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우헌수필

나무는 흐른다

이청산 2020. 8. 8. 20:40

나무는 흐른다

 

오늘도 일상의 산을 오른다. 지난밤 거센 비바람이 몰아치더니, 흠뻑 젖은 산에 강대나무 하나가 풀잎을 벗 삼아 쓰러져 누웠다. 강대나무는 싱그러웠던 몸통이며 줄기가 말라갈 때도, 흙을 이부자리처럼 깔며 쓰러질 때도 생애가 끝난 것은 아니다. 또 한 생의 시작일 뿐이다.

나무는 어느 날 한 알의 씨앗으로 세상을 만났다. 부는 바람 내리는 비가 강보처럼 흙을 덮어주었다. 뿌리가 나고 움이 돋았다. 파란 하늘이 보였다. 늘 안겨 바라보던 그리운 빛이었다. 제 태어난 고향 빛깔이었다.

바라고 바라도 그립기한 그 빛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해도 달도 뜨고 지고, 새도 구름도 날아가고 날아왔다. 그 빛을 향하는 마음이 시리도록 간절한 탓일까, 하늘 향해 뻗어 오르는 줄기 옆구리로 가지가 덧생겨 나고 잎이 우거지면서 몸피도 조금씩 불어났다.

그 잎과 가지며 몸통 위로 햇빛도 달빛도 손길을 보내오고, 날아가던 새도 구름도 쉬었다가 간다. 햇빛 달빛과 노는 날 눈도 오고 비도 내렸다. 새와 구름이 안겨 온 날 이슬도 내려앉고 바람도 불었다.

해도 달도 흘러가고, 새도 구름도 흘러갔다.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제 자리에서 뜨고지고, 제 자리를 날고 있는데, 제 몸이, 제 팔다리가 흘러간다. 아득히 먼 길을 허위허위 흐르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나무는 흘러 흘러갔다. 흐르다가 보니, 오직 한 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파란빛 하늘이 더욱 그리워진다. 그 하늘 향해 가슴을 벌리고 팔을 뻗어 올리다 보니, 꽃 피고 잎 돋는 철도 만나고, 그 잎 더욱 푸르러 가슴 한결 삽상한 시절도 만난다.

그것도 한때, 서늘해지는 바람 따라 잎이 조금씩 말라가는 사이에 고운 물도 들였다가, 그 바람 차가워지면 모든 잎을 지상으로 내려보내야 한다. 나무는 안다. 그것도 제가 흘러가야 할 길임을, 그 흐름 뒤에는 다시 푸르게 흘러가는 세월이 오는 것임을.

미련 없이 벗어야 더욱 푸르러질 것임을 안다. 매몰차게 떨쳐야 그리운 하늘 향해 더욱 뻗쳐오를 수 있을 것도 안다. 누구는 이를 일러 복명(復命)’이라고도 했다던가. 그래야 품을 파고드는 날 것들, 길 것들을 더 포근히 안아 줄 수 있을 것임도 모르지 않는다.

나무는 어제도 오늘도 끊임없이 흘러간다. 흘러온 흔적을 제 몸 안에 둥근 금으로 새기며 이력을 헤아려 보기도 한다. 그 흐름 속에서 다시 잎 돋고 꽃피고, 그 잎 무성해지다가 떨어져 가고, 그 꽃의 열매 제 자리로 내리게 하기를 묵묵히 거듭했다. 아득한 켜가 쌓인 것 같다. 그 역사의 금 그을 일을 다 했다 싶을 즈음 또 하나의 생애를 시작한다. 은퇴자의 삶으로 든다 할까.

한생의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한다. 잎 다 떨어뜨리고 버성긴 가지를 떨구기도 하며, 세상의 생기를 물리고 선 채로 말라간다. 강대나무로 가는 길이다. 그 몸에 팡이실을 비롯한 미생물들이 생겨나고, 작고 큰 날짐승 길짐승이 찾아 든다. 나무는 그것들의 상차림이며 집이 되고, 쉼터며 놀이터가 되어 세월 속을 흘러간다. 달도 해도 그대로고, 바람도 구름도 변함없이 드나들지만, 나무는 흘러가고 있다.

비가 세차게 퍼붓고 큰바람이 치던 어느 날, 강대나무는 땅 위에 몸을 누인다. 누워서도 온갖 것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일은 변함이 없다. 뭇 짐승들은 오히려 더 편안히 저를 찾는다. 더 아늑하게 그들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오로지 제 일이라 생각하며 또 먼 길을 흘러서 간다.

한 세기는 족히 흘러 왔을 것 같다. 나무는 제 몸피가 언제인지 모르게 작아져 있음을 본다. 흘러오는 사이에 시나브로 작아졌을 것이다. 몸을 떠난 것들은 어디로 갔을까. 몸 뉘어져 있는 땅속으로 들었을 것이다. 바라볼 곳은 하늘이지만, 들어야 할 곳은 땅속임을 모두 알고 있다.

또 얼마나 흘러왔을까. 푸른 삶의 때보다 더 먼 길을 흘러왔는지도 모르겠다. 제 몸이 누운 자리의 흙과 한 몸이 되어 있음을 본다. 아니다. 이제 제 몸은 비옥한 흙이다. , 어느 날, 언젠가 제가 배태했던, 아니면 그것과도 같은 조그만 씨앗 하나가 안겨 왔다. 이 얼마만의 해후인가. 그야말로 세기적인 만남이 아닐 수 없다.

고이 보듬었다. 그 조그만 것의 거름이 되어 온몸으로 감싸주고, 먹고 마실 수 있는 물길을 잡아주었다. 오래전 제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 조그만 것에서 뿌리가 생겨나고 움을 틔우며 바깥세상을 그린다. 가만히 보니, 그 조그만 것은 바로 저였다. 저와 몸이 다르지 않았다. 그렇구나, 또 나의 새 하늘이 시작되는구나. 나무는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흘러가는 것이 어디 나무뿐이랴. 흐르지 않는 것이 어디 있는가. 물도 흐르고 사람도 흐르고, 흐르는 세월 따라 세상 모든 것이 흐르고 있다. 나무는 물보다 사람보다 세월보다 조금 천천히 흐를 뿐이다. 그러다 보니 만나야 할 것도 많고, 보듬어 주어야 할 것도 적지 않았지만, 저의 천성이 아니던가.

흐르는 것은 흘러서 어디로 가는가. 일찍이 노자(老子)가 말씀하지 않았던가. ‘()는 가는 것이요, 가는 것은 멀어지는 것이요, 멀어지는 것은 돌아오는 것’(大曰逝 逝曰遠 遠曰返, 道德經25)이라고. ‘()’는 곧 도(), 천지자연이다. 모든 자연은 흘러갔다가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 오랜 세월 속을 흘렀던 나무도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가.

흐르는 나무여! 나는 지금 어디쯤 흐르고 있는가, 흘러 무엇으로 다시 돌아올 것인가.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가 흐르고 있는 산을 오른다.(202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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