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배 267

미술관으로 탈출하다

미술관으로 탈출하다 이 일 배 “우리 일 한번 저질러 봅시다.” 같이 막걸릿잔을 들던 권 회장께서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도 답답해서 사지가 비틀릴 것 같다고 했다. 무슨 일을 저지를까 하니 ‘이건희 컬렉션’을 보러 가자 했다. 뜻밖이다. 권 회장께서 미술에 소질이나 조예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나도 마찬가지여서 미술로 주담을 삼아 본 적조차도 없다. “그냥 탈출해보는 거지요! 하하” 함께 웃었다. 「코로나19」는 많은 것을 묶어놓았다.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고, 만나서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석 달마다 한 번씩 가던 문화유적 답사도 못 한 지가 이태가 다 되어 간다. 견문이라도 좀 넓히고 살자면서 지역 사람들로 모임을 지어 명승 고적을 찾아다닌 지 십 년이 넘었다. ..

청우헌수필 2021.09.08

산은 방이다

산은 방이다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녹음이 한창 무성하다. 커다란 나무는 커다란 대로, 조그만 나무는 조그만 대로 저마다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내리쬐는 햇볕 햇살이 뜨겁고 세찰수록 그늘은 더욱 후덕해진다. 산을 오르다가 우거진 나무 아래 그늘을 두르고 앉아 땀을 긋는다. 길고도 억센 잎이 빽빽이 모여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바람이 지날 때는 잎사귀가 그 바람을 부드럽게 재워 땅 위로 뿌려준다. 저 무슨 소리인가. 경쾌한 새소리 벌레 소리를 따라 나뭇잎이 춤을 춘다. 무슨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기도 하고, 먼 곳 어디 그리던 소식을 전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서 날아오는 향기일까. 나긋한 꽃 내음 같기도 하고, 풋풋한 풀 내음 같기도 하다. 나무 그늘은 반갑고 향긋한 저네들 세상 소식을 넌..

청우헌수필 2021.08.26

산, 몸을 찾아서

산, 몸을 찾아서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걷는다. 무성히 우거진 숲의 그늘이 몸을 아늑하게 한다. 불같이 쨍쨍거리던 햇살도 숲에 닿으면 양순한 그늘이 되고 만다. 산은 언제나 싱그럽다. 숲이 있기 때문이다. 산은 언제나 아늑하다. 숲의 그늘이 있기 때문이다. 산에서는 흘리는 땀은 청량하다. 산의 땀은 몸을 새 깃처럼 가볍게 한다. 몸만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다. 몸 따라 마음도 가벼워진다. 가벼워지는 몸속으로 숲의 푸름이 스며든다. 푸름은 몸속으로 신선하게 가라앉는다. 푸름이 침윤한 몸속에는 아무것도 들 수가 없다. 세상의 어떤 호사도, 이해도, 상념도, 이념도 감히 자리를 넘볼 수 없다. 속된 근심 걱정거리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 하찮은 것들이 어찌 이 푸름의 성역으로 들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처음 ..

청우헌수필 2021.07.24

엉겅퀴 사연

엉겅퀴 사연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녹음이 무성하다. 수풀이 우거진 어귀 오솔길을 오르는데 무엇이 바짓가랑이를 찌르듯이 잡는다. 놀라 돌아보니 엉겅퀴다. 날마다 걷는 길인데 오늘 나를 잡을까. 이제 비로소 꽃을 피웠노라며 저를 봐달라는 말인가.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꽃이 수술일지 꽃잎일지 모를 가시를 뾰족뾰족 뽑아 올리며 함초롬히 피어 있다. 붉은빛, 분홍빛, 자줏빛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송이를 이루고, 흰색으로 뻗어 올린 피침 하나하나에 붉은빛을 감고 있다. 줄기에도 잎에도 잔털이 송송 나 있고, 잎은 양쪽으로 깊게 갈라지면서 끝에 뾰족한 가시를 달고 있다. 그 가시가 나를 잡은 것이다. 꽃의 빛깔이며 생김새도, 가시가 나 있는 잎이며 줄기도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

청우헌수필 2021.06.23

모두 다 꽃이야

모두 다 꽃이야 이 일 배 내가 보는 풀꽃마다 보내 달라고 했다. 아침마다 늘 풀꽃 길을 걷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길에서 만나는 꽃들을 날려 보냈다. ‘참 예뻐요!’, ‘너무 곱게 피었네요~!’와 같은 짧은 댓글을 보내올 뿐이지만, 그 어투에서는 꽃들을 진정으로 반기는 마음이 묻어났다. 내 산책길의 눈길은 그 마음을 좇아간다. 아침 산책길을 나선다. 두렁길도 걷고, 강둑길도 거닐고, 골짝 길도 간다. 어느 길에도 풀꽃이 없는 길은 없다. 두렁길에는 봄 내내 길을 꾸며 주던 봄까치꽃이며 꽃다지, 냉이꽃은 한철을 지나가고, 누운주름잎만이 가는 봄을 지키려 하고 있다. 그것들은 벌써 이 강산 봄소식이 되어 날아간 지 한참 되었다. 오늘은 뭐 새로운 게 없을까, 어쩌면 오늘 내가 걷는 길은 어제 보지 못..

청우헌수필 2021.06.09

나무의 사랑(2)

나무의 사랑(2)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를 보러 오른다. 산이 정겹고 아늑한 것은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없는 산이란 얼마나 황폐하고 거칠고 쓸쓸한가. 나무가 있어 산이 그립고, 산이 그리워 나무를 찾아간다. 마을에는 사람이 정을 가꾸고, 산에는 나무가 정을 가꾼다. 나무는 산을 정답게 할 뿐만 아니라, 저를 보는 이들의 가슴도 정과 위안에 젖게 한다. 나무를 보고서도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는 이가 있을까. 그런 이가 있다면 나무 탓이 아니라 세속에 깊이 찌든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나무의 숨결을 느끼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자연적 존재로서의 생태적 자아로부터 너무 먼 자리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우석제, 『나무의 수사학』)라 한 것도 나무에 젖지 못하는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세상의 ..

청우헌수필 2021.05.23

내가 사는 첫날들

내가 사는 첫날들 사십 년 넘는 세월을 두고 일기를 써 오고 있다. 오랫동안 써 오면서 한결같은 일이 하나 있다. 날마다 적는 것은 늘 내 살아온 날의 맨 끝 날이라는 것이다. 당연한 일일까. 어쨌든 나는 늘 생애의 끄트머리만 잡고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일기장의 끝에다 이따금 ‘내일은 어떻게 올까.’라고 적을 때가 있다. 오늘과 다른 날이 올까, 궁금할 때가 많다. 똑같은 날을 살아본 적이 없다. 날짜가 어제와 다를 뿐만 아니라 하늘도, 산책길의 풀꽃도 어제와 같지 않은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의 일이라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도 모두 그렇다. 날마다 얼굴 보며 나누는 아내와의 대화도 다르고, 어제와 같은 책을 읽어도 느낌이 같지 않고, 매일 걷는 ‘만 보 걷기’에서도 꼭 같..

청우헌수필 2021.05.09

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산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봄이 무르녹고 있는 산은 하루가 다르게 푸르러지고 있다. 맨 먼저 봄을 싣고 온 생강나무와 진달래는 노랗고 붉은 꽃을 내려놓고, 새잎을 수줍게 돋구어내고 있다. 겨우내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감태나무 마른 잎은 새 움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가지를 떠난다. 지난가을에 떨어진 씨앗이 땅속에 들었다가 새싹이 되어 세상으로 눈을 내미는 것도 있을 것이다. 큰 소나무 아래 조그만 소나무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작년에 혹은 재작년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고 자란 나무들은 작은 것은 작은 대로, 큰 것은 큰 대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나무들은 저마다의 모습으로 산다. 큰키나무도 있고, 떨기나무도 있다. 바늘잎나무도 있고 넓은잎나무도 있다. 늘푸른나무도 ..

청우헌수필 2021.04.19

나무의 외로움

나무의 외로움 나무는 외로움을 모른다. 외롭다거나 외롭지 않다는 걸 겪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 외로운 것인가, 혼자 있는 것이 외로운 것인가, 여럿 중에서 혼자 외따로 되는 것이 외로운 것인가. ‘혼자’라는 게 무엇인가. 그게 바로 저 아니던가. 나무는 애초에 한 알의 씨앗으로 땅에 떨어졌다. 그때부터 혼자다. 오직 흙과 물이 보듬어줄 뿐, 누가 저를 태어나게 해준다거나, 태어난 것을 자라게 해주는 손길이 따로 있지 않았다. 혼자서 싹이 트고 혼자서 세상으로 나왔다. 세상에 나와서도 혼자다. 바라볼 수 있는 건 하늘뿐이었다. 하늘을 바라면서 태양의 볕살을 쬐고 바람을 안을 뿐이었다. 뿌리에는 흙과 물이 있고, 가지에는 햇살과 바람이 있어 그것들을 의지 삼아 몸피를 불려 나갔다. 그랬다. 흙과 ..

청우헌수필 2021.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