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산을 오른다. 누구에게 산을 왜 오르느냐고 물으면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라 한다지만, 나의 답은 ‘나무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 나의‘거기’란 물론 산이다. 산은 어디보다 나무를 넉넉히 품을 줄 알기에 산의 나무가 더욱 푼푼한 것을 믿기 때문이다. 산의 나무는 걸림 없이 푼푼하다. 언제나 시원스럽고 너그럽게 보인다. 훌쩍 솟아오른 둥치며 원 없이 죽죽 뻗은 가지며 오순도순 달린 잎들이 언제 보아도 청량감을 느끼게 하고, 옥은 마음들을 너그러이 펴지게 만들어 준다. 언제나 그 변함없는 모습이 미쁘고도 듬직하다. 아니다. 나무는 사철 변한다. 한 해를 온전히 머물지 않는다. 꽃 지고 잎 피어 무성해졌다가 열매와 더불어 모든 잎들이 져 앙상한 모습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무는 사철을 그렇게 피고 지는 그 생명 작용의 순환을 결코 잊는 법이 없다. 나무는 그 천생을 절대 망각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그 모습이 변함없는 것이다. 나무에겐들 생로병사가 왜 없을까. 나무도 생명체이고 보면, 모든 생명들이 다 그러하듯 나고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나는 일이야 나무라고 왜 다르겠는가. 그러나 나무는 그 명이 다할 때까지 결코 푸름을 잊지 않는다. 어쩌면 나무는 죽을 때까지 늙지 않는지도 모른다. 또한 나무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 나무는 생사의 자리가 따로 없다. 쓰러져 누운 그 자리에서 또 나무가 되어 나지 않는가. 어느 때 어떤 모습의 나무를 보아도 변덕이 없다. 어떤 자태로 서있더라도 바라보는 마음에는 언제나 위안을 안겨준다. 나무는 보는 이를 낙망이나 우울에 빠뜨리는 일이 없다. 꽃 피어서 기쁘고 무성하여 생기롭고, 문채를 발하던 잎이 내려앉아 산을 온기롭게 하고, 잎 다 진 나목들은 맑은 정밀(靜謐)에 젖게 한다. 당신은 가을날 내려앉는 나뭇잎을 보며 상심에 젖는가. 떨어지는 잎은 슬프지 않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 내려앉을 뿐이다. 그 잎은 오히려 떨어짐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내려앉는 자리도 가지에서처럼 마땅한 제 자리임을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잎은 목숨이 져가는 것을 슬퍼하는 인간들을 생경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나무의 마음과 뜻은 도저하고도 웅숭깊다. 누구는 나무를 두고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요, 고도의 철인이요, 안분지족의 현인이다.”(이양하, 「나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나무는 젊어지는 동시에 늙어지고,죽는 동시에 살아난다.”(김훈, 「젊은 날의 숲」)라고도 했다. 그만큼 나무는 세속의 모든 욕망이며 생사까지도 초월해 있는 존재라는 말이겠다. 이런 나무를 보고 어찌 위안이며 평화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무 같은 삶을 엮지 못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나무 앞에 서면 더욱 고즈넉한 마음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씻어낸 눈으로 나무를 보면 더욱 그윽한 위안에 들 수도 있다. 누구는 “나무를 꿈꾸는 사람은 나무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고, 나무의 영혼을 가진 사람은 이미 나무인 것이다.”(이승우, 식물들의 사생활」)라고도 했다. 산을 올라 나무를 본다. 잎이 치렁한 나무라도 좋고 잎 다 진 맨살의 앙상한 가지라도 좋다. 무성한 잎에서는 세상의 오욕을 다 떨치고 오직 싱싱한 생명력을 구가하는 활기찬 삶의 상형을 볼 수 있고,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다 벗어낸 몸으로 오롯이 하늘을 우러르며 고요히 서있는 자태에서는 청신한 구도자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런 나무들을 보면서 사람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나무를 보다가 사람에게로 눈길을 돌리면 아득한 현기증이 해일처럼 몰려올 것 같다. 사람의 세계란 번잡하고도 어지럽다. 그 속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이며 감정들이 다 들어있다. 삶과 죽음은 물론이지만 사랑과 미움, 기쁨과 슬픔, 선과 악, 진실과 거짓, 다툼과 용서, 분노와 화평, 갈등과 화합……, 언어로 다 가를 수 없는 것들이 한 몸 속에 한 세상 속에 다 들어있다. 서로 화학적으로 뭉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자리로 함께하고 있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이러한 인간의 고질을 어느 시인은 “사람 하나를 안다는 것은 눈물 하나를 안다는 말이다.”(조향순, 「눈물 하나」)라는 한 줄의 말로 줄였다. 사람, 오직 그 하나만 사랑하면 왜 안 되는가. 그 사랑 속에도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어 그것이 변할 땐 무엇으로 바뀔지 모른다. 사람을 사랑할 때는 미움과 슬픔도 함께할 마음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우리는 나무를 사랑하여 슬픔에 빠지는가, 나무를 그리워하여 미움이 남는가. 나무는 소박하고 단순하다. 나무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일 뿐이다. 젊음과 늙음도, 죽음과 신생도, 사랑과 미움도, 기쁨과 슬픔도 모두가 하나다. 나무는 그 모든 것을 한 품에 다 그러안는다. 그 앞에 선 세상까지도 다 그러안는다. 정든 이의 품 같을까. 어머니의 가슴 같다고 할까. 그 품, 그 가슴에는 애증도 희비도 선악도 호오도, 아무 것도 없다. 그렇기에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내가 찾는 모든 것이 그 소담스런 둥지 안에 다 들어있다. 그곳보다 더 아늑하고 포근한 세상이 있을까. 그런 나무를 보라. 더없이 아늑하고 포근하지 아니한가. 아늑한 위안을 베풀어주고, 포근한 평화를 안겨주고 있지 아니한가. 오늘도 산을 오른다. 그 푼푼한 나무들을 보러 오른다. 그 도저하고도 웅숭깊은 사랑의 품을 찾아 오른다. ♣(2018.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