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눈 덮인 주지봉

이청산 2012. 12. 30. 18:45

눈 덮인 주지봉
-청우헌일기·27

 

 오늘도 해 저물녘 주지봉을 오른다. 날마다 이맘때면 오르는 산봉우리다. 내 삶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마치 소로(H.D.Thoreau)가 날마다 월든 호숫가를 거닐었던 것처럼-.

어제는 어느 도회지의 수필문학회 출판기념회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느라 오르지 못했다. 이 한촌에서 도회지에 한번 다녀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다른 볼일도 좀 볼 겸 아침을 서둘러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마을버스로 읍내에 나가 시외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로 먼저 가는데 끄느름한 하늘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 도시에 이를 무렵 한두 점 눈이 흩날리더니 볼일을 마칠 무렵에는 제법 많은 눈이 내려앉고 있었다.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도시로 가는 차를 타기 위해 시외버스 정류장에 이르렀을 때는 발차 시각표가 무용지물이 되어버리고 세상은 하얗게 변해 갔다. 그래도 약속 시간까지는 제법 여유가 있어 느긋하게 기다려 차를 탔다. 세상은 점점 더 하얘지고 차는 제 걸음을 잡지 못했다. 한 시간도 안 걸릴 거리를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넘어갔다.

여섯 시 반부터 시작하는 행사에 수필을 낭독하기로 되어 있는데, 어느덧 여섯 시가 넘어서 버렸다. 조급해지는 마음을 못 이기어 주최자에게 전화하여 순서를 뒤로 좀 돌려 달라하고 눈을 감았다. 지금쯤 주지봉 가는 길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그 산골짝에는 더 많은 눈이 내리고 있겠지, 길도 다 묻혀 버렸을 거야. 내일 내가 첫 발자국을 찍게 될까.

다시 마음이 조급해졌다. 행사 시간을 못 맞출 것 같아 조급했고, 눈 내린 한촌으로 얼른 돌아가고 싶어 조급했다. 주지봉 산자락이며 산에서 내려다보는 마을 설경을 떠올리며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고 애썼다.

우여곡절 끝에 행사장에 도착했을 때는 모든 의례가 끝나고 이미 내 순서는 넘어가 있었지만, 험로를 헤치고 달려온 반가움에 대한 박수 속에서 숨을 크게 내쉬며 무대에 섰다.

잔잔하게 깔려지는 배경 음악과 함께 ……내일 아침에도 유홍초며, 메꽃, 물봉선과 눈인사를 나누며 물 맑게 흐르는 강둑을 걸어야겠다.”라며 나의 아침 산책길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낭독은 끝났지만, 마음은 벌써 눈 덮인 해거름 주지봉 산길을 걷고 있었다.

밤을 도회지에 갇혀 있다가 이튿날 눈길을 기다시피 달리는 차를 타고 삶의 터 한촌으로 돌아왔다.

해거름을 기다려 주지봉으로 향했다. 동네 고샅을 지나 주지봉 자락 앞에 섰다. 길도 낙엽도 마른 수풀도 없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나무들이 좌복처럼 깔린 하얀 발판 위에 기도하듯 서 있을 뿐이었다.

저 하얀 것 위로 내가 새 길을 내며 올라야 한다. 새하얀 세상에 내가 맨 처음의 발자국을 찍는다는 것이 설레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순정에 누를 끼치는 것 같아 조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 길이 내가 최초는 아니었다.

고라니일지, 너구리일지, 먹이를 찾아 헤맸을지, 하얀 길이 좋아 거닐었을지, 앙증스런 발자국들이 종종 길을 따라 나있다. 이 또한 순정한 자연이라 생각하니 차가운 것 위에 찍힌 것이 오히려 따뜻해 보여 내딛는 내 발자국에도 온기를 더해 주는 것 같다.

짐승의 발자국은 나무들 사이로 사라지고, 봉우리를 바라보며 걸음을 내딛는다. 조그만 산새들은 지상의 하얀 것도 아랑곳없이 나뭇가지 사이를 포롱포롱 날아다닌다. 눈꽃을 낙화지우며 날아다니는 새를 보다가 문득 길을 잃는다. 어디로 오르더라? 어딜 봐도 새하얀 설원뿐이다.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게 하는 눈길 위에서 노심하던 지난밤이 떠오른다. 주지봉을 오르는 길은 잃어도 마음의 안정을 잃을 일이 없다.

숲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어느 때고 값진 경험이요, 실로 놀랍고도 기억해 둘만한 경험이다.”라 한 소로의 말이며,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라는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날 뿐이다.

저 아래 고속도로에 차들이 기계음을 날리며 눈길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다. 순백한 설원을 끼고 달리는 차들이 뿌리는 소음들이 오늘은 지난밤 출판기념회에서 내가 낭송한 수필 뒤에 깔리던 음악의 선율같이도 들린다.

계단 길이 발 앞에 우뚝 선다. 횡목 위에 켜켜이 눈이 쌓여있다. 내 생애의 켜 위에 쌓인 하얀 기억들인 것 같다. 명암과 굴곡을 지우며 생애의 나이테들을 싸고 있는 수많은 기억들이 때로는 저 계단 길 위에 쌓인 눈처럼 하얗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백지가 온 생애를 덮고 있는 듯이 느껴질 때가 있다.

저렇게 하얀 나라에서 하얗게 살고 싶을 때가 있다. 어느 시인이 갈구했던 것처럼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하고 생각이 될 때가 있다.

그 하얀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때로는 미끄러지는 발을 다시 올리기도 하며 주지봉을 오른다, 미끄러진다 한들 모두 나의 발자국이고 나의 시간들이다. 지난밤의 일처럼 넘어버린 내 순서 뒤에서 문득 나타나야 할 일도 있지 않다.

드디어 정상이다. ‘주지봉표지석이 하얀 세상을 내려다보며, 하얀 세상 위에 뿌리를 박고 의연히 서있다. 저 먼 산도, 그 산 아래 마을도, 마을 앞의 들판도 모두 하얀 세상이다. 눈부신 평화의 세상이다. 쾌재를 부른다. 저 평화가 좋아 날마다 오르는 봉우리지만, 오늘 봉우리가 더욱 생기롭다. 더욱 평화로운 세상을 펼쳐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보고 살면서, 때로는 세상과 떨어져 세상을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산봉우리를 오른다. 주지봉을 오른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볼 때보다, 세상과 떨어져서 세상을 볼 때 세상은 더욱 아름답다. 언제나 주지봉은 내가 뿌리박고 있는 삶의 터를 아름답게 보여준다. 눈 덮인 오늘은 더욱 아름다운 평화를 보여준다.

해가 주홍색 넓적한 보자기를 펼치듯 노을을 펼쳐내며 백화산 마루를 넘고 있다. 봉우리 하얀 빛도 노을에 젖는다. 나도, 내 생애까지도 노을에 젖어 간다. 봉우리가 펼쳐내는 아름다움과 평화를 아름 가득 안고 봉우리를 내려온다.

해가 넘어간다. 하얀 산 빛이 조심스러워서일까. 해가 제 갈 곳을 가도 땅거미는 쉽사리 지상으로 내려앉지 못한다. 바쁠 것도 없는 걸음으로, 순서를 놓칠까봐 조바심할 것도 없는 걸음으로 주지봉을 내려온다. 찍어 둔 발자국이 있어 올려 디딜 때보다는 내려딛는 걸음이 한결 아늑하다.

지나온 생애를 돌아보듯 찍어온 발자국을 다시 찍으며 동네에 이른다. 고샅엔 앞집 뒷집 오고간 발자국이 정답게 찍혔다. 온기어린 발자국들이다. 주지봉에 걸어 둔 생애의 날을 등에 지고 발자국들의 온기 속으로 든다.

며칠 안 남은 한 해가 나에게서 또 아득히 빠져 나가던 어느 날-.(2012.12.28)

 

* 인용시 :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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