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가을 풍경화(2)

이청산 2012. 10. 8. 14:46

가을 풍경화(2)
-청우헌일기·24

 

 아내의 텃밭에도 추수의 계절이 왔다. 삼십여 평이 될까 한 조그만 텃밭에, , 고추, 가지며, 배추, 상추며, 참깨, 들깨며, , 목화, 고구마 등 두어 골씩 십여 가지를 심고 호박으로 가장자리를 둘렀다. 참깨는 벌써 추석 전에 베 내어 말려서 털었다. 한 됫박은 좋이 나왔다고 기뻐했다. 깨를 베어낸 자리에는 얼갈이용 배추와 무를 심었다.

고구마를 캤다. 단 두 골 심은 것이지만 줄기는 무성했다. 우거진 덤불을 걷어내고 호미로 골을 헤집어 팠다. 붉은 알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놈도 있지만, 제법 커서 주먹만 한 놈도 있다. 단단한 땅을 어떻게 뚫고 내려앉았던지 호미질을 몇 번이나 해도 나와 줄 생각을 하지 않는 놈을 힘들여 캐내기도 했다.

아내는 캐낸 고구마 무더기를 보더니 10,000원어치쯤은 되겠다고 했다. 봄에 장에 가서 모종 9,000원어치를 심었으니, 1,000원은 남았다며 웃었다. 또 남길게 있다고 했다. 고구마 덤불에서 줄거리를 모두 훑어 잎은 문질러 냈다. 껍질 까서 데쳐 내면 맛있는 나물이 된다는 것이다. 줄기를 부지런히 훑었다. 바구니 하나 가득 찼다. 이렇게 많은 줄거리에다가, 일하는 재미까지 남았으니, 아주 큰 수확이라며 다시 웃었다. 좀 있으면 들깨도, 콩도 거두어야 하고, 고추도 따내야 하는데, 그 때는 남는 게 더 많을 거라며 또 한 바탕 웃었다.

웃으면서 바라보는 저 아래 들판에는 서서히 황금의 빛깔이 칠해지고 있었다. 여름 내내 싱그러운 초원이 보는 이의 마음을 청량감에 젖게 하더니, 이제는 황금빛이 보는 것만으로도 유족에 젖게 한다.

최 씨는 쓰러진 벼를 기어이 다 세웠다. 지난 태풍 때 유독 최 씨 논의 벼만 죄다 쓰러져 버렸다. 비료 좀 많이 치는가 싶더니 저렇게 쓰러져 버렸다고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최 씨는 그 안타까움을 등에 진 채 몇 날 며칠을 두고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구슬땀을 흘리고 있던 최 씨에게 반가운 일손이 찾아들었다. 군인들이 와서 힘을 보태주는 것이다. 몇 날 며칠의 일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최 씨는 그제야 허리를 펴고 땀을 닦았다. 군인들은 고맙게도 다른 논의 쓰러진 벼들도 다 세워주고 갔다.

쓰러진 논들의 벼가 그렇게 일어설 무렵, 이 씨의 논에 콤바인이 들어왔다. 벼를 거두어 삼킨 콤바인은 짚과 알곡을 토해냈다. 조생종 찰벼라 조금 일찍 벤다고 했다. 마을의 올해 첫 벼 베기다. 길바닥에 널려진 토실한 알곡은 맑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빛을 냈다. 첫 수확이 아주 충실하다며 마을사람은 제 것인 양 좋아했다.

성 씨가 먼 길을 떠났다. 퇴임 전의 직장이 있었던 곳으로 갔다. 성 씨는 벼의 품종, 품질을 감별하는 전문가다. 재직 중에 얻은 지식과 실력의 결과다. 해마다 벼를 매상할 철이 되면 감별을 해달라며 그 지역 농협에서 의뢰가 온단다. 시월 한 달은 꼬박 해내야 하는 일이라며 여장을 단단히 꾸려 떠났다. 비오는 날이 쉬는 날일 뿐, 맑은 날이면 휴일도 없단다.

성 씨가 떠난 마을은 좀 허전했다. 그는 벼 감식도 잘 하지만 쌀로 술을 빚는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의 조그만 주조 연구실은 가끔씩 동네사람들의 사랑방 노릇도 한다. 그가 빚은 술을 함께 나누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성 씨가 없으니, 무슨 술로 어디에서 모여 앉을까. 자리며 술이야 어디엔들 없으랴만, 늘 앉고 마시던 그 자리 그 술 같을까.

마당 원탁에 돼지고기를 좀 삶아 놓고 그의 환송회 자리를 마련했다. 이웃 몇과 부인네들도 함께 앉았다. 역시 그가 빚은 술로 잔을 들어 장도를 축복했다.

이기(이것이) 다 가을 자알(잘) 하자 카는 거 아이가! , 모두 조흔(좋은) 수확을 위하여-!”

조 씨가 제의했다. 성 씨도 지식 추수를 나서는 길이고, 들판의 것들도 곧 털어내야 할 것이니, 모두 무사하고 풍성한 추수를 비는 건배를 하자는 것이다. 함께 든 잔을 내리고는 흐드러진 홍소를 손뼉에다 모았다.

누구네 나락은 떡 벌어지게 잘 되었더라는 둥, 그렇지 못한 집도 있더라는 둥, 누구는 올 가을에 돈 좀 살 거라는 둥 추수에 대한 이야기판이 벌어졌다.

누구네는 언제 트랙터를 불러 타작하려는데, 매상 등급 좀 잘 받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 성씨도 검사하러 가거들랑 등급 좀 잘 매겨 줘!”

무턱대고 봐주면 되나! 질이 좋아야지!”

내 곡식 등급이 시원찮다고 생각해 봐!”

그래도 검사는 똑바로 해야 하는 것이여! 하하하

, 잘 보고 원성 안 사도록 애쓰겠습니다. 허허허

술잔을 들어 잦고 권키를 거듭 하는 사이에 전등불은 점점 빛을 더해 갔다. 별은 인간 세상의 이야기를 엿듣기라도 하려는 듯, 빛을 고추 세우며 땅의 일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잘 갔다 오라고. 추수에 수고하라고 서로 손을 잡는데, 숨어 있던 풀벌레들이 별빛 같은 소리를 찬연하게 자아냈다.(2012. 10. 6)

                                                                       

 

'청우헌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풍경화(4)  (0) 2012.11.06
가을 풍경화(3)  (0) 2012.10.19
가을 풍경화(1)  (0) 2012.09.26
태풍이 지나간 자리  (0) 2012.09.17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0) 2012.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