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단풍이 들 때 들고

이청산 2023. 11. 7. 15:18

단풍이 들 때 들고

 

  오늘도 해거름 산을 오른다. 해거름 삶에서 해거름 산 오르기는 편안한 일체감을 주는 것 같아 걸음이 한결 아늑하게 느껴진다. 내 이 오랜 산행에는 늘 두 가지 기대와 목적을 품고 있다. 하나는 실용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정서적인 것이다.

  산을 오르고 내리는 사이에 내 고질인 고혈압, 고혈당이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 산행의 덕이라 믿고 있다. 산을 걷다 보면 아프고 서러운 마음도 물 흐르듯 씻기는 것 같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념들도 하나같이 단순해지는 것 같다.

  이만하면 몸과 마음의 그 실용적, 정서적 기대와 목적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충족을 즐거워하며 오늘도 가벼운 걸음으로 산을 오른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오래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곱게 죽기 위해서라며 늘 나 자신에게 말해주곤 한다.

  낙엽이 발아래서 바스락거린다. 산에 단풍 빛이 비치는가 싶더니, 어느새 내려앉은 잎새들이 산을 정겹게 덮고 있다. 모두 들 빛이 들었다가 떨어져야 할 때 떨어져 제 자리들을 편안하게 잡아가고 있다.

  세상에서는, 단풍 절정기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풍경이 예년만 못 하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단풍 빛이 덜 들었거나 여전히 녹색을 떨치지 못한 나무가 많다는 것이다. 온난화 여파로 ‘여름과 가을 사이’ 날씨가 이어지면서 단풍이 제때 제 색깔을 못 찾았다 한다.

  올해는 더위의 기간이 길어져 광합성을 멈출 때를 놓쳐버린 탓이라 한다. 견뎌내기 힘들지라도 더울 때는 더워져야 하고 추울 때는 추워져야 한다. 잎이 싱그럽게 피어날 때는 피어나야 하고, 물들 때는 들었다가 질 때는 져야 한다. 그게 자연의 순리지 않은가.

  우리의 삶은 그 순리를 잘 따르고 있는가. 피어야 할 때는 잘 피어나다가 질 때는 곱게 져가고 있는가. 자연의 순리를 어그러지게 만드는 이상기후 현상이라는 게 자연이 지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이고 보면, 사람들의 삶이 순리를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쉼 없는 걸음으로 산을 오른다. 어찌하였거나 물들 잎은 물들어가고 떨어질 잎은 떨어지고 있다. 진 잎은 흙에 몸을 붙였다가 언젠가는 그 흙 속으로 들 것이다. 저 나무 저 잎새들 다 지고 나면 맨살의 청정한 몸으로 다시 새로운 푸름을 돋우어 낼 것이다. 

넘어가던 해가 나뭇가지 사이로 붉은 노을을 뿌리고 있다. 환히 밝힌 아침을 딛고 중천에 올라 세상을 한껏 안아 보기도 하다가 조금씩 내려앉아 내일 아침을 기약하며 저리 고운 노을을 뿌리며 져가고 있다.

  저 노을 보니 내일도 아주 맑을 것 같다. 속담에도 ‘저녁노을은 맑음, 아침노을은 비’라 했고, 예수도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라 했다지 않은가.

  살다 보면 반듯한 날도 어그러진 날도 있고, 외로운 날도 고독한 날도 있고, 사랑의 날도 미움의 날도 있을 수 있다. 모두 나의 날이 아니던가. 그런 날들을 안아 보기도 하고 내쳐보기도 하는 사이에 세월은 흘러가고 있다.

  그 세월 속을 살아오면서 나에게도 저 나무들의 생애처럼 싱그런 푸름의 시절도 있었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시절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어찌 있을까. 나에게 지금 그 시절은 아득한 전설로 흘러가 있는 것 같다.

  오늘 해거름 산을 오르며 보는 붉은 하늘이며, 그 빛 속에 서 있는 나무며, 붉고 노란 물이 들어 떨어지는 잎새들이 마치 내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것 같다. 오늘의 내 모습을 비춰주기 위해 저 해 저리 붉은 기운을 뿜어 하늘을 물들이고 저 잎새 저리 떨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렇구나. 이제 나에겐 떨어질 일밖에 남지 않았구나. 저 잎새 편안한 자리로 내려앉듯 나도 그런 자리를 보듬을 일밖에 없는 것 같구나. 미련은 없다. 잎도 단풍이 들 때 들고 떨어져야 할 때 떨어져야 하듯이 내 삶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 아닌가.

  나의 오늘도 저 하늘빛과 같은 선홍빛 고운 저녁노을이고 싶다. 그냥 말라가지 않는 선연한 빛깔의 잎새이고 싶다. 그리만 된다면, 언제 져도 더 상관할 일 없고. 어떤 자리에 앉아도 더 그리울 게 없을 것 같다.

  맑고 고운 노을을 뿌리던 해가 산마루에 고즈넉이 내려앉는다. 노을이 고우면 아침이 맑다지 않은가. 내 삶도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떨어져 내려앉다가 보면 내생 또한 맑지 않으랴.

  저 하늘빛이 나의 빛이 되기를, 저 잎새 자리가 나의 자리가 되기를, 그 원 발길 속에 쟁여 담으며 아늑한 걸음걸음으로 저무는 산을 내린다. 그윽한 술 한잔하고 싶다. ♣(202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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