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댑싸리 전설

이청산 2024. 9. 22. 15:53

댑싸리 전설

 

  담장 옆 연녹색 댑싸리가 무성하다. 크고 작은 것이 섞여 있지만, 이웃하고 있는 밭의 들깨며 고춧대를 바라보며 저도 그만큼 크고 싶었는지 성큼 자라 우거져 있다. 키만 큰 것이 아니라, 줄기에서 올라와 크고 작게 벋어나온 수많은 잔가지가 사방으로 벌어 둥그스름한 모양을 이루기도 했다.

  아내가 봤다면 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을 것이다. 아내는 청초하고도 복슬복슬한 모습을 탐스럽게 여겼던지 댑싸리를 이뻐했다. 지난해 봄, 어디서 구했는지 댑싸리 씨를 가져와 골목 밭 가에 뿌렸다. 따뜻한 햇볕이 내려앉고 때로는 비가 내리기도 하는 사이에 조그만 싹이 흙을 뚫고 솟더니 소록소록 자라 올랐다.

  댑싸리 싹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무렵 아내는 자주 자리에 눕기 시작했다. 병원을 드나들기도 했지만, 진정이 되지 않아 아이들이 살고 있는 대처로 누울 자리를 옮겼다. 전화해서 좀 어떤지를 물으면, 어디가 어떻게 편치 못하고, 어디 병원을 다녀왔다는 말끝에는 댑싸리의 안부를 묻곤 했다. 복스럽게 자라고 있다고 했다.

  어느 날은 전화하여 한 곳에 몰려 있게 하지 말고, 밭 가에 몇 뿌리씩 줄을 지어 옮겨 심어달라 했다. 아내가 말한 대로 한자리에 모여 있는 어린 댑싸리를 두세 뿌리씩 골목 밭둑 옆에 한 줄로 나가면서 옮겨 심었다. 아내에게 이렇게 심었다며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고, 집에 돌아와서 자라는 모습을 보라 했다.

  댑싸리는 쑥쑥 잘 자라 났다. 아내에게 댑싸리가 잘 자라고 있다며 전화하니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집 걱정은 하지 말고 병원에 잘 다녀서 빨리 나아서 돌아오라 했다. 댑싸리는 잘 자라나고 있는데, 아내는 병원 다니는 횟수가 잦아져 갔다. 내가 가 볼까 해도 아이들이 잘 돌봐주고 있다 했다.

  아내가 집을 떠난 지 두 달이 되어가던 여름 어느 날, 씨 뿌려 나게 했던 댑싸리를 다시 볼 수 없는 세상으로 덜컥 가버리고 말았다. 댑싸리가 무엇을 알까. 무럭무럭 잘 자랐다. 큰 것은 허리를 넘어설 만큼 자라났다. 댑싸리의 그 무심無心이 시리게 아려 보이기도 했다.

  계절이 바뀌어 소슬바람이 불던 어느 날부터 잔잔한 잎새며 가지들이 단풍이 들 듯 붉게 물들어갔다. 연홍으로 물들어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훨훨 솟고 있는 불길인 듯 짙붉게 타올랐다. 댑싸리의 꽃말이 ‘오래 참는 사랑, 고백’이라 했던가. 마치 참고 참아왔던 사랑의 말을 한꺼번에 불길처럼 쏟아내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저 타는 불빛이 아내가 참고 참았던 속상한 일들을 한꺼번에 토해내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같이해 오는 동안 속상했던 일들이 한두 가지였을까. 조금씩은 상한 속을 풀어내기도 했었지만, 어찌 다 풀어낼 수 있었으랴. 그 답답한 속을 저 짙은 빛깔로 다 털어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따금 고개가 숙어지면서 저 빛 같은 얼굴빛이 되어 묵연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겨울이 들면서 노랗고 하얀빛으로 변하며 서서히 말라 갔다. 찬 바람이 불 무렵 잎은 다 떨어지고 줄기만 앙상하게 남게 되었다. 빗자루로 묶는다는 그 줄기지만, 묶을 엄두를 못 내고 그대로 거두었다. 댑싸리는 거두어 지면서 잊지 않았다. 제 씨앗을 세상에 남기는 일을-.

  봄이 왔다. 언 땅이 녹고 따뜻한 바람이 불면서 댑싸리가 서 있던 자리에 하나둘 싹이 돋기 시작했다. 댑싸리만이 아니라 다른 풀들도 그것과 섞여 돋아났다. 아내 대신 밭을 부치는 이가 있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누구라도 밭 가에 두렁에 풀이 돋는 것은 참지 못한다. 모든 풀은 없애야 한다.

  가장 쉽게 없애는 방법은 제초제를 치는 일이다. 그도 두렁이며 밭 가에 제초제를 뿌려 나갔다. 한창 솟아나고 있는 댑싸리도 예외는 아니다. 어느 날 보니 밭 가의 모든 풀이 시들시들 잎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약을 덜 맞았던지 요행으로 피할 수가 있었던지 머리를 들고 있는 것도 있었다.

  성한 댑싸리만 골라냈다. 맞은편 담장 아래에 다른 풀을 뽑아내면서 한두 뿌리씩 묶어 아내가 말한 것처럼 한 줄로 옮겨 심었다. 일부러 심어놓은 걸 보면 제초제를 못 치겠지. 쑥쑥 잘 자라는 것도 있고, 좀 작은 것도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연둣빛에서 녹색으로 빛깔을 바꾸어 가며 복슬복슬 자라났다. 아내의 맑은 미소가 보이는 듯했다.

  밭 부치는 이가, 씨가 퍼지면 어쩌려고 저러느냐며 걱정했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댑싸리 전설을 어찌 알 수 있으랴. 안 들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내년에도 더 먼 날에도 아내의 말처럼 한 줄로 가꾸면 된다. 댑싸리를 보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을 가꾸면 된다.

  나만이 아는 전설로 가꾸어 나가면 된다.♣(2024.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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