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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살아있었다

길은 살아있었다 이태 만이다. 그리워하던 주지봉에 올랐다. 별다른 사정이 있는 날 말고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오르내리던 길이었다. 그 길의 풀이며 나무 하나 눈길 주지 않은 게 없고 그 산의 흙이며 돌덩이에 발길 대지 않은 곳이 없으리만큼 오르고 내렸다. 그 길과 산을 내 글 속에 고스란히 담아 책 한 권 엮기도 했다. 그 나무며 그 산이 품고 있는 숨결은 곧 나의 호흡이고 맥박이었고. 내뿜는 정기는 곧 내 삶의 살이 되고 근육이 되곤 했다. 그러던 산을 이태나 버려두어야 했다. 방안에서 혼절하여 쓰러졌다. 옆 사람이 가뭇없는 길을 떠나고 난 뒤 고적하게 지내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가물가물하는 의식 속에서 겨우 핸드폰을 잡아 119를 불러 응급실로 실려 갔다. 급기야는 대처 큰 병원 병실에 ..

청우헌수필 2025.10.26

댑싸리 전설(4)

댑싸리 전설(4) 가을이 여물어가는가 싶더니 올해도 댑싸리가 발갛게 물들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렸을지도 모르는, 그렇지만 볼 수 없었던 빛깔이지요. 당신이 씨 뿌렸던 그 댑싸리의 후예들입니다. 가을비가 살포시 내리더니 빗물의 무게 때문인지 드러누운 것도 있네요. 그때 당신이 씨를 뿌린 건 당신이 떠나던 해의 봄이었지요. 그것이 움이 터서 싹이 올라와 잔잔한 이파리들을 피워낼 무렵 초여름에 당신은 환우를 안고 아이들에게로 떠났지요. 아이들 집에 있던 어느 날, 한데 몰려 있게 하지 말고 고샅에 한 줄로 옮겨 심어 달라 했지요. 당신이 댑싸리 씨를 뿌린 것도 처음이었고, 나도 당신이 뿌린 씨로 댑싸리를 처음 알았지요. 어디서 복슬복슬 이쁘게 자라는 댑싸리를 보고 가까이 두고 싶었던지, 가을에 발갛게 ..

청우헌수필 2025.10.12

종이부시終而復始

종이부시終而復始 친구는 우리 네 사람 모임에서 총무 역할을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그날 이른 아침에도 저녁 아무 시에 모일 것이니 그때 보자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러던 사람이 그날 늦은 오후 무렵, 걷기가 힘들어 외출이 어려우니 셋이서 즐거운 자리를 가지라며 더 이상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는 문자를 다시 보내왔다. 무슨 오해가 있는 건지, 홀연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하니 꺼져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속이 뒤틀리면서 전신에 힘이 빠지고 말도 잘 안 나온다며 온 가족이 다 모여 있다 했다. 무슨 변인가 싶어 달려 가보겠다 하니, 부담된다며 오지는 말고 차도 소식을 기다려 달라 했다. 친구와 나눈 마지막 목소리였다. 소식은 아들이 보낸 모바일 부고장으로 왔다.나 말고 세 사람은 서로..

청우헌수필 2025.09.27

의사의 동화

의사의 동화 손목에 손가락을 얹어 맥박을 짚으며, 뛰는 소리를 듣고 보기라도 하려는 듯 온 감각 기능을 다 모으는 것 같다. 옷을 살짝 걷어 복부 곳곳을 꼭꼭 눌러본다. 그러고는 혈을 찾아 발가락부터 배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침을 놓는다. 전기 자극까지 얹어 자르르한 진동이 느껴지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간호사가 와서 침을 뽑고는 엎드리라 하여 허리에 물리치료를 시작한다. 치료가 끝나면 다시 의사가 와서 등판에 부항을 붙이고 허리 곳곳을 지그시 누르면서 침을 놓는다. 급소를 찌를 때는 비명이 터져 나올 만큼 아프기도 하지만, 굳은 몸이 풀어지면서 뭔가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요통으로 고통받으며 몇 곳 병원을 전전했지만,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통증 치료’라는 한 ..

청우헌수필 2025.09.17

고독사가 아니라 고립사다

고독사가 아니라 고립사다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외로움이란 인간의 실존적 본질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인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고 한 것도 외로움이 인간이 지닌 숙명으로서의 본질을 형상화한 말일 것이다. 외로움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주관적인 감정의 세계이기도 하다. 지금 세상에서는 외로움을 두고 누구나 지닌 개인적,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공적인 문제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라는 인식이 고조되어 가고 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도 보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Minister for Loneliness)’를 만들고, 일본도 내각부 산하에 ‘고립·고독 대책 담당실’을 설치하고, 우리나라 서울시에서도 ‘외로움 없는 서울’ 사업을 추진하여 ‘외로움’에 대처하..

청우헌수필 2025.09.14

기다림에 대하여(7)

기다림에 대하여(7) 내가 왜 이리 상사화에 빠졌는지 모르겠다. 산수 좋은 곳이라고 찾아와 마을에 발을 내리고 살던 어느 날, 마을 숲에서 만났다. 애절한 그리움을 지닌 꽃이란 걸 알았다. 내게도 맺혀 있던 무슨 그리움이 있었던지, 그 후로 상사화 꽃밭은 내 정서의 샘이 되고, 내 삶의 한 의지처가 되기도 했다. 비가 내리든 바람이 불든 그 꽃을 찾지 않는 날이 없었다. 상사화는 잎과 꽃이 서로 그리며 돋아나고 피어나다가 말라가고 잦아드는 꽃이라지만, 나는 상사화를 보며 피어나고 잦아든다. 눈이 채 녹기도 전인 2월 하순께 어느 날 마을 숲에 들다 보면 문득 땅속에서 뾰족한 순이 솟는다. 날이 따뜻해지면서 순은 잎이 되어 자라난다. 봄을 지나 5월을 넘어서기까지 난초처럼 길쭉하고 치렁한 잎을 돋우어 ..

카테고리 없음 2025.08.27

이 상처를 어찌할까

이 상처를 어찌할까 살다 보면 몸과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이 적지 않다. 사는 일이란 상처의 극복 과정이라 할까. 그 상처를 잘 극복하지 못하면, 삶이 어렵거나 심지어는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다. 요즈음 나는, 남이 알면 비소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커다란 상처가 되는 일로 칼끝이 찔러오는 듯한 아픔을 겪고 있다. 조용하고도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이 마을에 발을 내리고 산 지도 어언 십수 년이 지나가고 있다. 내가 마을에서 아름답게 여기는 정경 중 하나가 마을 숲 가장자리 한 곳에 다소곳이 피고 있는 상사화 꽃밭이다. 누가 오래전 몇 포기 심은 것이 점점 벌어 칠팔 월 한여름쯤에는 화사한 홍자 빛 꽃밭을 이룬다. 상사화는 여러해살이 알뿌리 화초로 이른 봄에 움이 터 5, 6월까지 난초 같은 치렁..

청우헌수필 2025.08.13

나를 보고 자꾸 떠나라 한다

나를 보고 자꾸 떠나라 한다 사람 속에서 사람과 더불어 부대끼며 살아오던 생의 한 막을 거둔 지 어느새 십수 년 세월이 흘렀다. 번잡한 도회를 떠나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어울리며 살리라 하고, 산 좋고 물 좋다는 이 한촌을 찾아와 지금까지 그 세월을 살고 있다. 앞으로는 강이 맑게 흐르고 있고, 뒤로는 산이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어. 아침이면 강둑길을 걷고 저물녘에는 산을 올랐다. 강둑 풀숲길을 걸으면서 강물 맑게 흐르고 온갖 야생초들 하늘거리는 풍치를 보는 것도 유유했고, 철마다 빛깔과 모습을 달리하는 숲속 산길을 오르내리며 걷는 것도 더없이 자적했다. 살 만하다 싶었다. 내 생애에 언제 이런 별천지가 있었던가. 몇 철을 그 별천지 속을 거닐었을까. 어느 날 커다란 굴착기가 강둑을 마구 파헤쳐..

청우헌수필 2025.07.30

박탈당한 그리움

박탈당한 그리움 오늘도 마을 공원 숲속으로 든다. 산책길에 늘 거쳐 가는 곳이다. 소나무, 상수리나무, 느티나무, 회나무 노거수가 우거진 숲속 한가운데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제당이 있고, 그 옆에는 상사화가 모여 꽃을 피우는 곳이 있다. 아주 오래전 마을 어느 부인네가 어디에서 몇 뿌리 가져와 옮겨 심은 것이라 한다. 그 꽃이 간직하고 있는 사연을 알고서 심은 것일까. 상사화는 알뿌리에서 순이 돋고 잎이 난다. 잎은 비늘줄기에 나 긴 타원형으로 치렁하게 자라다가 오뉴월 무렵부터는 조금씩 말라 든다. 칠월이 되면 완전히 마르고 삭아서 땅속으로 스며들 듯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꽃대가 솟는다. 꽃대는 솟으면서 끝자락에 꽃을 품다가 마침내 몇 갈래로 홍자색 꽃을 아리따이 피워낸다. 꽃 진 꽃대 끝에 ..

청우헌수필 2025.07.16

그윽한 고독 속으로

그윽한 고독 속으로 사전에 나오지 않는 말이지만, ‘고독력’이란 말이 쓰이고 있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이야기하는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노년층 삶에 필요한 능력 중의 하나로 ‘고독력’을 말했다. ‘고독력’이란 ‘혼자서도 문제없이 잘 사는 능력’이라 했다. ‘고독’이란 말을 두고 사전을 펼쳐 보면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으로 풀이하고 있다. 적확한 풀이는 아닌 것 같다. 고독은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한 게 아니라 세상과 떨어져 있고 싶은 마음이다. 고독에는 자발적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고독은 외롭고 쓸쓸한 것도 아니다. 외로움은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괴로운 심리 상태다. 고독 속에도 쓸쓸함은 있지만, 견디기 어려..

청우헌수필 2025.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