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따뜻하고 밝은 삶을 축원하며

이청산 2018. 5. 31. 14:48

따뜻하고 밝은 삶을 축원하며

 

오랜만에 결혼식 주례를 부탁 받았다조 여사가 아들 결혼식의 주례를 서 달라고 했다현직에 있을 때 제자들이나 동료의 결혼식에 주례를 더러 서곤 했지만은퇴 이후로는 뜸했던 일이다주례를 서본 지도 오래 되었고더 명망이 높은 분들도 있을 터이니 그런 분들께 부탁하시라고 사양했지만 조 여사는 한사코 내가 아니면 안 된다며 강권했다.

조 여사와 나는 시낭송 활동이며 글쓰기 공부를 함께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조 여사는 적지 않은 농사일과 함께 번다한 집안일을 해내면서도틈틈이 좋은 시를 외어 무대에 서기도 하고 글을 쓰면서 아름다운 정서를 가꾸고 있다성품이 하도 따뜻하고 밝아온명(溫明)’이라는 호를 지어드리기도 하며 공부를 같이해 오던 중에 아들의 혼사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남의 혼례를 집전하자면 사람 사는 일 매사에 본이 되어야 할 터인데,그렇지도 못하면서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이들 앞에 서서 성실한 삶을 말하기가 민망스러운 일이지만조 여사와의 평소 친분이며 진지한 권을 못 이겨 응낙하고 말았다.

결혼 당사자인 아들과 만날 기회를 가졌다유수 기업체에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는 중에 함께 일하는 동료를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는 아들은 준수한 외모에 서글서글한 인상으로 인품은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아들이 어느 날 어머니에게 어릴 적에 궂은 날 밖에서 놀다가 옷을 다 버려 와도 꾸중하지 않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는 말을 하며 웃었다역시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조 여사의 부군은 가업을 성실하게 경영하면서 조 여사가 하는 일들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외조를 마다 않는 금슬 좋은 부부 사이를 이루어나가고 있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터다그런 슬하의 자제가 인품이 어찌 바르고 너그럽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런 사람이런 가정의 행복을 빌어주는 혼례의 집전을 위해서는 예식 당일까지라도 몸가짐 마음가짐에 각별히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늘 하는 산 오르기나 자전거 운동도 조심해서 하고맑은 마음으로 좋은 말만 하기를 애썼다그 사이에 친구 하나가 유명을 달리하는 궂은일이 있었지만 속으로만 깊은 명복을 빌고 참례를 삼갔다.

드디어 혼례의 날이 되었다주례대에 자리했다.하객들의 축복을 받으며 신랑과 신부가 입장하여 주례대 앞에 나란히 섰다신부도 신랑과 같이 훤칠한 모습으로 우선 외모부터 잘 어울리는 한 쌍 같았다.혼인 서약과 성혼 선언을 하고 준비한 주례의 말을 해나갔다.

먼저 당자들과 부모님들을 축하했다신랑의 어머니와의 친분을 따라 주례의 자리에 서게 된 인연을 말하고부모의 금슬과 자녀의 인품과의 관계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황동규 시인의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라는 글로 서로의 인격 존중을 이르고함민복 시인의 부부란 긴 상을 마주보고 함께 드는 사이와 같다는 시로 서로 호흡을 같이하며 더불어 살아가야 존재가 부부라는 것을 일러 주었다.

마지막으로 결혼이란 두 사람만의 만남이 아니라 두 가정의 결합이라는 것도 명심해 달라며 말을 맺어나갔다이런 말을 해주지 않은들 지혜로운 젊은이들이 모를 일일까만세상을 먼저 산 사람의 노파심을 보태어 따뜻한 축복의 뜻을 담아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조 여사가 활동하고 있는 시낭송 모임의 회장님이 특별히 자작시를 축시로 준비했다. ‘당신은 내 마음의 일기예보당신에게 비가 오면 나에게도 비가 오고당신이 맑으면 나도 덩달아 맑습니다.’라며 낭랑한 목소리로 이들의 사랑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생애 중에서 가장 긴장이 되고 심장의 박동소리가 어느 때보다 클 이 순간에 이들의 눈동자들은 티 없이 맑고도 빛났다어쩌면 그 긴장이 내가 들려주는 말들을 다 삼켜버릴지도 모를 일이지만이 순간이 이들에게는 일생의 가장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임은 틀림없다.

그래어느 경황에 내 말이며 축시를 다 기억에 새길 수 있을까오직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기억으로만 남기를그 기억이 저들 행복의 밑거름이 되기를 비는 마음이 간절했다신랑 신부가 부모님과 하객들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하고 행진해 나갈 때살아가면서 오늘 이 순간이 떠올리며 한 번쯤 펴보라고 주례사 원고를 성혼선언 첩에 살며시 넣어주었다.

이제 신랑과 신부는 새로운 삶의 첫걸음을 걸어 나간다축복의 박수 소리가 해일처럼 식장을 휩쌌다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조 여사는 곱고도 멋진 신부와 나란히 늠름한 걸음으로 행진해 나가는 아들이 대견한 듯 얼굴 가득 희열의 빛을 띄웠다.

어떤 이는 사람의 한생을태어나서 결혼할 때까지본인이 결혼할 때부터 자식이 결혼할 때까지자식이 결혼한 다음부터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의 상··하 세 권의 책으로 나누기도 했다그렇다면 오늘은 조 여사도 아들도 함께 새 책의 인생을 출발하는 날이다.

출발은 언제나 희망이다사람들은 희망이 있기에 출발을 꿈꾸고출발이 있기에 삶은 더욱 생기로워지지 않는가오늘은 조 여사도 아들도 가득 찬 희망의 날이다조 여사의 따뜻하고 밝은 성품의 빛이 더욱 새로워지는 날이다.

그 빛이 아들과 며느리에게로 가서 더욱 따뜻해지고 밝아지기를그리하여 저들의 보금자리를 따뜻하고 밝게 만들기를나아가서는 그 온기와 빛이 우리 함께 사는 세상으로도 널리널리 번져나가기를 빌며 주례대를 내려왔다조 여사를 비롯한 두 집안 부모님들께 다시 한 번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손을 잡았다.

면사포를 길게 늘어뜨린 신부가 다정히 겯고 있는 신랑의 팔 뒤에 내가 섰다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그 플래시가 또 한 번 정녕한 축복의 빛이 되기 비는 마음을 안고 신랑 신부가 꿈 가득 행진해 나갔던 꽃가루 길을 눈길 깊이 새기며 식장을 나왔다.

희망에 찬 젊은이들의 따뜻하고 밝은 삶을 축원하며-.(2018.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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