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숲 인정 마을 숲 인정 -청우헌일기·30 이른 아침 마을 숲에서 울려나오는 요란한 기계소리가 마을의 고요를 들깨웠다.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였다. 앞가리개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쓴 남정네들이 짙어진 풀숲에 예초기를 들이대며 풀들을 잠재우 듯 쓸어나갔다. 느티나무며 소나무, 팽나무 노거수.. 청우헌일기 2013.07.14
벚꽃이 흐드러지면 벚꽃이 흐드러지면 -청우헌일기·29 다산(茶山)이 죽란시사(竹欄詩社)를 결으면서 ‘살구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이’자고 하였다. 우리는 못고개마을에 벚꽃이 흐드러지면 모이자고 했다. 다산의 모임은 시를 짓.. 청우헌일기 2013.04.22
보치기하던 날 보치기하던 날 -청우헌일기·28 “논 다래이라도 장만했는가베! 하하하” 논도 없는 사람이 보치기하러 나왔다고 사람들이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이른 아침에 ‘오늘 보치기를 할 것이니 아침을 먹고 연장을 들고 보로 나오라.’고 이장이 방송을 했다. 논들 봇도랑을 말끔히 쳐내고 보.. 청우헌일기 2013.04.15
눈 덮인 주지봉 눈 덮인 주지봉 -청우헌일기·27 오늘도 해 저물녘 주지봉을 오른다. 날마다 이맘때면 오르는 산봉우리다. 내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마치 소로(H.D.Thoreau)가 날마다 월든 호숫가를 거닐었던 것처럼-. 어제는 어느 도회지의 수필문학회 출판기념회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느라 오르지 못.. 청우헌일기 2012.12.30
가을 풍경화(4) 가을 풍경화(4) -청우헌일기·26 깊어가고 있는 가을, 아침 산책길을 나선다. 때를 따라 철을 두고 모습과 빛깔을 바꾸어내며 삶의 돋을무늬를 새겨주는 나의 길이다. 마을 앞을 지나노라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수많은 알전구를 달고 동네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감나무다. 집집마다 .. 청우헌일기 2012.11.06
가을 풍경화(3) 가을 풍경화(3) -청우헌일기·25 산에 들에 서늘바람이 불고서야 아내의 바람기가 겨우 진정되었다. 맑고 따사로운 갈바람이 불 때는 물론이거니와 선선한 색바람이 불 때까지도 아내는 집 안에 곱게 머물지를 못했다. 아내를 유혹해 내는 것은 밤나무였다. 아니 밤이었다. 아내는 하늘 푸.. 청우헌일기 2012.10.19
가을 풍경화(2) 가을 풍경화(2) -청우헌일기·24 아내의 텃밭에도 추수의 계절이 왔다. 삼십여 평이 될까 한 조그만 텃밭에, 파, 고추, 가지며, 배추, 상추며, 참깨, 들깨며, 콩, 목화, 고구마 등 두어 골씩 십여 가지를 심고 호박으로 가장자리를 둘렀다. 참깨는 벌써 추석 전에 베 내어 말려서 털었다. 한 됫.. 청우헌일기 2012.10.08
가을 풍경화(1) 가을 풍경화(1) -청우헌일기·23 하늘이 높고 푸른 초가을 날이었다. 옆집 성씨네가 산에 가보자 했다. 가을 딸 게 있을 거라고 했다. 두 집 내외 함께 장대와 낫을 들고 배낭을 챙겨 뒷산 고갯길로 향했다. 벼 이삭이 한껏 고개를 숙인 논들이며 주렁주렁 사과가 달린 과수원을 지난다. 무.. 청우헌일기 2012.09.26
태풍이 지나간 자리 태풍이 지나간 자리 -청우헌일기·22 천지를 온통 뒤엎을 것 같았다. 이 비바람 지나고 나면 세상 모든 것이 된통 바뀌어 있을 것 같았다. 있었던 것은 다 없어지고 모두 낯선 것들이 들어앉을 것 같았다. 그렇게 폭풍이 휘몰아치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맑은 해.. 청우헌일기 2012.09.17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청우헌일기·21 며칠째 주지봉을 오르지 못했다. 주지봉을 못 올랐다는 것은 하루 생활 중에서 가장 큰 의의를 잃어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루를 어떻게 지냈든 저녁 답에 주지봉을 올랐다가 내려와야 하루를 제대로 산 것 같은 생각과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답답.. 청우헌일기 2012.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