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삶이 글이다

이청산 2020. 7. 23. 17:47

삶이 글이다

 

조 원장이 특강 한 번 해달라고 했다. 그는 시인으로 지역 문인협회의 회장을 물러나면서 지역 문학아카데미 원장을 맡아 문학의 대중화를 위해 애를 써오고 있다. 나와는 지난 세월 속에서 친근한 직장 동료이기도 했고, 학교 동문이기도 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지역 문학의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될 만한 말을 들려주면 좋겠다고 했다.

평생 거의 글을 껴안고 살아오긴 했지만, 아직도 자신 있는 글 한 편 옳게 못 써본 사람일뿐더러, 이 코로나 시국에 무슨 특강이냐며 손을 저었다. 글을 쓰고 있어도 글쓰기의 기본에 대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니, 경륜을 숨기지 말고 좋은 일 좀 해달라 했다. 코로나는 적절히 대처해 보겠다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글쓰기의 기본은 무엇이며, 숨기고 있는 경륜은 무엇인가. 권을 야박하게 뿌리치기가 어려워, 어느 도서관의 평생교육 과정에서 수강생들과 수필 쓰기 공부를 함께했던 일들을 새겨보며 어렵게 마음을 내었다. 강의 시간을 맞이하는 날까지 무엇을 말해 줄 것인가하는 고심이 늘 따라다녔다.

강의실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앉는 책상에 한 사람씩만 앉았다. ‘거리 두기를 위해 스무 명 정도로 제한했는데, 서른 명 가까이 온 것 같다. 중년을 넘어선 듯한 이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에는 글을 써온 지 오래되어 내가 알 만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이 글을 찾아온다는 것이 반갑고 고맙기도 했다.

십수 년 전, 아무 연고도 없는 이 고장에 발령받아 근무하게 되면서 조 원장도 만나고, 수려하고 정겨운 산천과 인심에 정이 들게 된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다른 곳으로 전근했지만, 그 정을 잊지 못해 퇴임하고 다시 찾아와 이 고장 사람 되어 살고 있다 하니 갈채가 터졌다. 오늘 내가 하는 이야기들이 너무 속이 없다 싶으면, 나를 이 자리에 불러낸 조 원장을 원망해 달라 하니 모두 웃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국어쓰기에 관한 기본 소양을 잘 갖추어야 할 것이라며, 국어에 관한 소양으로 잘 알아 두어야 할 정서법이며 문장의 구조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초보적이고 상식적인 이야기 같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걱정했지만, 마스크 위의 눈동자는 초점들이 또렷해져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표정을 마스크가 가려 주니 보기가 편하다는 내 말에 모두 폭소를 터뜨렸다.

문과 비문의 예를 이야기할 때는 눈도 표정도 더욱 활기를 띠는 것 같았다. 글의 소재와 제재, 주제, 간결한 문장 쓰기 등에 이어, 단락 짓기의 중요성을 말했다. 우리 인생도 모든 일이 물 같이 맺힌 데 없이 술술 흐르는 것이 아니라, 단락 단락들이 사슬을 지으며 흐르는 것이 아니겠냐며 첫 시간을 끝냈다.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어떤 분이 급히 앞으로 나왔다. 수필을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냥 써오기만 했네요. 이런 말씀을 해주는 분을 만나기 어려웠는데, 정말 감사합니다.……고 하며 손을 잡고 흔들었다. 오래전부터 이런 이야기를 좀 듣고 싶었다고 하는 얼굴에 진정 어린 표정이 서려 보였다. 별스러운 내용도 아닌 걸 두고 감격해 하는 모습이 오히려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유명한 시인 작가들이 와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길게 풀어놓는 이야기는 더러 들었어도,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고 했다. 뒤따라 나온 몇 사람도 다들 그렇다고 했다. 범상한 상식에 관한 말도 필요에 따라서는 긴요한 지식 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쑥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둘째 시간, 오랜 세월을 써와도 자신 없는 수필 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할 차례다. 수필가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언어로 그려내는 영혼의 화가라는 말로 먼저 풀어나갔다. 수필은, 상상을 바탕으로 체험을 반영하는 시, 소설과는 달리 체험을 바탕으로 한 상상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라며, 기억에 해석을 더하는 기억의 문학이요, 따라서 사후성 문학이라 했다. 수필을 쓰는 일은 일화 기억에 의미 기억을 엮는 일이라고 하며 좋은 기억을 쌓도록 해 보자 했다. 수필은 결코 붓 가는 대로 쓰는 무형식의 형식이 아니라, 체험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는 잘 짜인 형식의 산문 문학임을 늘 새겨 두자고도 했다.

좋은 소재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독서를 통해 글의 씨앗 문장을 잘 찾아야 하며, 오늘 나에게 놀라운 일,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일, 영감을 준 일은 무엇인가를 늘 성찰해 보자 했다. 수필을 몰라도 시는 쓸 수 있지만, 시를 모르고는 수필은 쓸 수 없다며, 좋은 시를 많이 읽어 시적인 감수성을 기르자 했다.

세상을 느낄 줄만 알아서는 작가가 될 수 없고, 느낀 것에 대하여 반응할 줄 알아야만 작가가 될 수 있다고도 했다. 삶이 곧 글이기에 잘 쓰려면 잘살아야 할 것이라는 말로 끝내면서 잘 들어주어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모두 박수를 모으며 앞으로 나와 기념사진들을 찍자고 했다. 내 손을 잡던 분은 언제 식사 한번 같이하자고도 했다.

칼칼하게 잠긴 목으로 헛기침을 삼키며 강의실을 나섰다. 조 원장이 다들 열심히 듣더라며 좋은 강의였다고 추어주었다. 정말 좋은 강의였을까. 내가 그렇게 하지도 못하는 일들을 다 잘하는 체하고, 모르는 것도 다 아는 체하지는 않았던가. 잘 살아야 잘 쓸 수 있다면서 나는 지금 잘살고 있는 건가. 내 말을 향해주던 눈빛들이 곧장 따라오고 있는 것 같았다.

삶이 글이다. 삶이 글이다.’라는 말이 마스크 낀 얼굴 속을 오래도록 맴돌았다.(202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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