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무는 말이 없다

이청산 2020. 1. 12. 19:44
                                         나무는 말이 없다

 

겨울 산을 오른다. 입고 있던 것을 다 벗어버린 나무들 사이로 찬 바람이 지난다. 상수리나무든, 떡갈나무든, 물푸레나무든 모두 맨모습으로 빨갛게 섰다. 하늘 향해 맨살을 드러내놓고 있어도 나무는 떨지 않는다. 얼지도 않고 이울지도 않는다. 산이 있기 때문이다.

산의 무엇을 믿는가. 산은 오직 뿌리를 내리게 해줄 뿐이다. 잎이 나면 나는 대로 미소지어 주고, 꽃이 피면 피는 대로 이뻐해 줄 뿐이다. 잎이 언제 돋으라 한 적도 없고, 꽃을 어떻게 피우라 한 적도 없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그뿐 아니다. 그 꽃과 잎의 빛깔이 바래고 말라 떨어져도 애타 하지 않는다. 그 떨어진 꽃이며 잎을 마냥 감싸 안아 줄 뿐이다. 그 꽃과 잎들이 품을 파고들면 조용히 품어 때가 되면 소곳이 세상에 내보낼 뿐이다.

오늘처럼 벗은 저 나무들이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서 있어도 그리 딱해하지도 않는다. 저것도 저들 한때의 일이 아닌가. 저리 맨살의 때가 없으면 새잎은 어찌 볼 것이며, 빛 고운 꽃은 또 어찌 안을 수 있을 것인가. 하물며 탄실한 열매는 어찌 낳을 수 있을 것인가.

나무는 알고 있다. 안고 있는 것들을 다치게 할까 애써 설한풍을 물리치려 하지 않아도, 발을 내리고 있는 저네들에게는 무심한 듯 오는 비바람을 다 받아도, 이 산이 아니면 철 따라 치장을 바꾸어 꾸며 가며 살 수 없음을 나무는 알고 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보듬어주는 산이 있기에, 이 겨울도 넉넉한 사색에 잠기며 오는 철을 맞이할 채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무는 안다. 이 산이 있어 시절의 유구한 변환을 두고도 때만 되면 꽃이며 잎을 피우고 열매를 거두어 새로운 훗날을 기약할 수 있지 않은가.

대도(大道)는 만물을 생겨나게 하지만 한 마디 자랑하지 않고, 그 공을 내 것이라 하지 않으며, 만물을 사랑하고 길러 주면서도 그 주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萬物恃之而生而不辭 功成不名有 愛養萬物而不爲主)”라 한 노자(老子)의 말씀은 곧 산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백락(伯樂)이라는 사람이 나는 말을 잘 다스린다.”고 하면서 말에 낙인 찍고, 털 깎고, 발굽 다듬고, 굴레 씌우고, 고삐와 띠를 매어 마구간에 가두었더니 열에 두세 마리는 죽었다고 한다. ‘하늘에 맡겨 되는 대로 두기를 말하려 한 장자(莊子)의 이야기다. 장자는 이를 천방(天放)’이라고 했다. 산은 벌써 그 대도며 천방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고요한 겨울 산을 오르노라니 고속도로를 분주히 지나는 자동차 소리가 나목 사이를 비집고 든다. 저 차들은, 거기에 탄 사람들은 어딜 그리 바삐 오가는 것일까. 무엇하러 다니는 것일까. 자기 삶을 열심히 꾸리려 하는 사람들이겠지만, 혹 남의 삶을 들여다보러, 남을 채근하러 가는 길은 아닐까?

그 들여다보는 것이, 채근하려는 것이 남을 기쁘게 즐겁게 하려는 것일까. 행복을 도와주려 하는 것일까.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백락처럼 말을 위하려는 사람이 왜 없을까.

지금 세상에는 사람 때문에 고달픈 사람들이 없지 않은 것 같다. 권력으로, 금력으로 세상을 휘저으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사람일수록 내세우는 것은 한결같다. 당신을 위한 거라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거라고-.

그런 사람일수록 평화도 잘 이루어지고 있고, 경제도 빛나고 있어 살기 좋은 세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그 모두가 제 공덕이라 한다. 백락이 말을 손질할 때도 말이 잘 다듬어지고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은 죽어갔다. 열에 두셋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인들 온전했을까.

휘젓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가 있어 세상이 빛나고 있다 한다. 말을 잘 다룬다고 자랑했던 백락처럼-. 우주 삼라만상을 낳은 공을 이루고서도 그렇게 했노라 자랑하지 않는(功成不名有) 노자는 어디에 있는가.

다시 산을 본다. 아무 말이 없다. 벗은 나무들이 떨고 있는 걸 보면서 어떤 낯빛도 짓지 않는 산이라 해도 나무는 산을 탓하지 않는다. 나무는 오직 오늘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산과 나무는 한 번도 결별한 적이 없다. 이들의 속내를 사람이 알까.

사람들은 죽을 듯, 살 듯 사랑을 나누다가도 툭하면 결별을 생각한다. 저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도 온갖 결별들이 안겨 있을지 모른다. 이 겨울 산에 나무는 다 벗고 서 있으면서도 아무 말이 없다. 산은 더욱 말이 없다.

만물이 큰 도를 의지하여 생겨나지만 큰 도는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만물을 사랑하며 길러 주면서도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 그런 산 같은 사람 살이도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 할 말이 없다. 말없이 모든 것을 품고 있는 산이며, 저 말 없는 맨살의 겨울나무가 민연히 부러울 뿐이다.(2020.1.5.)

 

백락(伯樂) : 중국 춘추 시대 진()나라의 정치가로 진목공(秦穆公) 때 말을 보는 일을 맡았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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