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태풍이 지나간 자리

이청산 2012. 9. 17. 12:48

태풍이 지나간 자리
-청우헌일기·22

 

 천지를 온통 뒤엎을 것 같았다. 이 비바람 지나고 나면 세상 모든 것이 된통 바뀌어 있을 것 같았다. 있었던 것은 다 없어지고 모두 낯선 것들이 들어앉을 것 같았다.

그렇게 폭풍이 휘몰아치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맑은 해가 떠올랐다. 그러나 햇빛이 내려앉는 지상에는 아무 일도 없는 게 아니었다.

논들엔 나락들이 쓰러지고 연못엔 꽃잎이 다 지고 잎사귀가 찢어졌다. 과수원엔 과일이 떨어지고 붙어 있는 것도 생채기가 많이 났다.

마을 숲엔 고목의 가지가 맥없이 부러지고, 노거수에서 내려앉은 가지들이 마을의 안녕을 지켜 주는 제당(祭堂)을 덮쳐 버렸다.

마을사람들의 일손이 바빠졌다. 낙망할 겨를이 없었다.

이만 하길 다행이구만!’ 스스로 위로하기도 잊지 않으면서 손들을 바삐 움직여 나갔다.

우선 낙과를 얼른 주워서 쓰고 못 쓸 것을 골랐다. 못 쓸 것은 버려야 할 일이지만, 쓸 만한 것은 상자에 담아 농협으로 달려갔다. 떨어지지 않고 달려 있는 것들이 고마웠다.

쓰러진 고춧대를 일으켜 세워 다시 묶었다. 고추가 많이 떨어졌다. 떨어진 것 중에서도 먹을 만한 것은 골라 담는다.

논으로 달려간다. 쓰러진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 다행이다. 지난여름 비는 오지 않고 햇볕이 한창 쨍쨍거려 논밭을 태울 때, 우리 마을은 복 받은 마을이라고 했다. 강이 바로 앞에 있어 봇도랑엔 언제나 강물이 흘러들어와 논들을 적셔 주었다. 그 때 물을 충실히 먹은 탓일까, 대부분 것들이 아주 잘 버텨 주었다. 쓰러진 것을 서로 묶어 일으켜 세운다.

저기 어디에는 온 논들이 다 쓰러졌대. 하우스도 다 날아갔다지?”

더 심하게 피해를 본 곳을 생각하며 위안을 얻는다. ‘복 받은 마을이라는 긍지(?)가 태풍의 생채기조차도 따뜻한 위안으로 바뀌게 했다. 그 따뜻한 마음들이 마을 풍경을 정겹고도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무엇으로 저 정겨운 풍경 속을 들 수 있을까.

마을 사람들이 논들로 과수원으로 달려 갈 때, 나는 마을 숲 제당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은 제당에까지 손쓸 겨를이 없을 터였다.

정월 대보름 동제 때 나는 축관이었다. 마을을 겨우 한 해 밖에 살지 않은 나에게 축을 맡겨주는 것이 고마워 정성을 다해 독축하며 마을의 번성을 기원하였었다.

사람들은 순후했다. 네 것, 내 것 가림 없이 나누기를 좋아하는 그 순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새가 날개를 벌려 마을을 아늑히 감싸고 있는 듯한 지형 때문일까. 사철을 두고 언제나 넘실넘실 흘러가는 봇도랑의 물 때문일까. 수백 년을 두고 마을을 지켜온 노거수가 안녕을 빌어주기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단을 덮고 있는 커다란 나뭇가지를 끌어내어도 움찍 않는다. 가지 몇을 힘주어 잘라 겨우 끌어내고, 잔가지를 하나하나 주워냈다. 이마와 등판에서 상쾌한 땀이 배어 나왔다. 제단에는 동제 때 흘러내린 촛농이 그대로 붙어 있다. 제단 주위의 잡풀들을 뽑고 제단석을 쓸어내면서, 감사의 마음을 모았다.

동신(洞神)이시여! 좋은 사람들이 사는 이 좋은 마을에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날도 그리하셨던 것처럼 앞날도 두고두고 인심도 아름답고 풍경도 아름답게 지켜주소서!……

제단 주위를 다시 정갈하게 쓸고 울타리의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푸른 하늘에서 헹구어낸 듯한 햇살이 제단 위에 살포시 내려앉는. 상크름한 바람이 맑은 햇살 속으로 스며왔다.

제당을 나와 벼 이삭이 치렁한 논두렁길을 지나는데 최 씨가 이웃과 함께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수고 많습니다!”

뭘요! 이래야 한 이삭이라도 더 먹지요

최 씨 이마의 굵은 땀방울이 토실한 벼 이삭 위로 툭! 떨어졌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땀방울이 내려앉고 있다.(201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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