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가요무대』를 보며

이청산 2023. 8. 10. 15:18

가요무대를 보며

 

  『가요무대』는 많은 시청자로부터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아주 오래된 정통 가요 프로그램이다. 무대를 통해 방송하는 가요들은 애틋한 추억에도 빠져들게 하고, 가슴 뭉클한 향수에도 젖게 하고, 사무치는 그리움에 에어지게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어깨 절로 들썩이게 하는 흥겨운 가락으로 시름을 씻어주기도 한다.

  그런 가요를 들으며 사람들은 흘러간 날의 추억과 사람, 그 그리움에 젖어 보기도 하고, 마치 그리운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환영에 싸여 보기도 한다. 학창시절로 돌아가 풋풋한 친구들과의 우정 놀이에 빠져 보기도 하고, 첫사랑의 그림자에 아늑히 안겨 보기도 한다. 손뼉으로 함께 흥을 맞추며 살이의 고달픔을 잊어 보기도 한다.

  『가요무대』는 그런 노래만 고른다. 그렇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잊고 살던 아름다운 일들을 떠올리게도 하고, 우울에 잠겨 있던 마음을 은근하고도 흥겨운 가락으로 달래주기도 하고, 다가올 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게도 해준다. 그런 노래들을 모아 들려주려고 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그 『가요무대』가 오늘은 왜 이리 부담스럽기만 한가. 어떤 노래가 나와도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려 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 산 날들의 굴절된 기억을 긁어내는 것 같고, 위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산산조각으로 무너뜨리는 것 같고, 흥을 돋우어 주는 것이 아니라 어지러운 심정을 더 어지럽게 비트는 것 같기만 하다.

  아무리 아름답고 흥겨운 가락도 저들만의 한바탕 걸판진 놀이일 뿐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고, 템포가 빠르거나 느리거나 가락이 애절하거나 흥에 겹거나 나는 그런 것에서 점점 소외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노래들을 내가 왜 듣고 있어야 하는가. 꺼버린다. 눈을 감는다. 더욱 깊숙이 따돌려지는 것 같다.

  아내가 집을 떠난 지 달포가 넘은 어느 월요일 밤, 누워서 『가요무대』를 보다가 몇 곡 못 들어서 꺼버렸다. ‘전국 가요 기행’을 한다고? 그래서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을 찍고 임을 찾아간다고.? 서울 종로에다 사과나무를 심는다고? 거리마다 푸른 꿈이 넘친다고.? 아내는 지금 병상에 있는데, 무슨 꿈이 넘친다는 말인가!

  장충단 공원 안개 속으로 누구를 찾아와? 신사동 그 사람이 어떻다고? 아이들의 손길을 힘들게 부여잡고 환우 속을 헤매고 있는 아내를 저들이 알까. 알면서 이런 노래들을 부를 수 있을까. 그렇구나. 세상은, 그 속의 인심은 나와는 아무 상관 없이 돌아가고 있구나. 이 노래들이 이렇게 사람을 고단하게 하는구나.

  병원의 기계들은 아내의 환부를 딱 잘라 짚어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아내는 자꾸 여위어져 가고 있다. 몸도 마음도 움직임이 점점 어려워져 간단다. 모두 내 탓이다. 우리는 서로 보듬기 어려운 삶을 살아온 것 같다. 내가 가진 세계를 아내는 껴안기가 어려웠고, 아내의 심사를 받아들이는 일에 나는 적극적이지 못했다.

  오늘도 아내는 남매 아이들의 손길 속에 누워 있다. 내가 아내에게 좀 더 따뜻하게 손과 가슴을 내밀었더라면, 아내가 아이들의 손길을 받고 있어야 할까. 나는 지금까지 아수라도의 세상을 살아온 것 같다. 아니, 내가 아내를 아수라도 속을 살게 한 것 같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 고통이 아내의 병통이 되게 한 것 같다.

  이제부터는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며, 당신의 마음 모두를 내 마음으로 만들며 살겠노라는 내 간곡한 말은 지옥도, 축생도에서 지르는 내 애절한 비명일지도 모르겠다. 나의 이기적인 집착과 무정이 아수라의 세계, 지옥의 세계를 만들고, 내가 만든 그 세계에 아내도 빠져 아귀도 같은 삶을 살아온 건 아닐지 모르겠다.

  『가요무대』가 무슨 죄랴. 내가 만든 세계가 마음을 아수라로, 지옥으로 빠뜨리니, 그 아름다운 노래들조차 비명처럼, 비소처럼 들렸을 뿐인 것을-. 나는 지금 이승에서 육도윤회六道輪廻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나는 삼악도三惡道 속을 헤매고 있는가. 그 속을 어찌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아내여, 마음 편히 해주오. 때늦긴 하오만은 내 모든 집착과 이기를 버리고 청정해지려 하오. 청정해질 것이요. 돌아오시오. 와서 보아야 청정해지려 애쓰는, 청정해진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니오? 지금 나는 당신이 비워 놓은 자리를 닦고 있소. 있는 힘을 다해 정결히 닦고 있소. 내 마음도 함께 자성을 다해 닦고 있소. 부디 속히 돌아오시오.

  돌아와 즐거운 『가요무대』 함께 들읍시다. 같이 손뼉도 쳐봅시다. ♣(202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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