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가야 할 때가

이청산 2022. 1. 29. 15:50

가야 할 때가

 

  협회를 물러나겠다고 했다. 회가 창립된 지 11년 만이다.

  회장님과 나는 지역 문협의 시 낭송회에서 전문 낭송가와 지역 인사 초청 출연자로 만났다. 연배는 십여 년 차가 났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 낭송에 관한 관심이 서로 통했다. 당시 지역에는 시 낭송으로 뜻을 같이할 수 있는 동호인 모임이 없었다.

  우리가 만들어 보자 했다. 알음알음 물색하여 십여 명을 모았다. 회장님이 회원들 낭송 지도와 함께 회 운영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면, 나는 그 운영을 뒷받침하며 회를 이끌어 나가자고 했다.  

회를 발기한 우리 두 사람은 회원들의 선임에 따라 회장과 자문위원을 나누어 맡기로 하고, 젊어 패기도 있으면서 낭송 활동에 의욕도 있는 한 회원에게 실무를 맡겼다. ‘○○낭송가협회’라는 이름으로 출발을 했다. 시와 낭송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회가 화기롭게 운영되어 갔다.

  수시로 회장님의 지도를 받으며 낭송을 갈고 닦다가 두 달에 한 번 모여 작은 낭송회를 열고 낭송의 기량을 서로 평가했다. 그렇게 하기를 이태가 된 해의 여름, 시민들을 상대로 첫 번째 시 낭송 콘서트를 열었다.

  완성도를 더욱 높여 가야 할 첫 콘서트였지만, 출연 회원들의 열기와 시민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그 열렬한 갈채에 힘을 얻어, 시 낭송이란 ‘음성화한 시로 구현하는 삶의 예술’이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갖은 열정을 태워 나갔다.

그 세월이 강산이 변한다는 십 년을 넘어서고 콘서트도 아홉 번째에 이르렀다. 그 세월 동안 변한 강산의 모습보다 회원들의 변모가 더 눈부신 것 같았다. 회원들 모두 낭송 전문가가 되어 많은 회원이 낭송지도자 자격을 갖추기도 했다.

  회장님은 회원들의 낭송 지도에 주력하는 한편, 나는 회원들이 낭송할 만한 시를 찾는 일이며, 그 시와 회의 운영 상황을 담는 웹 카페 관리에 힘을 모았다. 콘서트가 열릴 때면 「낭송 시첩」을 만들고, 낭송 시 소개 영상을 만들어 관객들이 잘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회원들에게 아호를 하나씩 지어 주어 서로 편하게 호명할 수 있도록도 했다. 회가 운영되어 가는 곳곳에 알게 모르게 내 손길, 마음 길이 많이 스며들게 되었다.

회원들이 회장님과 내가 하는 일을 신뢰하면서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주는 것이 무엇보다 큰 보람으로 여겨졌다. 시 낭송도 아름답지만, 회원들의 마음 하나하나가 시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회원들과 만나는 날이 설레게 기다려졌다. 따뜻한 마음을 서로 주고받으며 인정도, 낭송의 아름다움도 기쁘게 나누어 갔다. 그렇게 낭송에 빠져들다 보니 기량이 점점 나아지지 않을 수 없고, 콘서트도 해마다 새로운 모습을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음악을 전공하여 악기 연주와 노래며 작곡도 즐겨 하는 회원이 있었다. 낭송 활동을 더욱 재미있고 즐겁게 하기 위해 ‘협회 노래’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달포를 고심한 끝에 3절로 된 가사를 완성했다. 음악 회원에게 작곡을 부탁했다.

  “꽃피고 새 노래하는 계절도 좋지만 / 보고 싶은 사람들 서로 만남도 기쁘지만 / 아시나요 아름다운 시 외며 사는 행복을 / 그 행복 찾아가는 ○○낭송가협회 // 기쁘고 즐거울 때는 환희의 시 외고 / 힘들고 외로울 때는 위안의 시 읊으면 / 슬픔도 기쁨도 꽃으로 피어나는 길 / 그 길을 찾아가는 ○○낭송가협회 // 낭랑한 목소리에 아늑한 꿈 싣고 / 시 속에 피어오르는 오롯한 사랑 향해 / 따뜻한 삶을 위해 정겨운 세상을 위해 / 좋은 시 찾아가는 ○○낭송가협회”

  1절에서는 낭송 활동의 의의, 2절에서는 낭송의 효용성, 3절에서는 세상에 이바지하는 낭송의 지향성을 담고 싶었다. 내 생각만 오로지 담은 것이 아니라, 그러한 마음과 뜻으로 함께해 온 우리의 지난날들을 우려낸 것이다.

  회 창립 10주년 한 해 전 어느 날 정기 모임에서 음원 발표를 하고 음악 회원의 선도로 함께 불렀다. 회원들 모두 감격으로 눈시울을 적시며 목청을 높여갔다. 그리운 이를 만난 것같이 행복하고, 좋은 이에게 받는 사랑 고백처럼 황홀하다 했다. 그해 가을 콘서트 무대를 통하여 더욱 큰 감격을 안고 울려 퍼졌다. 

창립 10주년을 막 넘어선 새해 벽두에 정기총회가 열렸다. 나하고 같이 회를 창립했던 회장님이 물러났다. 이제 후진이 나설 때가 되지 않았냐며 물러날 뜻을 수차례 말씀해온 터였다. 회장님은 감회의 눈물을 삼키며 퇴임사를 했다. 회원들은 아쉬움과 함께 그간 노고에 대한 위로와 감사를 드리며 고문으로 추대했다. 사무국장을 맡아오던 회원을 회장으로 선출하여 축복의 박수를 보냈다.

  나는 전격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회를 떠나겠다고 했다. 홀연 눈동자들이 커졌다. 오직 회원들과 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엮어온 세월이었지만, 내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내 방법만이 최선이었을까. 회원들의 잠재력 분출 기회를 앗은 것은 아니었을까.

  “……창립할 때 회장님과의 약속을 생각하며 없는 힘이지만 나름대로 열정을 바쳐왔습니다. 이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욱 새롭게 나아가는 협회가 되기를 간절히 빌면서…….”

  내가 떠나는 것만이 회가 더욱 새로워질 것이라는 믿음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회와 회원을, 우리의 낭송을 사랑하는 마음에서임은 물론이다. 세대는 흘러가야 하지 않는가.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낙화」)’라 하지 않던가. ‘협회 노래’를 감회롭게 제창하며 총회를 마치고,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을 나섰다.

  나의 뒷모습이 아름다울까. 회원들은 극구 만류했다. 만류는 몇 날 며칠을 두고도 이어졌다. 모든 일을 다 받쳐 주던 분이 떠나면 어떻게 하느냐 했다. 그럴수록 내 믿음의 끈을 더욱 다잡았다.

  “……따뜻한 삶을 위해 정겨운 세상을 위해 / 좋은 시 찾아가는 ○○낭송가협회~~!”

  그렇게 영원하기를 바라며 그 믿음의 끈을 다시 한번 힘주어 당긴다.♣(20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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