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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적어서 어쩔꼬

어리적어서 어쩔꼬 어쩌다 지나온 삶을 한번 돌아보는데, 문득 ‘어리적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부모님은 나를 두고 가끔씩 ‘어리적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군대엘 갈 때도, 학교를 마치고 사회에 발을 내디딜 때도 이따금 엷은 미소와 함께 나를 쳐다 보시며 ‘어리적어서 어쩔꼬?’라 하셨다. 나중에 그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았지만, 어떤 곳에도 그런 말은 없었다. 가장 가까운 말이 ‘슬기롭지 못하고 둔하다.’를 뜻하는 ‘어리석다’였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한다.’ 하는데, 설마 자식을 두고 그런 뜻으로 말씀하셨을까. ‘어리적다’와 ‘어리석다’의 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생각할 때마다 나를 보며 미소짓던 부모님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나는 여덟 살 때까지 막내로 자라면서 부모님의 온갖 귀염을 다 받았다...

청우헌수필 2020.11.15

당신이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당신이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제8회 구미낭송가협회 시낭송 콘서트를 마치고 코로나가 오래도록 세상 곳곳이며 삶의 여러 가지 일을 어렵고 힘들게 만들 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짓뭉개기까지 하고 있다. 아름다운 시 낭송 콘서트를 앞둔 우리의 일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해마다 해내던 일 앞에서 절망하기는 더 고통스러웠다. 연습할 장소를 얻지 못해 어느 강변 누대 아래의 그늘을 찾기도 하고, 공공시설의 야외공연장을 이용하기도 하고, 어느 회원은 집 거실이며 사무실까지 내놓아야 했다. 그런 곳이라고 마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스크를 끼는 것이며, ‘사회적 거리 두기’ 등의 과제를 비켜 갈 수는 없었다. 주제를 정하는 일에도 여느 해와는 다른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코로나 시국에 무엇을 ..

청우헌수필 2020.10.20

오늘을 고요하게 살다 보면

오늘을 고요하게 살다 보면 내 의지와는 별 상관도 없으면서 나를 끊임없이 변하게 하는 것이 있다. 시간이다. 오래 살았다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를 이토록 오래 살게 한 게 무엇인지 돌아 보인다. 누구는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라기도 했지만, 입때껏 나를 살려 온 것은 모두가 시간인 것 같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게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냥 살아오게 한 것만은 아니다. 자라게 하고, 장성하게 하고, 갖은 일들을 겪게 하고, 그것으로 세상 물정에 젖게도 하고, 그러는 사이에 늙게도 한 것이 모두 시간이 한 일이 아닌가. 그사이에 많은 것들을 만나게도 하고 헤어지게 한 것이 시간이 한 일이 아니라면 무엇이 그리했다는 말인가. 이런 시간이건만 나와는 별 상관이 없이 흘러가는 것 같다..

청우헌수필 2020.10.11

나무의 견인

나무의 견인(堅忍) 내 일이든 남 일이든, 내 집 사는 모습이든 나라 돌아가는 모양새든, 큰일이든 사소한 일이든, 보고 듣고 겪다 보면 참아내기가 어려운 일들이 한둘 아니다. 어쩌면 일을 그렇게 하고 있는가. 사는 걸 이리 힘들게 하는가. 세상을 어찌 이 모양으로 만들고 있는가. 돌아보고 바라볼수록 견뎌내기가 힘든 일들이 적지 않다. 물신선이라도 되어야 할까. 따뜻하고 시원하게 대할 수 있는 일보다 참고 견디기가 어려운 일들이 더 끓고 있는 세상인 것 같기도 하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를 본다. 작은키나무 큰키나무, 곧은 나무 외틀어진 나무, 바늘잎나무 넓은잎나무, 늘푸른나무 갈잎나무……. 생긴 모양도 사는 모습도 다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한데 어울려 산다. 골짜기며 비탈에 살기도 하고, 등성이며..

청우헌수필 2020.09.23

나무의 은혜

나무의 은혜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를 만나러 오른다. 산은 언제 올라도 고즈넉하고, 나무는 언제 만나도 포근하다. 산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는 산에 살기 때문이다. 들에도, 길가에도, 뉘 집 뜰에도 나무는 살지만, 그건 본디의 자리가 아니다. 손을 타서 옮겨 앉았을 뿐이다. 그 산의 그 나무를 그려 산을 오른다. 어미와 그 붙이가 한 몸이듯 산과 나무도 한 몸이라 할 수 있다. 산은 나무를 낳고 나무는 산에서 나고 산다. 어미가 붙이를 붙이이게 하고 붙이가 어미를 어미이게 하듯이, 산이 나무를 나무이게 하고 나무가 산을 산이게 한다. 산과 나무의 사이 같은 어미와 붙이의 사이는 여기까지다. 붙이는 어미의 품을 떠날 수도 있지만, 나무는 산의 품을 스스로 떠나는 일이 없다. 못된 붙이는 어미를 고통스럽..

청우헌수필 2020.09.09

영자의 불꽃 생애

영자의 불꽃 생애 지금부터 꼭 사십 년 전 영자는 갈래머리 고3 여학생이었고, 나는 담임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재미난 얘기도 제법 잘하는 유머러스한 사람이라지만, 선생님이 무어라 하면 뱅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수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수업 시간에는 이마 위 잔머리 곱게 날리며 작은 눈 반듯하게 뜨고 설명에 열심히 귀를 세우던 모습이 떠오른다. 국어과인 담임의 영향을 받기라도 한 건가. 졸업하면서 지역 대학의 국문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한 번쯤 만났던 기억이 나지만, 그 후로는 무심히 지냈다. 십수 년이 지난 어느 해 세밑에 연하장을 보내왔다. 나를 잊지 않고 있었던가 보았다. 얌전했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다. 새해를 축복하고 건강을 기원하는 인사말 끝에 전화번호를 적어놓았다. 불혹에..

청우헌수필 2020.08.23

나무는 흐른다

나무는 흐른다 오늘도 일상의 산을 오른다. 지난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흠뻑 젖은 산에 강대나무 하나가 풀잎을 벗 삼아 쓰러져 누웠다. 강대나무는 싱그러웠던 몸통이며 줄기가 말라갈 때도, 흙을 이부자리처럼 깔며 쓰러질 때도 생애가 끝난 것은 아니다. 또 한 생의 시작일 뿐이다. 나무는 어느 날 한 알의 씨앗으로 세상을 만났다. 부는 바람 내리는 비가 강보처럼 흙을 덮어주었다. 뿌리가 나고 움이 돋았다. 파란 하늘이 보였다. 늘 안겨 바라보던 그리운 빛이었다. 제 태어난 고향 빛깔이었다. 바라고 바라도 그립기한 그 빛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해도 달도 뜨고 지고, 새도 구름도 날아가고 날아왔다. 그 빛을 향하는 마음이 시리도록 간절한 탓일까, 하늘 향해 뻗어 오르는 줄기 옆구리로 가지가 덧생겨 나고 ..

청우헌수필 2020.08.08

삶이 글이다

삶이 글이다 조 원장이 특강 한 번 해달라고 했다. 그는 시인으로 지역 문인협회의 회장을 물러나면서 지역 문학아카데미 원장을 맡아 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애를 써오고 있다. 나와는 지난 세월 속에서 친근한 직장 동료이기도 했고, 학교 동문이기도 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지역 문학의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말을 들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평생 거의 글을 껴안고 살아오긴 했지만, 아직도 자신 있는 글 한 편 옳게 못 써본 사람일뿐더러, 이 코로나 시국에 무슨 특강이냐며 손을 저었다. 글을 쓰고 있어도 글쓰기의 기본에 대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경륜을 숨기지 말고 좋은 일 좀 해달라 했다. 코로나는 적절히 대처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글쓰기의 기본은 무엇이며, 숨기고 있는 경..

청우헌수필 2020.07.23

아시나요 아름다운 시 외며 사는 행복을

몇 사람이 모여 시 낭송 모임을 만든 지 어느덧 십 년이 되었다. 그 세월 동안 수많은 시가 우리의 가슴에 안겨 저마다의 목소리를 타고 퍼져 나갔다. 좋은 시를 찾아 읽고 외면서 사는 일을 아름답게 만들어 보자며 한 일이었다. 회원들은 낭송 전문가인 회장님과 더불어 수시로 만나 연찬과 리허설을 거듭했다. 두 달에 한 번씩 하는 정기 낭송회, 한 해에 한 번씩 큰 무대를 얻어 여는 낭송 콘서트를 대비해서다. 낭송회와 콘서트는 거름 없이 잘 열어 왔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낭송은 어느덧 우리 삶의 한 부분이 되어 갔다. 시인이자 낭송가인 회장님은 여러 도서관이며 대학의 평생교육원에서 낭송 전문강사로, 낭송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오직 낭송예술을 더욱 떨쳐 보겠다는 일념으로 낭송 모임을 만드는 일에..

청우헌수필 2020.07.07

평안한 사람

평안한 사람 망팔쇠년도 성큼 넘어서고 보니 참 많이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은 아무리 백세 시대라지만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엄청 더 많은 걸 보면서 오래 살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살아갈 날에 대한 상상의 양보다 살아온 날에 대한 기억의 양이 더욱 많게 느껴지는 것도 많이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사람도 다 그럴까. 살아온 지난날 속에는 희로애락의 온갖 기억들이 점철되어 있을 것이지만, 돌리고 돌려 떠올려봐도 나에게는 기쁘고 즐겁고 떳떳했던 일보다는 힘들고 괴롭고 부끄러운 일들에 대한 기억이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지난 일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몸도 마음도 내려앉는 것 같아 무거워지기만 한다. 그때 그 일을 왜 그렇게 했을까, 그 사람을 왜 그렇게 대했을까, 그 순간 왜 그런 ..

청우헌수필 2020.0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