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무의 사랑

이청산 2019. 1. 5. 11:34

나무의 사랑

 

오늘도 산을 오른다누구에게 산을 왜 오르느냐고 물으면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라 한다지만나의 답은 나무가 거기 있기 때문이다나의거기란 물론 산이다산은 어디보다 나무를 넉넉히 품을 줄 알기에 산의 나무가 더욱 푼푼한 것을 믿기 때문이다.

산의 나무는 걸림 없이 푼푼하다언제나 시원스럽고 너그럽게 보인다훌쩍 솟아오른 둥치며 원 없이 죽죽 뻗은 가지며 오순도순 달린 잎들이 언제 보아도 청량감을 느끼게 하고옥은 마음들을 너그러이 펴지게 만들어 준다언제나 그 변함없는 모습이 미쁘고도 듬직하다.

아니다나무는 사철 변한다한 해를 온전히 머물지 않는다꽃 지고 잎 피어 무성해졌다가 열매와 더불어 모든 잎들이 져 앙상한 모습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그러나 나무는 사철을 그렇게 피고 지는 그 생명 작용의 순환을 결코 잊는 법이 없다나무는 그 천생을 절대 망각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그 모습이 변함없는 것이다.

나무에겐들 생로병사가 왜 없을까나무도 생명체이고 보면모든 생명들이 다 그러하듯 나고 늙고 병들어 세상을 떠나는 일이야 나무라고 왜 다르겠는가그러나 나무는 그 명이 다할 때까지 결코 푸름을 잊지 않는다어쩌면 나무는 죽을 때까지 늙지 않는지도 모른다또한 나무는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다나무는 생사의 자리가 따로 없다쓰러져 누운 그 자리에서 또 나무가 되어 나지 않는가.

어느 때 어떤 모습의 나무를 보아도 변덕이 없다어떤 자태로 서있더라도 바라보는 마음에는 언제나 위안을 안겨준다나무는 보는 이를 낙망이나 우울에 빠뜨리는 일이 없다꽃 피어서 기쁘고 무성하여 생기롭고문채를 발하던 잎이 내려앉아 산을 온기롭게 하고잎 다 진 나목들은 맑은 정밀(靜謐)에 젖게 한다.

당신은 가을날 내려앉는 나뭇잎을 보며 상심에 젖는가떨어지는 잎은 슬프지 않다자연의 순리를 따라 내려앉을 뿐이다그 잎은 오히려 떨어짐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내려앉는 자리도 가지에서처럼 마땅한 제 자리임을 알기 때문이다어쩌면 그 잎은 목숨이 져가는 것을 슬퍼하는 인간들을 생경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나무의 마음과 뜻은 도저하고도 웅숭깊다누구는 나무를 두고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요고도의 철인이요안분지족의 현인이다.”(이양하나무)라고 하고또 어떤 이는 나무는 젊어지는 동시에 늙어지고,죽는 동시에 살아난다.”(김훈젊은 날의 숲)라고도 했다그만큼 나무는 세속의 모든 욕망이며 생사까지도 초월해 있는 존재라는 말이겠다.

이런 나무를 보고 어찌 위안이며 평화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나무 같은 삶을 엮지 못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나무 앞에 서면 더욱 고즈넉한 마음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모든 것을 씻어낸 눈으로 나무를 보면 더욱 그윽한 위안에 들 수도 있다누구는 나무를 꿈꾸는 사람은 나무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고나무의 영혼을 가진 사람은 이미 나무인 것이다.”(이승우식물들의 사생활)라고도 했다.

산을 올라 나무를 본다잎이 치렁한 나무라도 좋고 잎 다 진 맨살의 앙상한 가지라도 좋다무성한 잎에서는 세상의 오욕을 다 떨치고 오직 싱싱한 생명력을 구가하는 활기찬 삶의 상형을 볼 수 있고모든 것을 미련 없이 다 벗어낸 몸으로 오롯이 하늘을 우러르며 고요히 서있는 자태에서는 청신한 구도자의 모습도 볼 수 있다이런 나무들을 보면서 사람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나무를 보다가 사람에게로 눈길을 돌리면 아득한 현기증이 해일처럼 몰려올 것 같다사람의 세계란 번잡하고도 어지럽다그 속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이며 감정들이 다 들어있다삶과 죽음은 물론이지만 사랑과 미움기쁨과 슬픔선과 악진실과 거짓다툼과 용서분노와 화평갈등과 화합……언어로 다 가를 수 없는 것들이 한 몸 속에 한 세상 속에 다 들어있다서로 화학적으로 뭉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자리로 함께하고 있어 언제 어디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이러한 인간의 고질을 어느 시인은 사람 하나를 안다는 것은 눈물 하나를 안다는 말이다.”(조향순눈물 하나)라는 한 줄의 말로 줄였다사람오직 그 하나만 사랑하면 왜 안 되는가그 사랑 속에도 온갖 것이 다 들어 있어 그것이 변할 땐 무엇으로 바뀔지 모른다사람을 사랑할 때는 미움과 슬픔도 함께할 마음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이다.

우리는 나무를 사랑하여 슬픔에 빠지는가나무를 그리워하여 미움이 남는가나무는 소박하고 단순하다나무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일 뿐이다젊음과 늙음도죽음과 신생도사랑과 미움도기쁨과 슬픔도 모두가 하나다나무는 그 모든 것을 한 품에 다 그러안는다그 앞에 선 세상까지도 다 그러안는다.

정든 이의 품 같을까어머니의 가슴 같다고 할까그 품그 가슴에는 애증도 희비도 선악도 호오도아무 것도 없다그렇기에 거기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내가 찾는 모든 것이 그 소담스런 둥지 안에 다 들어있다그곳보다 더 아늑하고 포근한 세상이 있을까그런 나무를 보라더없이 아늑하고 포근하지 아니한가아늑한 위안을 베풀어주고포근한 평화를 안겨주고 있지 아니한가.

오늘도 산을 오른다그 푼푼한 나무들을 보러 오른다그 도저하고도 웅숭깊은 사랑의 품을 찾아 오른다(2018.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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