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보치기하던 날

이청산 2013. 4. 15. 07:59

보치기하던 날
-청우헌일기·28

 

논 다래이라도 장만했는가베! 하하하

논도 없는 사람이 보치기하러 나왔다고 사람들이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이른 아침에 오늘 보치기를 할 것이니 아침을 먹고 연장을 들고 보로 나오라.’고 이장이 방송을 했다. 논들 봇도랑을 말끔히 쳐내고 보에 있는 물문을 열어 물이 흐르게 하는 일을 보치기라고 했다.

엊그제는 몽리민 회의를 했다. 봇도랑의 물을 끌어 농사를 짓는 사람들(몽리민)이 모였다. 논일 철을 앞두고 보치기를 어떻게 할 것이냐를 의논했다. 평당 얼마씩 추렴하여 일손을 사서 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늘 해오던 대로 날을 받아 봇도랑 물을 쓰는 사람들 모두 나와 손을 모으자고 결론이 났다.

누가 날 참 잘 받았네! 풍년 들 징조구만!”

논갈이가 모두 끝나고 사월이 중순에 들어서는 데도 며칠을 두고 쌀쌀한 꽃샘바람이 불고 눈비까지도 치더니, 오늘은 화창한 하늘에 씻은 듯 맑은 햇살이 명지바람을 안고 아늑히 내려앉았다. 하늘도 우리 동네 보치기 날을 아시는가.

내가 삽을 들고 나서니 논일할 땅이 있지도 않은 사람이 나왔다고 모두들 정담을 한마디씩 안긴다. 겨우내 내려앉은 돌덩이며 나뭇가지, 쓰레기며 마른 풀줄기들을 긁어내고 끌어올리며 도랑을 거슬러 올라갔다. 도랑가의 마른 풀들도 걷어냈다. 물을 흘리면 떠내려 갈 거니까 웬만한 건 두라지만, 쓰레기만은 알뜰하게 끌어 올리고 싶었다.

드디어 물문 앞에 이르렀다. 물문은 두 개가 있다. 보 바로 옆에 앞 물문이 있고 조금 내려와 기계장치가 되어 있는 본 물문이 있다. 앞 물문은 쇠문을 여러 사람이 울력으로 들어서 열고, 본 물문은 보주가 자물쇠를 풀고 기계를 열어 핸들을 돌려 문을 들어올렸다.

보에 고요히 갇혀 있던 물이 몸 달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듯 물문을 향하여 힘차게 빨려 들어갔다. 물문을 나선 물은 달리기 경주라도 하듯 줄달음으로 봇도랑을 내달았다.

그래, 잘 흘러 올 농사도 잘 되게 해라-.” 사람들은 축원하듯 입을 모았다.

도랑의 물은 풀 부스러기며 잔돌맹이들을 말끔히 밀어내며, 농군들의 근심, 걱정을 다 쓸어가듯 흘러갔다.

잘도 흘러가네! 만사가 이리 잘 풀리면 얼매나 좋을꼬!”

안 풀릴 일이 뭐 있어? 허허허

사람들은 도랑을 시원하게 흘러가는 물에서 잘 풀려가는 일을 보고 있었다. 농사 잘 되어 풍년이 들 거라는 믿음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도랑가의 샛노란 민들레가 물에 어렸다. 논두렁에 만발한 꽃다지가 축복의 춤을 추듯 하늘거렸다.

봇물은 샛도랑으로 갈라지기도 하면서 봇도랑을 흘러서 간다. 말갛게 드러난 도랑 바닥에 파란 하늘이 내려앉는다. 봇물은 살찌울 논들을 어루만지며 하늘을 싣고 흐른다.

도랑을 흘러가는 봇물 속에 노랑 모가 보이는가 싶더니, 푸른 나락 잎이 비치고, 누런 벼 이삭이 얼른댄다. 통통한 낟알이 총총 달린 이삭이 점잖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조 씨와 이 씨는 자기네 논 곁을 흐르는 물길을 따라가고, 최 씨는 트랙터를 불러 논을 쓰레질하러 갔다.

점심은 회관에서 합니다. 다들 오세요.” 보주 김 씨가 소리쳤다.

보치기하는 날은 점심을 함께 나누는 것이 예부터 전해오는 오랜 풍습이란다. 오늘 같은 날은 온 하루를 굶어도 배고픈 줄 모르겠다.

, 술 한 잔씩들 해요. 이 좋은 날 한 잔 해야지!”

고샅 어귀 망두걸 할매가 도랑 가로 술병에 산나물을 받쳐 들고 동동걸음으로 뛰쳐나왔다. 힘차고도 넉넉하게 흘러가는 봇물을 보며 함께 잔을 들고 풍년 건배를 외쳤다.

올해는 풍년이 안 들고는 안 되겠네, 하하하!”

마음들이 모두 봇도랑에 어린 하늘을 타고 넉넉한 봇물 위를 둥실둥실 떠가고 있었다. 강둑에 줄지어 선 벚나무는 꽃을 점점 흐드러지게 피워가고-.

봇도랑에 처음으로 봇물이 흐르던 날-.(2013.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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