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강물이 익어 가듯

이청산 2022. 3. 12. 15:08

강물이 익어 가듯

 

 

아침 강둑을 걷는다. 그리 많은 물은 아니지만, 졸졸 흐르고 조용히 내리고 콸콸 쏟아지기도 하면서 만나는 것에 몸을 맞추며 쉼 없이 흘러가고 있다. 물에 내려앉은 햇살이 윤슬이 되어 반짝인다. 강물은 윤슬로 제 몸을 단장하면서 유유히 흘러간다. 흘러 흘러서 간다.

  강물이라 했지만, 막상 제 몸을 담아주는 물길은 ‘강’ 이름을 얻지 못했다. 너비는 웬만한 강에 못지않아도, ‘천’이라는 이름으로 흐르고 있을 뿐이다. 아쉬울 일은 없다. 조금만 흘러가다 보면 다른 물들과 합쳐지면서 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천’이라는 이름도 없었다. 산골짜기 작은 옹달샘에서 솟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넘치면서 물돌을 타고 흐르다가 다른 물돌 여울을 만나 개울을 이루었다. 그렇게 몸피를 불려 나가며 흐르다 보니 예까지 흘러 ‘천’이 되어 흐르고 있다.

  그 물을 보면서 나도 함께 흘러간다. 내 걸음을 따라 나도 예까지 왔다. 나는 어디를 걷고 걸어서 오늘 여기 강둑에까지 흘러왔는가. 나도 물론 조그만 생명체로부터 태어나 거듭되는 철을 겪으면서 살고 살아 철을 얻어 이 강둑까지 왔다. 

저 물이 흘러 예까지 오자면 숱한 굽이, 고비를 겪어야 했을 것이다. 숲도 보고, 들에도 안기고, 얕은 곳도 흐르고, 깊은 곳이면 들었다가 다시 흐르고, 작은 돌은 쓰다듬으며 흐르고, 큰 돌을 만나면 돌아서 흐르고, 그렇게 흐르면서 이웃을 만나 함께 흐르다 보니 개울도 되고 내도 되었다.

  난들 어찌 그런 굽이며 고비가 없었으랴. 애증도 만나 희비도 껴안고, 외로움도 겪으며 화락도 돌아보고, 쟁투에도 부딪치고 화평에도 젖으면서 수많은 세월을 안아 온몸에 나이테를 문신으로 새기면서 예까지 오지 않았던가.

  그 생애가 아직 얼마나 더 흘러가야 할지 모른다. 저 물이 얼마나 더 흘러가야 할지 모르듯. 흘러가다 보면 더 큰물을 만날 것이다. 그 큰물을 만날 때 ‘강’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물은 어떤 이름을 바라 그것을 얻기 위하여 흘러가지는 않는다. 흘러 흘러 큰물을 만나고, 그리하여 ‘강’이라는 이름을 얻을 뿐이다. 이름 하나 얻기 위해 아웅다웅 살아가는 무리가 있을지라도, 물은 그냥 그렇게 흘러가다 보면 이름이 와 붙을 뿐이다.

  물이 그렇게 익어 간다. 개울이 내가 되고, 내가 강이 되는 것이 물이 점점 익어 가는 것이다. 흐르고 흐르는 사이에 온갖 풍파를 다 겪으면서 물은 점점 익어 크고 너른 강이 되어 간다. 그렇게 익고 여물어 가면서 흐르고 흘러서 간다.

금모래 반짝이는 강촌 마을도 지나고, 질펀하고 매끈하게 뻗어있는 길을 옆구리에 끼고 흐르다가, 빌딩과 높은 굴뚝을 바라보면서 흐르기도 하다가, 아, 드디어 종착지에 닿는다. 바다다! 세상 모든 물이 다 모이는 바다, 막힌 데 없이 트이고 드넓은 바다에 이른다.

  저 물, 아직은 내에 몸을 얹어 흐르고 있지만, 아무것에도 메임이 없고 걸림이 없는 그 너른 세상을 바라며 저 물도 익어 가고 있다. 제가 그리 여기든 아니든 흘러가다 보면 그 광활한 바다는 저에게 안길 것이다. 아니, 그 바다에 안겨 바다가 될 것이다.

  어디 강물만이랴. 사람도 살아가고 흘러가며 작은 물, 큰물, 많은 물을 만나 커지고 넓어지고 하면서 그렇게 익어 가고 늙어가지 않는가. 그래서 어느 철학자는 사람이 늙어가는 것을 두고 익어 가는 것이라 했던가.

나는 저 물보다는 조금 더 먼 길을 흘러온 지도 모르겠다. 정갈한 실개울 물도 만났지만, 잿빛 시궁의 물도 끼어들고, 큰비를 맞아 넘치는 홍수가 되기도 하다가 이제는 어지러운 물살을 조금은 걷어내고 은은히 흐르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내가 물이라면 나에게 지금쯤은 ‘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을까. 나는 지금 저 물이 흘러서 닿는 그 바다에 조금씩 가까워져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바다가 보일 듯도 하다. 강이 흘러 바다로 들 듯, 나에게도 바다가 그리 멀지는 않은 것 같다. 

바다에는 앞을 막는 굽이도, 몸을 묶던 보(洑)도 없다. 오직 하늘 따라 넓게 펼쳐져 있을 뿐이다. 장자(莊子)는 죽음을 두고 ‘하늘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帝之懸解)’이라 하고, 아내의 죽음을 두고도 ‘하늘과 땅이란 거대한 방 속에 편히 잠들고 있다.(入且偃然寢於巨室)’라고도 했다.

  바로 바다가 아닌가. 그 바다를 그린 것이 아닌가. 아무 메임 없는 그 바다가 부럽게 바라다보이기도 한다. 그 해방의 바다가 그리 쉽사리 다가올까. 그저 흐르기만 하면 무장무애한 평안의 바다, 고요의 바다가 펼쳐질까.

  삶을 잘 사는 것이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이라고 했다. 남은 세월 동안이라도 몸과 마음을 잘 추슬러 삶을 잘 곱게 나아갈 수 있기를 새삼 애써 볼 일이다. 익고 익어 마침내 바다에 이를 저 강물을 보며-. ♣(20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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