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문자
우리는 일상 속에서 주변 사람들과 많은 말을 주고받으며 산다. 바로 말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특히 요즈음같이 에스앤에스가 발달한 시대에는 시간과 거리에 상관없이 여러 사람과 많은 말을 주고받는데, 그때의 말은 주로 문자가 많이 이용된다. 글말인 문자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정감 있는 그림 속에 넣어 그 말을 더욱 정답게 만들기도 한다.
어느 한 사람이 아름다운 그림 속에 받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도 할 아주 감성적이거나 희망적인 문자를 넣어 보내면, 그 문자를 받는 사람은 혼자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전파하기도 한다. 전파자는 누구의 마음을 보내는 걸까. 자신의 마음일까, 원작자의 마음일까? 그렇게 받는 문자들에서도 보내는 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까? 읽어야 할까?
오래전 학교 동기 한 친구는 나날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예쁜 그림 속에 좋은 말들이 적힌 메시지를 보내온다. 아름다운 꽃 그림 속에 “오늘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 행복한 하루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항상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그리 깍듯하지 않아도 무방한 사이이거늘 그리도 정중한 기원을 보낼까.
어느 날은 어여쁜 여인이 장구를 연주하고 있는 그림 속에 “소중한 사람은 언제나 마음속에 있어요. / 처음처럼 변함없는 마음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 오늘도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라 한다. 마치 연인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 같다.
또 어느 날은 한복으로 곱게 단장한 여인이 울긋불긋한 단풍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 속에 “가을이 점점 깊어져 갑니다. 차가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익어가는 가을과 함께 기쁨 가득한 하루 보내세요.”라 했다. 고마운 말이지만, 왠지 말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다.
그런 말들을 받고만 있기가 멋쩍어서 한번 내 문자를 적어 보냈다. “잘 계시는지? / 나를 위해 하루도 안 빠지고 이렇게 좋은 말과 함께 기도를 다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하네~!! ㅎㅎㅎ / 좋은 일 많으시게~!!”
‘ㅎㅎㅎ’를 붙인 까닭을 알까? 그 웃음의 의미를 알아챌까. 좋은 말에 대한 기쁨의 웃음일 수도 있지만, 왠지 공허하게 느껴지는 문자들에서 오는 빈 웃음일 수도 있다. 보내오는 말들이 좋은 말이긴 하지만, 친구의 마음들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구한테 받은 걸 그대로 나한테 무심히 전달한 것이라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고교생 시절 문우로 친하게 지냈던 어느 여류 문인의 글을 50여 년 만에 어느 문학지에서 놀라움으로 대했다. 반갑고 그리운 마음에 프로필 끝에 적힌 이메일 주소를 보고 당장 편지를 보내 어렵게 연락되었다. 서로 반가운 마음으로 흘러간 옛일을 회억하면서 그간의 안부를 나누었는데, 일찍이 미국에 이민해서, 거기 한인 사회에서 문학 활동을 하다가 노경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와 살고 있다 했다.
사는 곳이 다르고 멀어 만날 수는 없지만, 자주 연락은 하고 살자며 주로 에스엔에스로 소식과 마음을 주고받고 있다. 그렇게 마음을 나누어 가던 어느 날, 활짝 핀 해바라기 그림과 함께 “늘 생각나는 사람 /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진심일 수도 있고, 남의 마음을 빌린 것일 수도 있다 싶어 “정말~ㅎ?!” 이라고 한마디 답장을 했더니.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그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무릇 말이란, 무슨 말이든 그에 걸맞은 의미와 함께 말하는 이의 영혼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의미도 물론 중요하지만, 영혼이 없는 말은 한갓 소음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언어가 진정한 의사소통의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서로의 영혼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 에스엔에스에 떠도는 문자들을 보면 단순한 말장난이거나, 안 해도 좋을 말이거나, 남에게 받은 것을 다른 이에게 무의미하게 전달, 전달하는 게 대부분이다. 이런 일들이야말로 공해요, 전파 낭비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거기에 무슨 영혼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런 매체들을 통하여 가짜뉴스가 횡행하는 것은 또 어찌 보아야 하는가. 그런 것에 어찌 영혼이 있다 할 것이며, 있다고 한다면 아주 사악한 영혼일 것이다.
하기야 영혼 없는 말로는 어찌 에스엔에스 문자뿐이랴. 일상 언어에선들 영혼 없는 말이 없을까. 특히 정치인들의 험한 말들을 보라. 그들의 말에 어찌 영혼이 있다 할 것이며, 있다면 가짜뉴스에서보다 더 사악하고 추악한 영혼이 깃들어 있을 뿐이지 않을까.
나를 돌아볼 차례다. 나는 그 누구에게 영혼 없는 문자를 보낸 적은 없는가. 소음에 지나지 않는 말을 한 적은 없는가. 영혼 없는 말이 필요치 않은 삶이 되고, 영혼 없는 말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한층 더 따뜻한 삶이 되고, 믿음직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상상과 기대에 젖어 본다. ♣ (2024.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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