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가을 풍경화(4)

이청산 2012. 11. 6. 11:31

가을 풍경화(4)
-청우헌일기·26

 

 깊어가고 있는 가을, 아침 산책길을 나선다. 때를 따라 철을 두고 모습과 빛깔을 바꾸어내며 삶의 돋을무늬를 새겨주는 나의 길이다.

마을 앞을 지나노라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수많은 알전구를 달고 동네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감나무다. 집집마다 잎 다 지고 알감만 달고 서 있는 품이 마치 흥성한 축제장의 찬란한 장식등 같다. 아침부터 무슨 축제를 저리 벌이고 있는가.

논두렁길을 걷는다. 엊그제는 요란한 콤바인 소리가 들판을 가르더니 오늘은 알곡 떨어낸 볏짚들이 이불처럼 논들을 덮고 있다. 들판이 무서리 하얀 볏짚 아래 포근히 잠들어 있다.

마을 숲에 든다. 숲은 느티나무 회나무 노거수가 떨어뜨린 침향색 잎들로 질펀하다. 은행나무는 잎을 다 떨어뜨려 제가 선 자리를 샛노랗게 물들여 놓고 있다. 부드러운 감촉이 발바닥을 간질인다. 밟히는 소리가 나긋하다.

강둑 위로 올라선다. 유홍초며 달맞이꽃이 자취를 감추어가는 자리에 쑥부쟁이며 구절초가 해맑은 얼굴을 내밀고 있다. 무성한 회갈색 억새 사이로 맑게 흐르는 강물을 따라 강둑을 흐르듯이 걷는다.

문득 그리운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나직한 소리로 속삭이는 듯도 하고, 맑고 도렷한 소리로 그리움을 풀어내는 듯도 하다. 반가운 마음에 눈길을 돌려보면 여물게 흐르는 물소리만 삽상하다. 물은 자갈돌을 쓰다듬으며 억새 사이를 지나 보에 이른다.

봇물 속에는 새붉은 꽃이 행렬을 지어 피어있다. 강둑에 선 벚나무 그림자다. 벚나무는 한 해 두 번 꽃을 피운다. 봄에는 송이송이 희붉은 꽃 이파리를 날려 가슴을 흔들더니, 이 가을에는 잎잎이 붉디붉은 꽃을 피워 눈길을 빛나게 한다.

고요한 봇물이 파문을 지으며 갈라진다. 어디 있다가 이 깊은 가을 속을 날아왔는지 원앙 몇 쌍이 짝지어 놀고 있다. 한 놈이 앞서면 또 한 놈이 따르고, 따르던 놈이 길을 벗어나면 앞서던 놈이 얼른 방향을 돌려 뒤따라간다. 고개를 서로 비비대던 놈들이 무슨 밀담이나 나눴는지 푸드덕 날아 억새 숲으로 든다.

강둑을 내려와 들길로 든다. 잘 빗은 쪽머리 가르마처럼 곧게 난 길을 따라 들판을 가로지른다. 싱그러운 초원을 이루던 시절도, 황금의 물결이 넘실대던 시절도 다 흘러갔지만, 넉넉한 가슴 활짝 열고 푸른 물이 주룩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을 듬뿍 안고 있는 들판이다.

알곡을 다 털어 주었다고 해서 들판의 일이 끝난 건 아니다. 베일러라는 기계가 또 한 번 논바닥을 휘젓는다. 누워 있는 볏짚들을 일으켜 세워 제 품에 쓸어 넣어서는 각을 지우거나 둥글게 지운 무덕을 토해낸다. 무덕진 짚단들이 용사의 훈장처럼 들 가운데 우뚝 우뚝 서 있다. 누가 저 훈장을 거두어 갈 것인가.

둥근 짚단들은 마치 얼굴에 분칠한 듯 하얀 비닐천에 둘둘 감긴 채 데려갈 이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집 외양간으로 실려 가서 짐승의 속을 채웠다가 다시 사람들의 속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다시 벼를 심고 키우고 알곡을 털고 볏짚을 들판에 눕힐 것이다. 돌고 도는 삶이다. 내 삶도 그렇게 돌고 돌까.

한 노친네가 누워 있는 볏짚을 헤치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기계가 알곡을 미처 다 훑어 내지 못한 이삭을 골라내고 있다. 오랜만에 보는 이삭 줍는 모습이다. 궁핍했던 지난 시절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닭을 주려고 줍는 것이라 했다. 아무려나 한 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노친네의 마음이 모닥불 속의 잉걸처럼 살뜰하고 따뜻하다.

들길에서 고개를 들면 문득 다가서는 색색의 찬란한 산! 산의 꽃은 봄에만 피는 게 아니었다. 진달래꽃, 싸리꽃, 산벚꽃이 핀 봄보다 더욱 찬란하다. 나무에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온통 꽃다발이다. 세상의 빛깔이란 빛깔들이 모두 한데 모인 빛깔의 전시장 같다.

누가 서리 맞은 단풍잎이 봄꽃보다 더 붉다[霜葉紅於二月花]고만 하였는가. 붉은가 하면 푸르고 누른가 하면 붉고, 명도와 채도를 달리하는 붉고 푸르고 노란 것들이 엉겨 수많은 색깔을 자아내고 있다. 깊어가는 이 가을도 저리 현란하거늘 한창 익던 가을에야 어떠했을까.

누구라도 불러 함께 봤으면 좋겠다. 그리운 사람이면 더욱 좋겠다. 저 빛깔 만이랴. 이 길을 꾸미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함께 봤으면 좋겠다. 함께 설레었으면 좋겠다. 새로운 그리움이 새록새록 피어나겠다. 저 빛깔처럼 현란한 그리움이 돋아나겠다.

길을 걸어갈수록 동네로 다가설수록 빛은 점점 찬란해지고, 사람들의 모습이 따스하게 다가온다. 콩대를 가득 실은 경운기가 지나가고, 호박을 잔뜩 담은 손수레가 지나간다. 수레를 잠시 멈춘 손길이 어느 집 문 안으로 두어 덩이 호박을 슬쩍 밀어 넣는다. 산천도 동네도 온통 축제 판이다. 찬란하고 따뜻한 축제 판이다.

한촌의 가을 산책길은 부요하다. 길을 장식하고 있는 모든 모습이며 빛깔들이 부요하고, 그 모습과 빛깔이 자아내는 정감이 부요하다. 찬바람이 불어온다. 철이 바뀔 차례라는 말이다.

오는 철에는 어떤 부요가, 어떤 풍경이 나의 산책길을 장식해 줄 것인가. 또 어떤 삶의 돋을무늬가 새겨질 것인가.(20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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