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위대한 정령

이청산 2024. 8. 25. 16:30

위대한 정령

 

  밭에 나는 풀이 너무도 성가시다. 베어내도 나고. 뽑아도 나고 깊숙이 캐내어도 또 난다. 난 풀들은 쑥쑥 잘도 자란다. 아침저녁이 다르고 하루하루가 놀랍다. 신기하다. 이 풀들은 누가 씨를 뿌리고 누가 가꾸는 것일까. 돌보는 이가 없다면 이토록 끈질긴 생명력으로 나고 살고 무성해질 수 있을까. 

심어서 가꾸려 하는 작물은 뜻대로 잘 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는다. 잘 나라고 씨뿌리기 전에 땅에다 거름을 묻고, 나면 비료를 주고 병 들지 말라고 약을 쳐주고 해도 바라는 대로 키우기는 쉽지 않다. 원하는 결실을 거두기는 더 어렵다. 저 풀을 가꾸는 손길에 비하면 작물을 가꾸는 사람의 손길이며 그 힘이란 보잘것없는 것 같다.

  누가 가꾸든 모든 식물에는 꽃이며 열매가 다 피고 열리기 마련이다. 단지 그 열매를 사람이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이일 뿐이다. 사람이 못 먹으면 새며 짐승이 와서 먹고 남은 것은 씨앗이 되어 또 난다. 경영은 마찬가지다. 어쩌면 야생의 초목이 더 많은 생명체를 살려 나가는지도 모른다.

  야생의 이런 경영은 누가 하는 것일까. 일찍이 인디언들은 ‘위대한 정령’이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말로는 ‘와칸 탕카(Wakȟáŋ Tȟáŋka)라고 하는 존재다. 새가 울고 꽃이 피고 비버며 들소가 뛰어다니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하는 모든 것이 와칸 탕카, 위대한 정령이 하는 일이라 했다.

  인디언들에게는 성경도 없고 교회도 없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믿음은 있다. 아침에 해가 뜨면 만물의 아버지라며 감사하고, 흙은 대지의 어머니라며 감사하고, 강물은 대지의 핏줄이라며 감사하고, 바람은 대지의 숨결이라며 감사한다. 약초를 캐면서 그 풀에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들소를 사냥하여 먹거리와 옷을 삼으며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자연의 모든 것이 경배의 대상이다.

  그 모든 것이 위대한 정령이 하는 일이라 여겨 오직 감사하고 숭배하는 것으로 그들의 신앙을 삼는다. 그리하여 풀 한 이파리, 미물이며 짐승의 목숨 하나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다. 필요하여 채취하거나 수렵을 할 때도 경배의 기도를 먼저 올린 후에 실행한다고 한다. 위대한 정령에게 올리는 기도다.

  ‘위대한 정령’이라는 게 정녕 있기나 한 건가. 인디언들에게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어떤 이가 위대한 정령의 정체를 알고 싶어 보이지 않는 정령에게 말씀을 들려 달라 하니 종달새가 노래했다. 그래도 또 말씀을 들려 달라 하니 천둥을 굴러다니게 했다. 모습을 보여 달라 하니 별을 빛나게 했다. 기적을 보여 달라 하니 한 생명을 탄생시켰다. 한번 만져 달라 하니 나비를 내려앉게 했다. 사람은 나비를 쫓아 보내고 떠나버렸다고 한다. 세상 모든 것이 위대한 정령의 일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문명한 백인들이 야만스러워 보이는 인디언의 땅을 침략했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에게 그들의 교회며 학교에 다니라 하고, 살기 좋게 한다며 땅을 마구 파고 나무를 무참하게 찍어 넘기고 높은 집을 짓고, 조용하던 들판에 철로를 놓아 기차를 다니게 했다. 살기 좋아지기는커녕 온갖 공해며 질병이며 범죄가 만연해져 갔다.

  그 문명인들은 자연은 정복하는 것이라 했다. 모든 것을 자신들의 뜻대로 고치려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풀은 잡초라고 부르며 짓밟았다. 인디언들은 세상에 잡초라는 것은 없다고 여겼다. 모든 풀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쓸모없는 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어느 쪽이 더 괜찮은 삶일까.

  마을 앞에는 강이 흐르고, 강둑 위에는 정자가 놓여 있다. 정자 옆 마을 쪽에는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노거수가 우람하게 서 있고, 강 쪽에는 봄에는 해사한 꽃을 피우는 벚나무며 절로 난 온갖 초목이 우거져 있다. 어느 날 그 초목들이 무참히 잘려져 나갔다. 나무들이 너무 자라 강의 경관을 막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민원을 받은 관에서 한 일이다. 

정자에 앉아 물 맑게 흐르는 풍경을 바라며 즐기는 것은 운치 있는 일이다. 그 운치를 위해서 나무를 베어낼 수도 있다. 관의 발주를 받은 사람들은 그걸 어떤 마음으로 베어냈을까. 강과 정자의 경관을 살릴 수 있도록 나무를 다듬는 마음으로 벤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베어내라니까 아무 생각 없이 마구잡이로 쳐 없애버린 것 같다.

  오래된 벚나무의 커다란 가지들도 흉물스럽게 잘라 커다란 둥치만이 처참하게 서 있게 했다. 저 끔찍한 모습이 정자의 운치를 살려 줄 수가 있을까. 인디언처럼 ’위대한 정령‘의 존재에 관한 생각은 못 한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사람과 함께 공존해야 할 생명체로 여겼다면 저리 무참히 자르지 않았을 것이다.

  인디언이 들소를 잡아 고기로 양식으로 삼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으면서도 ‘위대한 정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잊지 않았듯이, 자연물을 어떻게 쓰더라도 세상을 함께 사는 다 같은 생명체라는 생각만은 잃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일까.

  저 푸른 산의 나무며 저 들길에 함초롬히 핀 꽃, 저 숲속을 날아가는 새들이며 저 꽃을 찾아드는 나비들은 누가 가꾸며 누가 거두는 것일까. ♣(2024.8.19.)

'청우헌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댑싸리 전설(1)  (5) 2024.09.22
쓸쓸함에 대하여  (3) 2024.09.11
기다림에 대하여(6)  (0) 2024.08.08
침대 위에서  (0) 2024.07.28
그냥 둘 걸  (0) 2024.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