필 2021.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