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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 일 배 가을이 여물어가는 강둑을 걷는다. 강물은 언제나 반짝이는 윤슬로 무늬를 새기며 쉼 없이 흘러가고 있다. 유유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배경 삼아 서 있는 둑의 벚나무는 화사했던 지난날꽃 시절을 뒤로 한 채 머리에서부터 붉은 물을 들여가고 있다. 억센 줄기로 벚나무를 힘차게 기어오르던 칡넝쿨은 한풀 꺾인 듯 넓은 잎을 추레하게 늘어뜨리고 있고, 길섶을 온통 제 세상으로 만들던 환삼덩굴도 기가 한껏 죽었다. 길쭉한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해맑게 피워내던 달맞이꽃도 머리를 수그린다. 그 꽃대에 가느다란 넝쿨을 감아올리며 빨간 꽃을 앙증하게 피워내던 둥근잎유홍초는 져가고 있지만, 산국이 줄기를 서로 기대며 조그만 꽃잎 속에 노란 미소를 담아내고 있다. 보라 쑥부쟁이도 하늘거리며 해맑은 ..

청우헌수필 2021.10.26

산의 얼굴

산의 얼굴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늠름하고, 산자락에 안긴 나무들은 언제 보아도 생기롭다. 나무는 늘 몸을 바꾸어 가면서 생기를 돋우어 간다. 지금은 한껏 푸르던 시절을 조금씩 넘어서고 있지만, 그렇다고 생기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생기’란 무엇인가. 싱싱하고 힘찬 기운이기도 하지만, 바로 ‘생명 활동’이 아니던가. 더없이 무성했던 저 나무의 잎새들은 노랗고 빨간 물로 치장하다가 된바람 불어오면 또 하나의 제자리인 땅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나무는 맨 가지만 남아 설한풍을 이겨 내야 하지만, 그때야말로 나무에게는 새로운 삶을 위한 부푼 꿈의 시간이다. 잎새가 내려앉은 땅이란 무엇이고 어디인가. 산이고 그 살갗이다. 나뭇잎은 산의 살갗 속으로 스며들었다가 하늘 맑고 물길..

청우헌수필 2021.10.13

어느 무덤

어느 무덤 이 일 배 어느 날 산을 오르는데 나란히 자리 잡은 두 무덤이 보였다. 어느 산에나 무덤은 많이 있고, 내외가 나란히 누운 쌍분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지만, 그날 본 그 무덤이 뇌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죽죽 뻗은 소나무 숲속 비탈에 땅을 잘 골라 봉분도 반듯하고 둥그스름하게 잘 다듬어 놓았다. 크기도 작지 않은 묘가 보존도 잘 되어 있고, 마른 잔디 위에 솔잎들이 정갈하게 덮여 있었다. 잡풀도 많이 나 있지 않아 말끔해 보이기까지 했다. 산소를 쓸 때만 해도 후손들이 범절을 고루 갖추어 조상을 잘 모시려고 애쓴 것 같다. 봉도 보기 좋게 짓고 주변도 잘 정리해 놓았다. 제법 지체 있는 집안의 산소에 후손들도 다 덩실할 것 같았다. 봉분이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로 보면 ..

청우헌수필 2021.09.22

미술관으로 탈출하다

미술관으로 탈출하다 이 일 배 “우리 일 한번 저질러 봅시다.” 같이 막걸릿잔을 들던 권 회장께서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도 답답해서 사지가 비틀릴 것 같다고 했다. 무슨 일을 저지를까 하니 ‘이건희 컬렉션’을 보러 가자 했다. 뜻밖이다. 권 회장께서 미술에 소질이나 조예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나도 마찬가지여서 미술로 주담을 삼아 본 적조차도 없다. “그냥 탈출해보는 거지요! 하하” 함께 웃었다. 「코로나19」는 많은 것을 묶어놓았다. 사람들을 마음대로 만날 수도 없고, 만나서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석 달마다 한 번씩 가던 문화유적 답사도 못 한 지가 이태가 다 되어 간다. 견문이라도 좀 넓히고 살자면서 지역 사람들로 모임을 지어 명승 고적을 찾아다닌 지 십 년이 넘었다. ..

청우헌수필 2021.09.08

산은 방이다

산은 방이다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녹음이 한창 무성하다. 커다란 나무는 커다란 대로, 조그만 나무는 조그만 대로 저마다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내리쬐는 햇볕 햇살이 뜨겁고 세찰수록 그늘은 더욱 후덕해진다. 산을 오르다가 우거진 나무 아래 그늘을 두르고 앉아 땀을 긋는다. 길고도 억센 잎이 빽빽이 모여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바람이 지날 때는 잎사귀가 그 바람을 부드럽게 재워 땅 위로 뿌려준다. 저 무슨 소리인가. 경쾌한 새소리 벌레 소리를 따라 나뭇잎이 춤을 춘다. 무슨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기도 하고, 먼 곳 어디 그리던 소식을 전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어디서 날아오는 향기일까. 나긋한 꽃 내음 같기도 하고, 풋풋한 풀 내음 같기도 하다. 나무 그늘은 반갑고 향긋한 저네들 세상 소식을 넌..

청우헌수필 2021.08.26

나뭇잎 행복

나뭇잎 행복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숲 그늘이 날로 짙어지고 있다. 잎새의 잎파랑이가 더는 푸르러질 수 없으리만치 푸르러진 것 같다. 햇살에 반짝이는 빛깔이 눈부시다. 생강나무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릴 즈음 잎눈을 수줍게 틔우기 시작했다. 세상을 향해 조금씩 눈을 떠나가다가 움이 되고 잎이 되어 세상의 빛을 안았다. 시나브로 깃을 세워 몸피를 불려 나가며 빛깔도 연두 연한 빛이 점점 초록 짙은 빛으로 변해갔다. 마치 어린 것이 세상에 태어나 젖니가 나고, 걷고,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듯이 잎도 그렇게 푸름을 더해간다. 청년이 기운과 기백을 한껏 펼치듯, 잎은 그 기백으로 무성한 녹음을 이루어낸다. 이제 잎은 어떻게 될 것인가. 청년이 생애의 꿈을 가꾸며 장년이 되어 자신과 함께 이웃을 위해 이바지..

청우헌수필 2021.08.10

산, 몸을 찾아서

산, 몸을 찾아서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걷는다. 무성히 우거진 숲의 그늘이 몸을 아늑하게 한다. 불같이 쨍쨍거리던 햇살도 숲에 닿으면 양순한 그늘이 되고 만다. 산은 언제나 싱그럽다. 숲이 있기 때문이다. 산은 언제나 아늑하다. 숲의 그늘이 있기 때문이다. 산에서는 흘리는 땀은 청량하다. 산의 땀은 몸을 새 깃처럼 가볍게 한다. 몸만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다. 몸 따라 마음도 가벼워진다. 가벼워지는 몸속으로 숲의 푸름이 스며든다. 푸름은 몸속으로 신선하게 가라앉는다. 푸름이 침윤한 몸속에는 아무것도 들 수가 없다. 세상의 어떤 호사도, 이해도, 상념도, 이념도 감히 자리를 넘볼 수 없다. 속된 근심 걱정거리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런 하찮은 것들이 어찌 이 푸름의 성역으로 들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처음 ..

청우헌수필 2021.07.24

사람은 땅을 본받고

동네 인심이 전 같지 않다고 한다. 날이 갈수록 말라가는 것 같다고 한다. 내가 이 마을을 산 지도 십 년 세월이 넘어 흘렀다. 산전수전의 한 생애를 정리하고 이제는 산 치레 물 치레로 살리라 하고 산수 좋은 곳이라 찾아와 산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 세월 따라 흐르지 않고 달라지지 않은 게 무엇이 있으랴만, 동네도 많이 변했다. 사람도 흐르고 산천도 바뀌었다. 모처럼 이 궁벽한 마을을 찾아와 살려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마을 사람은 두 팔 벌려 반기고 환영해 주었다. 사는 데에 어디 편치 못한 일이나 없는지 살펴주려고도 했다. 살면서 얼굴도 마음도 익어지니 처음 같지는 않았지만, 서로 노나 가지려는 인심은 쉬 달라지지 않았다. 집집이 돌아가며 마련하는 화기 그득한 자리로 정을 나누기도 했다. 늘 그렇..

청우헌수필 2021.07.12

엉겅퀴 사연

엉겅퀴 사연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녹음이 무성하다. 수풀이 우거진 어귀 오솔길을 오르는데 무엇이 바짓가랑이를 찌르듯이 잡는다. 놀라 돌아보니 엉겅퀴다. 날마다 걷는 길인데 오늘 나를 잡을까. 이제 비로소 꽃을 피웠노라며 저를 봐달라는 말인가. 어제는 미처 보지 못했던 꽃이 수술일지 꽃잎일지 모를 가시를 뾰족뾰족 뽑아 올리며 함초롬히 피어 있다. 붉은빛, 분홍빛, 자줏빛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송이를 이루고, 흰색으로 뻗어 올린 피침 하나하나에 붉은빛을 감고 있다. 줄기에도 잎에도 잔털이 송송 나 있고, 잎은 양쪽으로 깊게 갈라지면서 끝에 뾰족한 가시를 달고 있다. 그 가시가 나를 잡은 것이다. 꽃의 빛깔이며 생김새도, 가시가 나 있는 잎이며 줄기도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

청우헌수필 2021.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