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가을 풍경화(1)

이청산 2012. 9. 26. 13:41

가을 풍경화(1)
-청우헌일기·23

 

 하늘이 높고 푸른 초가을 날이었다. 옆집 성씨네가 산에 가보자 했다. 가을 딸 게 있을 거라고 했다. 두 집 내외 함께 장대와 낫을 들고 배낭을 챙겨 뒷산 고갯길로 향했다. 벼 이삭이 한껏 고개를 숙인 논들이며 주렁주렁 사과가 달린 과수원을 지난다. 무얼 그리 많이 따겠다고 나는 자전거를 끌고 성씨는 손수레를 앞세웠다.

강풍을 못 견뎌 쓰러진 채 그대로 누워 있는 벼들이며, 꽁지머리 묶듯 서로 묶어 세워놓은 벼들이 지난 태풍의 상흔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논의 벼들은 아무런 상처도 없이 말짱하게 서있는가 하면, 벼가 온통 다 쓰러진 논도 보인다.

너무 쉽게 살려고 해도 안 되지…….” 성씨가 말했다.

비료나 농약을 너무 많이 치면, 병해 없이 자랄 수는 있어도 오히려 연약해져 바람에 잘 쓰러지기 쉽다고 한다. 좀 힘이 들더라도 제 때에 물 대주고 매주고 해야 튼튼하게 클 수 있다는 것이다. 저런 것도 모두 가꾸는 사람 발자국 소리 듣고 크는 것이라 했다.

과수원의 사과가 한창 튼실하다. 조생종은 벌써 많이 팔려 나가기도 하고, 태풍을 대비하여 미리 따낸 것도 있지만, 홍옥은 아직 늘어진 가지에 달려 따끈한 햇살을 받으며 붉은빛을 더해 가고 있다. 우지직 한 입 베어 물고 싶어 군침이 돈다.

저 나무는 왜 저 모양인가. 붉은 봉지를 씌워 한창 익혀 가고 있는 사과밭 건너 쪽 밭 사과나무는 노쇠한 가지에 조약돌만한 사과가 아직도 앳된 모습으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가지 아래에는 잡풀이 무성하다.

땅만 탐 내놓고는 저렇게 팽개치네.” 도회지 사람이 과수원을 사놓고는 저리 무참하게 버려둔다는 것이다. 나무는 제가 버려진 것도 모르고 생명 현상을 누르지 못해 저렇게 열매를 내밀었건만 버림받은 사생아처럼 애처로운 삶의 고투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빛과 그림자가 함께 그려져 있는 가을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농로 끝에 자전거며 손수레를 세우고 배낭을 짊어지고 낫과 장대를 든다.

골짜기 어귀에 듬성듬성 서 있는 뽕나무 사이로 얼기설기 짙은 수풀 속에 연고동색 조그만 삿갓을 쓴 버섯들이 여기저기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이름은 모르지만 늘 따서 먹는 것이라며 성씨가 수풀을 헤치고 들어간다. 나도 따라며 주섬주섬 따기 시작한다.

여태껏 살아도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 참 많은 내가 성씨를 따라 생애의 첫 경험에 나선다. 손끝에 닿은 버섯의 감촉이 너무나 보드랍다. 여인의 살결 같은 느낌이 촉수를 자극한다. 행여 다칠세라 조심스런 손길로 몇 개 따서 수풀을 나올 때 가시넝쿨이 이리저리 옷깃을 잡아챈다.

골짜기로 든다. 주지봉을 올랐다가 늘 내려오는 길을 두고 옆 능선 따라 내려올 때 가끔씩 지나오는 등산로이기도 하다. 달포 넘게 걸음하지 않았더니 어느새 풀숲이 자욱해져버렸다.

낫을 들어 수풀을 쳐나가며 골짜기를 드는데, 갑자기 터져 나오는 부인네의 비명 소리-. 나뭇가지 사이에 어름이 숭숭 많이도 달려 있다며 탄성을 지른다. 밤나무 아래에는 토실하게 벌어진 송이밤이 탐스럽게 내려앉아 있단다.

그렇거나 말거나 나의 등산길이 온갖 푸나무로 자욱이 절여 있는 걸 보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다. 좀 있으면 울긋불긋 홍록의 빛깔들이 온 산을 덮을 텐데 이리 길이 막혀 어찌할꼬. 아낙들은 숲 어디에 들었는지 보이지 않는데, 조붓한 길이라도 틔우기 위해 낫을 휘둘러 얽히고설킨 수풀들을 쳐낸다. 가시에 찔리기도 하며 걷어내어 가다가 온몸이 땀에 흠씬 젖을 즈음 고갯마루가 나타난다.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다.

성씨도 보이지 않더니, 이윽고 긴 나무둥치 하나를 힘들게 메고 수풀 속에서 나온다. 집 대문간 문설주에 걸쳐놓을 거라고 한다. 참나무 고사목인데 하얗게 말라 있는 모습이 문간 장식으로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함께 와도 관심이 다르다. 한촌의 산이며 바람이 좋은 나는 내 다닐 길이 중하고, 만들고 빗는 일을 좋아하는 성씨는 또 무얼 하나 만들 수 있는 소재가 중했다. 서로 한 일을 돌아보며 웃을 때, 아낙네들이 소리쳐 부른다. 따고 주워 놓은 것을 함께 가져가잔다.

숲을 헤치고 들어가니 밤이며 어름을 잔뜩 따서 주워 놓았다. 벌어진 껍질 안에 까만 씨를 품은 하얀 어름 알속이 얼음과자처럼 달고 시원하다. 금방 가시송이를 깨고 나온 알밤이 반짝이는 빛을 낸다. 배낭에 넣기도 하고 보따리에 싸기도 하여 숲을 나올 때, 요란한 새소리가 숲을 흔든다.

모두들 하나씩 메고 들고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골짜기를 나오니 해가 설핏 고갯마루에 내려앉으려 한다.

당신 자전거 타고 가서 시원한 술 좀 구해와요.” 자기도 술을 좋아하지 않고 내가 술을 좋아하는 것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아내가 놀라운 제안을 한다. 웬일이야!

알았다하고는 얼른 달려 동네로 나와 다리 건너 큰마을 가게로 내달아 맥주 몇 병과 안주를 구했다. 달려왔던 길을 되짚어 골짜기 어귀로 가니, 과수원길 맨바닥에 주저앉아 어름과 밤을 까고 깎아놓고 기다리는데, 숲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둘러서서 구경거리인 듯 내려다보고 있다.

술을 못하는 부인네들도 조금씩, 남정네는 넘치게 부어 잔을 부딪친다.

얼마나 좋아! 위하여~!” “뭐가 좋고, 뭘 위해!? 하하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같이 외치고 함께 웃었다.

이제 보니 아무 소출 없는 일에 땀만 빼셨네!” 땀 흠뻑 배어나온 성씨와 나의 등판을 보며 아내가 소리쳤다.

무슨 말씀! 좋아하는 일일수록 정성을 다해야지요. 저 사과나무 안 보여요? 나락이고 사과고 그냥 크는 줄 알아!”

성씨가 잡초 속에 방치된 애처로운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외친다.

맞아! 그 건 그래! 하하하

등성이에 걸려 있던 해는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를 단풍 빛 노을 자락에 싸안고, 고갯마루를 넘어선다.

초가을 풍경화도 미소 젖은 발그레한 얼굴들을 그려내며 땅거미 살포시 내려앉는 고샅 속으로 잠겨들고 있다.

 

늦은 오후의 가을 햇볕은

멀어지려 해도 멀어질 수 없는 우리들의 손을 붙잡게 하고

끝내 사랑한다 한마디로

옹송그린 세월의 어느 밑바닥을 걷게 하다.

                                -고운기. 가을 햇볕 (201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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