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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기 싫으세요?

늙기 싫으세요? 이 일 배 오늘도 벚나무 줄지어 선 아침 강둑 산책길을 나선다. 아니, 이 무슨 변란인가! 다른 길, 딴 세상을 걷는 것 같다.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아침마다 걷는 길이건만 오늘은 전혀 다른 길이 되어 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수줍어 수줍어하며 몽우리 속에서 꼬물꼬물 옥이고만 있던 꽃잎이 한꺼번에 현란하게 터져 별천지를 이루었다. 이 꽃들이 일시에 봉오리를 터뜨리는 순간에는 무슨 기총소사라도 하듯 요란한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을 것 같다. 어라, 이 나무 좀 보게! 온몸에 꽃 이리 화사하고 해사하게 피워놓고 제 몸뚱이는 왜 이 모양인가. 둥치는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불을 뿜다가 버려져 검게 녹슬고 터진 포열 같기도 하고, 껍질은 이곳저곳이 갈라지고 거칠어진 늙은 농군의 ..

청우헌수필 2022.04.12

강물이 익어 가듯

강물이 익어 가듯 아침 강둑을 걷는다. 그리 많은 물은 아니지만, 졸졸 흐르고 조용히 내리고 콸콸 쏟아지기도 하면서 만나는 것에 몸을 맞추며 쉼 없이 흘러가고 있다. 물에 내려앉은 햇살이 윤슬이 되어 반짝인다. 강물은 윤슬로 제 몸을 단장하면서 유유히 흘러간다. 흘러 흘러서 간다. 강물이라 했지만, 막상 제 몸을 담아주는 물길은 ‘강’ 이름을 얻지 못했다. 너비는 웬만한 강에 못지않아도, ‘천’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있을 뿐이다. 아쉬울 일은 없다. 조금만 흘러가다 보면 다른 물들과 합쳐지면서 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천’이라는 이름도 없었다. 산골짜기 작은 옹달샘에서 솟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넘치면서 물돌을 타고 흐르다가 다른 물돌 여울을 만나 개울을 이루었다. 그렇게 몸피를 불려 나가며..

청우헌수필 2022.03.12

이일배 수필집 『나무는 흐른다』

이일배 수필집 『나무는 흐른다』, 소소담담(2022) 책 소개 이일배 수필에서 자연은 삶의 지표고 스승이다. 자연을 통해 인간 삶의 하찮음과 누추함을 반성하고 존재의 본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작가에게 자연은 생활의 터전이면서 도덕적 존재로 거듭나도록 하는 배움의 현장이다. 전체 6부로 구성된 이 수필집은 1부에서 4부까지가 모두 자연을 소재로 취한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1, 2부는 나무, 3부는 산, 4부는 꽃을 소재로 삼았다. 산과 나무와 꽃은 하나이다. 산에서는 무수한 나무와 꽃이 있다. 나무와 꽃이 없으면 그것은 산이 아니다. 꽃이 산이고 나무도 산이다. 또한 산은 나무이고 꽃이다. 하지만 산에는 나무와 꽃만 있는 것이 아니다. 풀, 냇물, 새, 하늘, 구름, 돌, 짐승, 벌레 등 ..

자 료 실 2022.03.06

상장 모정

상장 모정 설날 큰댁에서 차례를 모시고 둘러앉아 음복하는데, 형수께서 누렇게 변색한 두루마리 뭉치를 내놓으며 나에게 건넸다.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깊숙이 들어있더라 했다. 하도 오래 돌돌 말려 있던 것이라 잘 펴지지도 않는데, 억지로 펴다간 으스러질 것 같아 조심조심 펼쳤다. 깜짝 놀랐다. 단기 4292년이면 서기로 1959년이다.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면서 받은 개근상장에 적힌 연도다. 그로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내가 받은 상장들이 고스란히 말려 있었다. 지금부터 63년 전에서 55년 전에까지 받은 것이니까 모두 반세기가 훨씬 지난 것들이다. 특출하게 빛나는 상장은 없었지만, 개근상 정근상은 거의 놓치지 않은 것 같다. 그중에는 국민(초등)학교 졸업장이며 고등학교 때 교내 백일장에서 받은 상장, 어..

청우헌수필 2022.02.20

십칠 년밖에

십칠 년밖에 이 일 배 해가 바뀌었다. 권 선배가 말했다. “이제 나는 십칠 년밖에 못 산다네요!” 권 선배는 나보다 여덟 살이나 위이시지만, 막역한 술벗이다. “누가 그럽디까?!” “요새 백세 시대라잖아요! 하하” 그러고 보니 권 선배께서는 올해 여든셋이 되셨다. “그러면 저는 십칠 년 후에는 누구와 술벗을 하란 말입니까? 하하” “그걸 난들 어찌 알겠소! 하하” 하기야 누가 감히 앞일을 알 수 있을까. 어쩌면 권 선배는 이승에서는 나의 선배시지만, 세상을 바꿀 때는 누가 선배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선배의 여명 십칠 년! 내가 이 한촌을 찾아와 산 걸 돌이켜보면 십칠 년도 잠깐이다. 바로 십칠 년 전 이 땅을 처음 디뎠다. 공직 발령을 따라 그해 초봄 이 궁벽한 산촌을 찾아왔었다. 둘러봐도 사방..

청우헌수필 2022.02.08

가야 할 때가

가야 할 때가 협회를 물러나겠다고 했다. 회가 창립된 지 11년 만이다. 회장님과 나는 지역 문협의 시 낭송회에서 전문 낭송가와 지역 인사 초청 출연자로 만났다. 연배는 십여 년 차가 났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 낭송에 관한 관심이 서로 통했다. 당시 지역에는 시 낭송으로 뜻을 같이할 수 있는 동호인 모임이 없었다. 우리가 만들어 보자 했다. 알음알음 물색하여 십여 명을 모았다. 회장님이 회원들 낭송 지도와 함께 회 운영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면, 나는 그 운영을 뒷받침하며 회를 이끌어 나가자고 했다. 회를 발기한 우리 두 사람은 회원들의 선임에 따라 회장과 자문위원을 나누어 맡기로 하고, 젊어 패기도 있으면서 낭송 활동에 의욕도 있는 한 회원에게 실무를 맡겼다. ‘○○낭송가협회’라는 이름으로 출발을..

청우헌수필 2022.01.29

외로움과 고독

외로움과 고독 이 일 배 좋아서 찾아와 살고 있으니 타향 아닌 애향이라 해야 할까. 한 생애를 정리하고 티끌세상을 떠나 이 한촌에 와 산 지 강산이 변하는 한 세월을 성큼 넘어섰다. 그 세월 그런대로 잘 껴안고 살고 있다 싶으면서도, 두고 온 사람들이며 그 바깥세상의 그림자는 곁을 떠나지 않는다. 눈을 들어 창밖을 보면 어딜 봐도 사방 모두 우람한 산이다. 인가 몇 채에 텅 빈 들판, 벚나무가 늘어선 강둑도 보이지만, 적막하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날고 그 아래로 간혹 나는 새가 보일 뿐 정물화 같은 풍경이다. 지난날의 사람들이 그립다. 그는, 그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따금 달려가거나 불러서 차라도 술잔이라도 함께 나누고 싶다. 이 넓은 세상에 사람이라곤 오직 나 하나뿐인 것 같다. 혼자서 ..

청우헌수필 2022.01.10

끈 이 일 배 사람들은 모두 끈을 부여잡고 산다. 그 끈은 하늘이 천연으로 내려주기도 하지만, 그 하나를 얻기 위하여 온갖 공을 다 모으기도 한다. 하늘이 내려준 끈도 귀하지만, 공을 모은 끝에 얻은 끈이 더 귀할 수도 있다. 끈을 힘주어 잡고 있다 보면 뜻하지 않게 놓치거나 끊어지기도 하고, 놓치고 끊어진 것을 다시 잡고 잇기 위하여 갖은 애를 쓰기도 한다. 끈이 없으면 살 수가 없을 수도 있고, 살더라도 편안하게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 친구가 있었다. 같은 직장은 아니었지만, 같은 직업, 직위를 가지고 가끔씩 만나 마음을 나누다 보니 조금씩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같은 곳에 같은 볼일을 보러 갈 때는 함께 차를 타고 다니며 많은 얘기를 나누기도 하고, 일 처리 방법을 함께 궁리하며 서로 의견을 주..

청우헌수필 2021.12.28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이 일 배 나에게 언제 죽음이 와도 기꺼이 맞이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살 만큼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기도 하고, 이제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나 갚아야 할 빚이 별로 없는 홀가분함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특별히 무슨 깨달음을 얻어 죽음 앞에서 유달리 초연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풀도 나무도 짐승도 사람도, 목숨을 가진 모든 것들이란 태어남이 있듯이 죽음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는 평범한 상념에서일 뿐이다. 죽지 않고 살아 있기만 해서도 안 되고, 그런 일이란 있을 수도 없지 않은가. 철이 되면 미련 없이 가지를 떠나는 나뭇잎처럼 나도 그렇게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그래서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는 것도 쓰면서 죽음에게 순순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정말 ..

청우헌수필 2021.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