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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서春序

춘서春序 다른 나무는 한 달 전쯤에 꽃을 다 내려 앉히고 잎이 돋기 시작하여 벌써 무성한 녹음을 이루고 있는데, 아직도 꽃을 피워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벚나무가 있다. 그 나무 앞에 서면 꽃을 피워내기 위해 용을 쓰는 소리가 쟁쟁히 들릴 것도 같다. 강둑에 줄지어 선 벚나무는 마을의 큰 자랑거리다. 봄이 오면 어느 나무 할 것 없이 일매지게 꽃을 터뜨려 화사하고도 해사한 꽃 천지를 이룬다. 작년부터는 나무 아래 조명등을 설치하여 꽃이 피어 있는 동안은 밤낮으로 화려한 꽃 잔치를 벌인다. 꽃잎이 지고도 붉은색 꽃받침이 남아 또 한 번 꽃을 피우듯 온통 붉은 꽃 세상이 된다. 강둑을 다시 장식하면서 강물에 꽃 그림자를 드리운다. 꽃받침이 떨어진 자리에 뾰족뾰족 잎눈을 틔우다가 이내 풋풋하고 싱그러운 ..

청우헌수필 2023.05.12

음덕

음덕 집안 먼촌 할아버지뻘 되는 분이 나에게 조부님의 산소 비문을 써 달라는 청을 해왔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란 말을 누구한테서 듣고 부탁한다 했다. 글 쓰는 사람이긴 해도 그런 글을 써본 적 없다고 사양했지만, 같은 시조를 모시고 있고, 집안 내력도 모르지 않을 터에 자기 이야기를 들으면 쓸 수 있을 것이라며 강권했다. 살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아 세상을 떠나기 전에 조상을 높이 기리는 일을 해놓고 싶다 했다. 장손은 아니지만, 남은 자손 중에서는 가장 맏이로서 자신이 꼭 해야 할 일 같다고 했다. 내년 윤년을 맞아 비를 세우고 싶다 했다. 권에 못 이겨 써 보겠다 했더니 족보를 들고 찾아왔다. 어느 날 풍수를 좀 아는 분과 할아버지 산소에 함께 갔었는데, 묫자리가 어떠냐 물으니 한참을 둘..

청우헌수필 2023.04.23

세월의 얼굴

세월의 얼굴 한 달여 만에 이 선생을 다시 만났다. 전에 만났을 때부터 느껴져 온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다시 만나 한번 풀어보자 했다. 이 선생도 나도 반갑게 달려와서 만났다. 술잔을 부딪치고 기울이며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주제는 주로 ‘세월’이었다. 전번에는 다섯이서 만났다. 어느 날 문득 이 선생의 전화가 왔다. 웬일이야! 서로 놀랐다. 이십여 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보고 싶다 했다. 모두 어떻게 변했는지도 궁금하다 했다. 그래, 만나자, 만나 보자.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도 한번 들어보자 했다. 사십 년이 다 되어간다. 그때 우리는 모두 한 직장에서 생활하는 젊은 직장인들이었다. 할 일에 쫓겨 힘들었지만, 퇴근길에 이따금 삼삼오오 모여 잔을 함께 기울이면서 업무의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면서..

청우헌수필 2023.04.10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한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삼월, 마침내 봄이 온다. 냉기 가득한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해 나온 것 같다. 아직 완전히 통과한 것은 아니다.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달려가면 따스한 햇살이며 맑고 푸른 하늘이 나타날 것이다. 그 터널의 출구를 제일 먼저 틔운 것은 상사화 잎 움이다. 찬 바람 불고 눈발도 날려 아직도 겨울이 제 품새을 지키려 간힘을 쓰고 있는 어느 날 그 냉기를 뚫고 꽁꽁 움츠리고 있던 알뿌리에서 움을 밀어냈다. 저 움이 자라 치렁한 잎을 피워내다가 여름 들머리에서 잎을 다 거두고 꽃대를 밀어 올릴 것이다. 봄 하늘을 가장 먼저 연 사람은 마을 농군 정태 씨다. 올해부터 벼농사를 거두고 사과 농사를 지어볼 참이라며 굴착기를 동원하여 너른 논들을 파기 시작했다. 서너 자 깊..

청우헌수필 2023.03.26

당분간 끊어야겠어요

당분간 끊어야겠어요 권 선생께서 당분간 술을 끊어야겠다고 했다. 그 말씀에 나는 절망을 안아야 했다. 생애의 한 막을 내린 지 십수 년,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으로 한촌 산 마을을 찾아와 발을 내렸다. 푸른 산이며 맑은 물만 보며 살면 될 줄 알았다. 얼마 동안은 그렇게 살았다. 살 만했다. 여태 어지럽기만 했던 머릿속이 소쇄해지는 듯도 했다. 그런 재미로 살아가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사람이 그리워졌다. 산도 좋고 물도 좋지만, 그 자연 속에 자연 같은 사람도 있으면 더욱 좋겠다 싶은 마음이 소록소록 피어났다. 술잔이라도 함께 들며 살아온 일이며 한세상 살아갈 일을 더불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싶었다. 사람 들끓는 번잡한 세상을 벗어나고파 이리 살고 있으면서 이 무슨 잔망한 가탈인가. 자..

청우헌수필 2023.03.12

기다림에 대하며(5)

기다림에 대하며(5) 작은 기다림만 있으면 된다. 창창한 포부며, 우렁찬 이상이며, 풋풋한 희망이며, 달금한 꿈 들은 없어도 된다. 그런 것들이 새삼스레 찾아와 주지도 않겠지만, 찾아와 준대도 가볍잖은 짐이 될 것 같다. 해넘이 저녁 빛이 곱다. 저 해 저리 고운 빛을 뿌리기까지는 붉고도 푸른 꿈을 안고 지상으로 솟아올라 세상을 서서히 비추어 나가다가, 드디어 하늘 한가운데 이르러 모든 세상을 다 안아 보기도 하며 환호를 터뜨리기도 했을 것이다. 그 환희에 작약하고 있으려고만 하지 않았다. 넘어갈 줄도 알고, 질 줄도 아는 품새가 저 고운 빛을 그려 냈을지도 모른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저 해는 제가 만든 고운 빛 속으로 자태 곱게 들것이다. 홀가분해서 좋다. 한창때는 무거운 짐도 무거운 줄 모르고 지..

청우헌수필 2023.02.26

불의지병

불의지병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머리가 빙 돈다. 정신이 어지럽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방이 빙빙 돈다. 몸이 방 따라 마구 구른다. 일찍이 겪어 보지 못했던 일이다. 한참 동안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일어서려는데 몸을 바로 세울 수 없다. 서가를 잡고 의지해 겨우 일어섰다. 벽을 짚으며 쓰러질 듯이 화장실로 가서 양치하고 나와 물을 두어 잔 들이켰다. 맨손 체조했다. 정신이 약간 수습되는 듯했다. 세수하고 책상에 앉았다. 조금 진정되는 듯하여 잠시 책을 읽었다. 아침이면 늘 하는 대로 산책길을 나섰다. 두렁길 지나 마을공원에서 체조하고 강둑을 걸었다. 술 취한 사람처럼 걸음이 비틀거린다. 중심 잡기가 어렵다. 이대로 주저앉아 땅속으로 빨려들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정도의 ..

청우헌수필 2023.02.13

내가 남겨 놓은 것들

내가 남겨 놓은 것들 어느 날 아침, 날이 밝아와 눈을 떠보니 내가 죽었다. 날마다 해거름이면 아늑히 오르는 산을 올라 숲을 걷고 나무를 보며 상념에 젖다가 내려왔다. 몸을 씻고 이따금 즐겨 마시는 막걸리 한잔하고 잠이 들었다. 그 길로 길고 깊은 잠이 든 것 같다. 다양한 사회 경륜과 함께 장관도 지내고 테니스를 좋아했던 어떤 분은 어느 날 오전에 한 게임 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한 다음 와인 한잔하고 잠들었다가 그대로 영면했다 한다. 향년 88세였다 한다. 조용헌 명리학자는 그 죽음을 두고 거의 ‘신선급’ 죽음이라 했다. 나는 이렇다 할 경륜도 없고, 그분만큼 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딴은 산전수전 겪다가 물러나 산수 좋은 곳을 찾아와 살면서 이리 가니,..

청우헌수필 2023.01.28

그리움의 힘

그리움의 힘 고사목이 된 긴 소나무 하나가 누워 있다. 큰 소나무가 아니라 긴 소나무다. 길이가 네댓 길은 족히 넘을 것 같다. 굵기는 가장 밑동 부분의 지름이 고작 한 손아귀를 조금 넘어서고, 꼭대기 부분은 엄지손가락 굵기에 불과하다. 이 나무는 살아생전에 굵기는 별로 돌보지 않고 키만 죽을힘을 다해 키우려 했던 것 같다. 가지도 별로 없다. 주위에는 큰 나무들이 늠름히 서 있다. 아마도 이 나무는 큰 나무가 떨어뜨린 씨앗에서 생명을 얻어 움이 트고 싹이 솟아 나무의 모습을 이루어간 것 같다. 대부분 나무는 바람이나 무엇의 힘을 빌리더라도 자신의 종자를 멀리 보내기 위해 애를 쓴다. 어미의 발치에 나서 어미와 서로 빛과 양분을 다투어야 하는 몹쓸 짓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씨앗은 불행히(?)도 어..

청우헌수필 2023.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