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일기

가을 풍경화(3)

이청산 2012. 10. 19. 15:48

가을 풍경화(3)
-청우헌일기·25

 

 산에 들에 서늘바람이 불고서야 아내의 바람기가 겨우 진정되었다.

맑고 따사로운 갈바람이 불 때는 물론이거니와 선선한 색바람이 불 때까지도 아내는 집 안에 곱게 머물지를 못했다.

아내를 유혹해 내는 것은 밤나무였다. 아니 밤이었다. 아내는 하늘 푸른 날이면 뒷골 고갯마루로 내달았다. 함께 가자 하다가 주저하면 혼자도 마다하지 않았다. 추석을 전후한 두어 주일을 밤나무에 단단히 바람이 들었다. 한나절 다 지나도록 밤 숲을 헤맨다.

가시덤불에 팔을 긁히기도 하고 밤 가시에 손을 찔리기도 하면서 밤을 줍는다. 함께 주우러 간 날은, 한참 줍다가 보면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밤만을 따라 가다가 보니 같이 온 사람은 의식할 겨를이 없는 모양이었다. 배낭을 겨우 둘러메고, 손에도 들 거리를 만들고서야 산을 내려가자 한다.

혼자 산을 오르는 날은 내려 올 무렵 구원 요청을 보내온다. 손수레나 자전거를 끌고 구원하러 가면 지고 든 밤 보따리를 못 이겨 끙끙대고 있다.

왜 그리 욕심이 많아요, 그러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보낼 때가 좀 많아야지요.”

밤을 가지고 산을 내려오면 아내는 또 바쁘다. 잡티를 골라내고 깨끗하게 손질하여 포장을 한다. 아들네, 딸네, 큰댁, 시뉘댁, 언니네, 동생네, 자기 친구네, 내 친구네……. 차에 싣고 우체국으로 달려간다. 누가 달라는 것도 아닌데, 아내 혼자 신이 났다.

이웃도 빠뜨릴 수 없다. 이웃들도 다 주워오는 것을, ‘내가 주운 거 맛이나 보라.’며 나누어 준다. 아내만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웃도 아내에게 자기 밤도 먹어보라며 가져온다. 삶아서 먹는다. 무엇이 다를까만, 나누어 먹는 밤에는 정성 맛이 더 들었다.

몇 되쯤은 볕 좋은 날 늘어 말린다. 겨우내 두고 떡도 해먹고 밥에도 놓아먹겠단다.

산에 붉고 노란 빛깔이 비치면서 밤 시절도 시나브로 한물이 가고, 아내의 바람기도 잦아들었다. 마당에 늘어놓은 밤을 뒤적이는 아내의 얼굴에 세월의 그림자가 고여 가고 있다.

아내가 마당에서 밤을 만지막이고 있을 무렵, 들판에서 기계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벼를 베어 눕히는 소리다. 콤바인이 육중한 몸체를 놀리며 한창 바람을 피우고 있다.

어제는 최 씨네 논을 눕히고 오늘은 이장네 논을 베고 있다. 최 씨는 올 가을에 무던히도 애를 먹었다. 태풍에 죄다 쓰러진 벼를 모두 노끈으로 묶어 일으켜 세우더니, 벨 때는 묶은 것을 일일이 푸느라 바쁜 손으로 구슬땀을 닦아야 했다.

건축기술자이기도 한 이장은 참 바쁜 사람이다. 동네일 보랴, 농사지으랴, 공사장에 일 다니랴. 마침 공사가 빈 겨를을 타서 벼를 베기로 했단다.

이장은 콤바인이 벼를 베어 눕히는 걸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다가도 푸념에 잠긴다. 갈고, 삶고, 심고, 베는 기계 값 다 제하고 나면 무엇이 남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고 농사 안 지을 수 있어? 허허허

논바닥을 쓸고 다니는 콤바인을 함께 바라보던 조 씨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이장도 함께 웃는다. 콤바인은 알곡만 훑어내고는 먹었던 볏짚을 부지런히 토해낸다.

이 씨는 엊그제 타작한 알곡을 길바닥에 늘어 말리고 있다. 손수레에 실어 온 낟알들을 건조망 위에 쏟아 붓고는 밀개로 죽죽 골을 지운다.

오늘은 참 날씨가 좋으네! 요런 햇볕 며칠만 쬐면…….”

밀어 느는 손길이 정성스럽다. 날아다니던 메뚜기 하나가 알곡 위에 폴짝 내려앉는다. 콤바인에 쫓겨 온 놈인지도 모르겠다.

콤바인은 발정 난 수퇘지마냥 또 이 논 저 논 옮겨가며 한창 바람을 날려댄다. 가을을 한껏 제 품속으로 말아 넣고 있다. 벼가 콤바인의 품으로 말려드는 사이에 금빛으로 넘실대던 들판이 물결 잦아들 듯 점점 고요해져 간다.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던 산이 잦아드는 논들의 황금빛이 아쉬운 듯 슬쩍 제 빛으로 옮겨가며 얼굴을 붉힌다.

하늘이 푸른 손을 흔들며 소슬바람을 내려 보내고는 점점 높이 솟는다.

콤바인의 저 바람기가 다하는 날, 들판에는 또 어떤 계절이 내려앉을까.

아내는 또 어떤 바람으로 오는 계절을 맞이할까.(201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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