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상사화 마른 잎

이청산 2017. 6. 12. 11:23

상사화 마른 잎

 

상사화 잎이 마르고 있다잎이 움을 내밀기 시작한 것은 겨울이 잔설에 꼬리를 묻고 있던 때였다세상 모든 푸새들은 상기도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었다둥근 뿌리 비늘줄기 끝에서 아기 오리 부리 같은 촉이 뾰족뾰족 솟아나왔다.

겨울이 봄 볕살을 못 이겨 조금씩 물러나도 아직 다른 것들은 동면의 미몽을 털지 못하고 있었지만상사화 잎은 성큼성큼 자라났다길고도 넓적한 잎새가 엄지손가락만 하다 싶더니 어느새 뼘 나마로 커져갔다.

다른 풀들이 세상에 봄이 온 것을 비로소 알고 파릇한 얼굴을 내밀 때상사화 잎은 벌써 물오른 처녀의 삼단 머리 같은 풋풋한 잎사귀를 구김 없이 내뻗었다마치 봄의 대지를 저 혼자 다 품어 안을 듯했다한참 그렇게 대지를 차지했다.

하늘빛 봄까치꽃이며 하얀 미나리냉이꽃민들레 노란 꽃이 피어날 무렵에 상사화는 잎 날을 새파랗게 세우며 원 없이 뻗쳐 나왔다싱싱한 생명력을 자랑삼는 듯도 했고하늘을 향하여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듯도 했다.

그러던 것이 민들레 갓털이 날고 냉이 줄기가 꽃을 피울 무렵이 되자 잎 끝이 노랗게 말라들기 시작했다개망초꽃이 피고 뻐꾹새 소리가 들리는 오월 하순부터는 연갈색으로 변하면서 잎줄기를 늘어뜨리더니 봄을 넘어서면서부터 땅에 붙듯이 내려앉았다.

아직 더 말라갈 것이다빛깔도 점점 잿빛으로 변하면서 형해가 겨우 비칠 정도로 말라가다가 마침내는 땅으로 녹아들면서 자취를 거둘 것이다잎 잦아든 자리에 이윽고 새로 솟는 것이 있다비로소 피어나는 것이 있다새 세상을 여는 것이 있다그 꽃이다.

잎이 말라 흙이 되어가는 어느 날그 흙을 뚫고 대궁이 솟을 것이다솟아오른 대궁 끝에 꽃술도 처렁한 홍자색 꽃이 피어날 것이다그리고 한동안 세상을 밝힐 것이다꽃은 잎의 모습을 짐작이나 할까잎은 꽃의 빛깔을 헤아려볼 수나 있을까.

잎은 꽃을 그리며 애태우다 말라가는 것일까꽃은 잎을 그려 잎이 진 자리에 솟구쳐 오르는 것일까누가 상사화를 사랑의 꽃이라 했던가서로 그리다가 애달피 죽살이를 바꾸어야하는 이루지 못할 사랑의 화신이라 했던가그들에게 애틋한 사랑의 기억이라도 있단 말인가.

어느 시인은 좋아하면서도 만나지 못하고서로 어긋나는 안타까움을어긋나보지 않은 이들은 잘 모릅니다.”(이해인상사화)라고 했지만,언제 스쳐가는 뒷모습이라도 본적이 있었던가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을 무엇으로 헤아려 사랑을 그릴 수가 있는가.

상사화의 사랑이란 공허하다서로 마주할 찰나의 겨를도 없었으면서 어긋났다 할 수 있는가잠시도 차 본 적이 없는 빈 가슴을 안고 허공에 손을 젓고 있는 것 같다.차라리 어긋나 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그래서 밤을 하얗게 새워 봤으면 좋겠다.

상사화의 그리움이란 야속하다시인은 또 말한다. “죽어서라도 꼭 당신을 만나야지요사랑은 죽음보다 강함을오늘은 어제보다 더욱 믿으니까요” 그토록 그리워했다면그리도 사무쳤다면 잠신들일순인들 왜 만날 수가 없단 말인가어찌 한번 부둥킬 수가 없단 말인가.

차라리 내 너를 사랑하는 것은너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낫겠다그래서 정말로 내가 널 사랑하는 것은내 가슴 속의 날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네 가슴속에 날 더 피워 오르게 하는 것이다”(구재기상사화)하고 고백하는 것이 더 편하겠다.

그렇게 속을 드러내는 것이 공허한 사랑야속한 그리움을 저어버리기가 외려 쉬울 것 같다이름도 얼굴도 들은 적 본 적 없는 너를 내 어찌 사랑한다 할 수 있으랴사랑한단 말을 건넬 겨를도 없는 너를 두고 내 어찌 그리움에 사무친달 수 있으랴.

나는 나대로 말라가련다말라서 한 톨의 흙으로 돌아가련다너는 너대로 피어라네 피고 싶은 대로 피어나 세상을 보고 싶은 대로 보아라.꽃 한번 안아 보지 못하고 잦아드는 내 육신이 아리긴 하다만어쩌겠느냐우린 어차피 그런 운명이 아니더냐.

넌들 잎들에 둘러싸여 도란도란 피는 꽃들을 보면 어찌 아늑해 보이지 않겠느냐그렇게 잎들의 다사로운 손길 속에서 피는 꽃들을 보면 얼굴도 모르는 내 모습이 그려지기라도 할까그래서 네 꽃술은 소곳이 목을 빼어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는 지우자그리움이란 마음속에 그리는 그림이라 하지만본 적 없는 우리는 마음만으론들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느냐어떤 모습을 그려서 그리움 삼을 수가 있겠느냐그저 고즈넉한 가슴이 되어 서로를 지우면서 살자.

모두가 그리움이다지우고 싶은 까닭은 바로 그립기 때문이 아닌가.살다가 보면 아름다운 추억 속의 사람을 서로 그리워하는 것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들은 적도 본 적도 그릴 수조차도 없는 것을그런 사람을 못내 그리워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 그리움들이 우리를 살아있게 하고삶을 더욱 생기롭게도 한다우리 가슴속에서 그리움을 빼내버린다면무엇을 바라 꿈을 꾸어야 하고무엇에 기대어 아침 눈을 떠야 할까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또 무엇일까.

상사화도 그 그리움으로 줄기 곧은 잎들을 생기 차게 돋워 내다가 말라가고긴 대궁 위에 홍자색의 애틋한 마음을 피워내다가 져 가는지도 모르겠다상사화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꽃이 아니라마냥 그리움으로 피고 지는그래서 늘 그리움으로 사는 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늘 그렇게 살아가듯이.(20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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