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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앞에서

변화 앞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계기로 삶의 방향이나 해야 할 일이 달라지는 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전에 비해 후가 긍정적, 희망적으로 달라질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에 따라 행복해하거나 불행을 느끼기도 한다. 나도 살아오면서 숱한 그 ‘계기’를 맞이하면서 울고 웃어왔다. 그 연속이 삶의 과정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들 그렇게 살아왔겠지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가 분별이 잘 서지 않는 변화 앞에서는 또 어찌해야 하는가. 갑작스러운 입원을 하게 되었다. 홀몸이 되어 적요하게 살던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벽에 부딪히며 쓰러지는 충격으로 외상도 입으면서 뼈 한 부분에 금이 갔다. 구급차를 바꿔가며 실리기를 거듭하..

청우헌수필 2024.02.03

노을빛

노을빛 저녁 노을빛이 좋다.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특히 요즈음 들어와서 다홍으로 티 없이 곱게 물든 노을빛을 보면 그리운 이와 마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오래된 사랑을 다시 따뜻하게 나누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노을빛이 다 고운 것은 아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아침놀을 뿌리며 지상으로 밝게 솟아올라, 중천에 높이 떠 세상을 환히 비추다가 서서히 서녘을 붉게 물들이며 저물어가는 해라야 노을빛이 곱다. 구름을 털어낸 밝고 맑은 해일수록 노을빛도 고운 것이다. 그리 고운 노을빛을 보면 지나온 내 생애가 돌아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나는 어떻게 살아왔던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저물녘에 서 있지 않은가. 저 해처럼 한 번이라도 세상을 환하게 비춰나 보고 저..

청우헌수필 2024.01.25

사선死線을 넘다

사선死線을 넘다 몸이 그토록 쉽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어느 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기침이 심하게 나고 머리가 빙 내둘리면서 나도 모르게 쓰러졌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쓰러지면서 벽에 얼굴을 부딪쳐 입술과 관골에 생채기가 지고 무릎에도 상처가 났다. 등도 무척 아팠다. 일어나려 했지만, 바닥을 짚을 힘이 없었다.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닌가 싶어 억지로 몸을 끌어 전화기를 잡고 119에 도움을 청했다. 구급차가 이내 달려왔다. 실려 가면서도 머릿속이 가물가물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도 이런 정신 상태를 거쳐 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지역 종합병원에 이르러 응급실로 갔다. 증세가 어떻냐고 묻는데 몽롱해지는 정신을 힘들게 추스르며 아픈 데를 말했다. 피도 뽑아 보고 엑스레이, CT도 ..

청우헌수필 2024.01.17

얼마나 달려가야

얼마나 달려가야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에는 잎이 거의 다 떨어졌다. 푸르고 누르다가 떨어져야 할 철을 알아 모두 제 자리를 찾아내려 앉았다. 떨어지는 것은 잎새뿐만 아니다. 가지도 떨어진다. 뻗어 오르는 나무에서 가지도 제 할 일을 다 했다 싶으면 누울 곳을 찾아 내린다. 저렇게 내려앉는 잎과 가지들 가운데는 줄기가 보내고 싶지 않았는데도 줄기의 손길을 무정히 뿌리치고 내렸거나 무참히 베어내진 것은 없을까? 줄기의 마음이야 어떻든 제 갈 길을 찾아 가버리거나 아프게 떨어져 나간 것들은 없을까, 줄기에 깊은 상처를 남긴 채. 아, 저 나무 저 모습, 누가 가지 하나를 무자비하게 베어버렸나. 나무는 그 상처를 끌안은 채 숱한 세월을 두르고 있다. 둥치는 그 상흔을 감싸듯 주위를 제 살로 둘러치고 있다. ..

청우헌수필 2023.12.10

말라가는 칡넝쿨

말라가는 칡넝쿨 가을이 깊어가는 강둑을 걷는다. 줄지어 선 벚나무는 붉은빛 잎들이 떨어지면서 맨살을 드러내 가고 있다. 나무 아래 쑥부쟁이가 가을을 보내는 손짓인 듯 하늘거리고, 강물은 나무 그림자를 어루만지며 맑게 여물어간다. 저 나무의 칡 좀 보게나. 넓적한 잎을 쩍쩍 벌리며 넝쿨을 마구 감고 뻗어 대던 때가 언젠데 저리 말라 쪼그라들 줄이야. 지난여름 왕성하던 그 모습은 까마득히 사라지고 빛바랜 모습으로 우그리고 있는 자태가 처연해 보이기도 한다. 한때 칡넝쿨은 기고만장했다. 전후좌우도 돌아보지도 않고 아무 데 할 것 없이 마구 뻗어나고, 뻗어나는 곳마다 사정없이 감아댔다. 큰 나무든 작은 풀이든 가리지 않았다. 굵은 가지는 굵은 대로 칭칭 감고, 여린 풀의 잎이며 줄기는 목을 비틀 듯 감았다. 큼..

청우헌수필 2023.11.26

단풍이 들 때 들고

단풍이 들 때 들고 오늘도 해거름 산을 오른다. 해거름 삶에서 해거름 산 오르기는 편안한 일체감을 주는 것 같아 걸음이 한결 아늑하게 느껴진다. 내 이 오랜 산행에는 늘 두 가지 기대와 목적을 품고 있다. 하나는 실용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정서적인 것이다. 산을 오르고 내리는 사이에 내 고질인 고혈압, 고혈당이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 산행의 덕이라 믿고 있다. 산을 걷다 보면 아프고 서러운 마음도 물 흐르듯 씻기는 것 같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념들도 하나같이 단순해지는 것 같다. 이만하면 몸과 마음의 그 실용적, 정서적 기대와 목적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충족을 즐거워하며 오늘도 가벼운 걸음으로 산을 오른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오래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곱게 죽기 위해서라며 ..

청우헌수필 2023.11.07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아내는 살고 싶어 했다. 잘 살고 싶었다. 마당 텃밭이 좁다며, 사는 집이 편하지 못하다며 마음에 안 차 했다. 왜 그리 욕심이 많은가. 상추만 길러 먹을 만한 밭이면 족하지 않은가. 집이 좀 좁고 누추하면 어떤가. 얼마나 오래 살 거라고 그리 힘을 들이려 할까. 아내의 욕심에 나는 가끔 딴죽을 피우기도 했다. 어디 남의 쉬고 있는 땅이라도 있으면 찾아가 그 땅을 쪼아 무어라도 심고 갈았다. 잘 가꾸든 못 가꾸든, 푸성귀가 자라든 풀이 무성하든 그저 심고 갈고 싶어 했다. 벽돌로만 얇게 쌓아 지은 집 말고, 콘크리트 옹벽에 철근을 넣어 집을 지어볼 수 없을까. 추위도 더위도 걱정 없는 집, 마당 넓은 집에서 살아볼 수 없을까. 그런 집을 짓고 싶어 했다. 드디어 아내의 꿈이 눈앞에 이르렀다. ..

청우헌수필 2023.09.10

혼자 돌아왔다

혼자 돌아왔다 돌아와 달라고 애절하게 빌었건만, 오히려 나를 불렀다. 달려갔던 나는 혼자 돌아오고야 말았다. 돌아와 주기만 하면 내가 아주 딴사람이 되어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나의 애끊는 호소는 허공중에 무참히 흩어져 버렸다. 바쁜 일이 있더라도 아이들 전화는 잘 받아 달라던 부탁이 나에게 한 마지막 말이 될 줄이야. 당장 당신에게 달려가고 싶다고 했지만, 그러지는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말만 믿고 나는 내 볼일을 천연하게 보고 있었다. 당신의 부탁대로 아이들의 전화를 잘 받았지. 그런데 이게 무슨 산산조각 깨어져 내려앉는 하늘 같은 일이란 말인가. 내가 달려갔을 때 당신 체온은 이미 빠져나가 버리고, 감은 눈에 앞니 하얀 끝자락만 살포시 보여주고 있었지. 오랜만에 만나는 나에게 짓는 미소였던가...

청우헌수필 2023.08.23

『가요무대』를 보며

『가요무대』를 보며 『가요무대』는 많은 시청자로부터 사랑을 받아오고 있는 아주 오래된 정통 가요 프로그램이다. 무대를 통해 방송하는 가요들은 애틋한 추억에도 빠져들게 하고, 가슴 뭉클한 향수에도 젖게 하고, 사무치는 그리움에 에어지게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어깨 절로 들썩이게 하는 흥겨운 가락으로 시름을 씻어주기도 한다. 그런 가요를 들으며 사람들은 흘러간 날의 추억과 사람, 그 그리움에 젖어 보기도 하고, 마치 그리운 사람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환영에 싸여 보기도 한다. 학창시절로 돌아가 풋풋한 친구들과의 우정 놀이에 빠져 보기도 하고, 첫사랑의 그림자에 아늑히 안겨 보기도 한다. 손뼉으로 함께 흥을 맞추며 살이의 고달픔을 잊어 보기도 한다. 『가요무대』는 그런 노래만 고른다. 그렇게 사람들의 심금을 ..

청우헌수필 2023.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