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쓸쓸함에 대하여

이청산 2024. 9. 11. 21:10

쓸쓸함에 대하여

 

누군들 쓸쓸할 때가 왜 없을까? 살기에 바빠 쓸쓸할 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바쁜 걸 강조해서 하는 말일 것이다. 정녕 쓸쓸할 틈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바쁜 사람일지라도 문득 쓸쓸함이 밀려올 때가 어찌 없을까.

  나는 덜 바빠서 그런지 쓸쓸함을 느낄 때가 더러 있다. 가끔씩 끙끙 앓기도 해야 하는 쓸쓸함에 잠길 때도 없지 않다. 바쁘게 살던 시절이 훌쩍 흘러가 버렸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바쁠 수 있는 기력도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별로 없는 기력이 가끔은 쓸쓸함을 가져오기도 한다. 어쨌든 이따금 쓸쓸함이 찾아오지만, 그중에서도 혼자 읽기 아까운 시가 있어도 같이 읽거나 들려주면서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쓸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심장이 / 몸 밖에 달렸더라면 / 네 마음을 더 잘 보았을 텐데…… 아니, 생각이 / 나보다 먼저 잠들기만 했어도 / 너와 더 오래 한집에 머물렀을 텐데……”(정끝별, 「너였던 내 모든」)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심장의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져 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무엇 까닭일까. 설령 심장이 몸 밖에 달려 있다 해도 나에게 심장을 보여줄 사람도 없고, 내 심장을 보여줄 사람도 없다는 게 쓸쓸하다.

  ‘없다’라는 말 속에는 ‘있었다가 없어졌다.’라는 뜻도 있고, ‘처음부터 있지 않다.’라는 뜻도 있을 테지만, 나는 어느 쪽이라는 걸 굳이 말로 드러내고 싶지 않다. 말이 되어 나오는 순간 상념은 또한 쓸쓸함에 빠질 것 같기 때문이다.

  나를 더욱 쓸쓸하게 하는 것은 그다음 구절이다. 너를 향한 생각이 나보다 먼저 잠들 수 있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너를 안고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생각이 잠들어주지 않으니 너와 나 사이의 거리일지 벽일지 그런 게 자꾸 멀어지고 두꺼워지는 것 같아 점점 더 쓸쓸해진다.

  이런 시를 같이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 젖은 목소리로 들려줄 수 있는 이 누가 있다면 쓸쓸함이 쓸쓸함을 녹여줄 것도 같다. 결국은 이 시가 나를 더욱 쓸쓸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내 쓸쓸함을 시가 대상代償해 줄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쓸쓸함보다 조금 더 짙은 쓸쓸함이 엄습해 올 때는 저녁밥을 혼자서 먹을 때다. 어찌하다 보니 삼시 세끼를 혼자서 치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현실과 더불어 고단하게 사는 처지 속으로 병고까지 찾아왔다.

  마냥 죽으라는 법은 없었던지, 고마운 제도가 고마운 분이 나를 찾아오게 해주었다. 하루 두어 시간 내 사는 일을 돌봐줄 뿐이지만, 나에게는 그야말로 구세주 손길이다. 그 길지 않은 시간을 아껴가며 정성을 다해주는 마음이 신고, 심고를 잊게도 해준다.

  아침 일찍 나에게로 와 내 하루를 시작하게 해주고 하루 지낼 일을 마련해 놓고 가면, 그 마련으로 하루를 지내곤 하는 날들이 이어져 갔다. 그 정성스러운 마련이 감동을 주기도 했지만, 아침밥이나마 같이 먹을 이가 있다는 것이 여간 큰 위안이 아니었다.

  그 위안은 아침으로 끝나야 한다. 점심과 저녁은 혼자서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맞이는 물론 아침에 마련해 놓은 것으로 해결할 수 있기에 이 또한 다행이라 할 수 있지만, 쓸쓸함은 내 몫이 되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점심때는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녹음 짙은 산이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위안거리가 될 수 있지만, 저녁은 어스름 황혼 빛이거나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전등 빛 아래에서 홀로 술을 들다가 보면 국물 맛이 눈물 맛같이 다가올 때가 있다.

  이렇게 혼밥 상과 함께한 이력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건만, 왜 이리 여물어지지 못했을까.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할 때도 없지 않았는데, 도움을 주는 이가 있음에야 더욱 여물어져야 할 것이 아닌가. 모를 일이다.

  그랬던 것 같다. 혼자 한 마련으로 먹고 자고 할 때는 오직 생존 일념뿐이었던 것 같다. 비록 울울한 심정으로 술을 들지언정,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돌아봐 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긴장감, 절박감이 쓸쓸함을 조금 앞질러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은 잠시간이나마 함께할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이 생존에서 벗어나 생활 속을 살고 있다 싶어 안도감을 준다. 오히려 그 안도감이 쓸쓸함을 몰고 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침과 저녁의 처지가 같지 않은 데서 오는 쓸쓸함은 또 무엇인가.

  생활이 생존보다 더 쓸쓸한 것 같다. 생존은 간혹 거부하는 이도 있지만, 누가 생활을 마다할 수 있는가. 어차피 사람은 생활 속을 살아야 할 존재라면, 쓸쓸함은 모든 사람이 원죄로 타고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쓸쓸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오늘 저녁도 쓸쓸한 술을 든다. 밥술을 들고 가끔은 술잔도 든다. 이 저며오는 쓸쓸함이 나의 생활이라면 도리 없는 일이다. 쓸쓸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까. 쓸쓸함을 보듬기도 하면서 숨 쉬어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임을 나만이 아는 일일까.

  생활 속의 쓸쓸함이여, 쓸쓸함 속의 생활이여! ♣(202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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