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를 버린 자리로

이청산 2023. 7. 25. 21:59

나를 버린 자리로

 

  고적한 한촌 생활 속에서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 나들이는 적막을 활기롭게 넘어설 수 있는 아늑한 기쁨이요, 힘줄 돋는 활력소가 되고 있다.

  나의 금요일은 만남의 날이다. 오전에 집을 나서 버스를 타고 구미로 가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도서관 수필반 회원들을 만난다. 희로애락의 사연들을 담은 수필을 함께 읽으며 문학과 삶을 이야기하며 한껏 희열에 젖는다.

  그 시간이 끝나면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대구로 간다. 친구들과 정겨운 술잔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번 정기적으로, 아니면 수시 연락을 통해 만나는 친구들은 먼 곳에 사는 나를 배려하여 그 만남의 약속을 나에게 맞추어 준다.

  오늘도 공부를 끝내고 터미널로 나와 대구행 버스를 기다린다. 버스를 타는 재미도 쏠쏠하다. 일단 차를 타면 그 차 속은 잠을 자든 책을 읽든 사색에 들든 나의 무한 자유 공간이다. 음주 운전의 위험도 전혀 없다. 얼마나 편하고도 편리한 행보인가.

  내가 기다리는 차는 청주에서부터 출발하여 온다는 5시 차다. 구미에서 시발하는 520분 차도 있지만, 잠시라도 빨리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늘 5시 표를 산다. 이 무슨 변고인가. 5시면 구미에서 출발해야 할 차가 도중에 사고가 있어서 30분 정도 연착한단다.

  속이 상했다. 차라리 520분 표를 사기보다 못하지 않은가. 먼 데서 오는 차라 몇 분쯤 연착할 때는 있었지만, 무려 반 시간이나 연착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다가오는 약속 시각이 초조를 회오리치게 한다. 차가 도착하면 기사에게 따져 보기라도 해야 할까.

  드디어 차가 도착했다. 내가 타면 앞서 탄 승객이 기사에게 따지고 있을 것이다. 차를 탔다. 잠잠했다. 무어라 하는 사람이 이상하게도 아무도 없다. 정시에 타고 예사롭게 가는 승객들처럼 모두가 묵묵했다. 속을 상해했던 내가 오히려 이상한 건가.

  그랬구나, 모두 기사의 사정을 이해들 하고 있구나. 기사인들 연착하고 싶어 했을까. 불가항력적이다 보니 그리되었을 것이다. 아니, 기다리는 승객을 생각하면 기사도 마음이 편안했을까. 그 마음조차 사람들이 잘 헤아리고 있는 모양이다.

  요즘 세계 일도, 나랏일도, 사회 일도 참 시끄럽다. 서로의 사정은 내쳐버린 채 전쟁을 일으키고, 정쟁을 일삼고, 살벌하게 다투고 있다. 이 모든 일이 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모두 내가 탄 버스 승객들의 마음 같다면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지금 아내는 병고 속을 힘겹게 헤매고 있다. 반세기 가까운 생애를 함께 살아오는 사이에 아내 속을 참 많이 썩였다. 지금 아내의 병이 모두 나 때문에 생긴 것 같다. 아내의 마음을 잘 안아주고 보듬어 주었더라면, 아내가 이런 고통을 겪을까.

  아내와 나는 상념의 세계가 너무 다른 것 같았다. 이상이 맞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서로 그려지는 세계가 다르기에 십상이었고, 다정하게 대화하기보다는 다투기가 쉬웠다. 그게 오랜 세월 쌓여 오는 사이에 화가 되고 병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차를 타고 가며 아내를 생각한다. 왜 한발 물러서지를 못했던가. 왜 먼저 포용의 가슴을 내밀지 않았던가. 왜 욕심을 줄이지 못했던가. 물러선 발길 속에, 내민 가슴 속에, 줄인 욕심 속에 왜 아내를 담지 못했던가.

  내가 모르고 살던 것을, 아니 알려 애써보기도 별로 하지 않았던 것을 이 차 안에서 새삼스럽게 발견한다. 그리 연착된 차 시각도 이해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것을, 마음을 열어버리면 속에 다 들어오게 되는 것을.

  기사에게도 제힘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듯, 아내에게도 자기만의 세계가 있고,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 아내를 이 승객들 마음으로 대했다면, 그렇게 안아주었다면 아내 가슴 속에 그리 화가 맺혔을까. 그리 병이 되었을까.

  아내여, 어서 일상으로 돌아오오. 이제 모든 것을 품으리다. 당신의 모든 것을 받아 안으리다. 그동안은 내가 너무 편협하고 옹졸했소, 이 때늦은 뉘우침이 당신을 돌아오게 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되겠소만, 이 정은 내치지 말아주오.

  “자기를 버리기에 자기가 있게 되니, 사사로움이 없기에 나를 능히 이룰 수 있지 않으랴.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老子 道德經7)라는 말은 읽으면서도 얄팍한 가슴으로만 읽었던 이 올곧잖은 일을 너그러이 품어주기를 간곡히 바라오.

  차는 지급 계속 달리고 있소, 자기 속을 버린 그 묵묵한 승객들과 함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소, 좀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요, 어쩌면 나를 비운 사람이 되어 내릴 나의 목적지일지도 모르겠소. 나를 버린 곳에 앉힐 당신이 자리-.

  그곳으로 당신 어서 오오. 간절히 기다리겠소-.(202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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